9권 21화
제24장 천려일실(千慮一失) (21)
“천무공자여. 어찌하여 이곳에 왔나.”
칠검은 소호가 처했던 상황을 아는 듯이 보였다.
하긴,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소호는 오검과 팔검에 의해 붙잡혀 있다가 탈출했다. 같은 소속인 칠검이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카악―.
퉤!
칠검은 피가 섞인 침을 뱉어 냈다.
그건 모독이자 모욕.
오른손에는 검, 왼손에는 백린탄을 든 채 냉엄한 눈빛으로 소호를 노려보았다.
“네가 엮이지 않게 하기 위해 오검이 그리도 노력했건만. 이젠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나를 원망 마라.”
“…….”
“천무공자는 아직까지 불살(不殺)이라지?”
칠검의 가면이 활활 타서 피부와 달라붙었다.
“캬아아앗!”
덤벼드는 기세가 사납다.
온몸이 활활 타는 고통 속에서도 칠검은 구궁신행의 보법을 정확하게 밟았고, 쏘아 내는 검결은 간결하면서도 날카로웠다.
치리링!
쒜에에엑―.
“…….”
소호는 검 끝이 그의 중단에 거의 닿는 그 순간까지 묵묵히 명경지수의 마음을 유지했다.
그물처럼 촘촘한 무형기가 칠검이 검을 어디까지 휘두를지를 정확하게 알려 주니, 소호는 그의 검이 두렵지 않았다.
다만 경계해야 할 것은 왼손의 백린탄. 그리고 목숨을 도외시하고 덤벼드는 과감한 암습이다.
따아앙!
칠검은 소호가 박도를 휘둘러 검을 쳐 내도 포기하지 않고 연속해서 검격을 퍼부었다.
목과 가슴의 약점을 선연히 내놓은 채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른다.
휘리릭―.
따다다당!
죽일 수 있다면 죽여 보라는 식이었다.
그러면서도 휘두르는 검에는 검기까지 실려 있으니 상대하기에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
따다다당! 깡!
소호는 폭풍 같은 검격을 차분하게 모두 막아 냈다.
한 호흡에 이어지는 건 다섯 번의 검격.
이미 그사이에 철우는 다시 귀빈석으로 올라왔고, 칠검의 눈빛이 초조해지는 것이 보였다.
곁에 있던 왕진이 태연히 말했다.
“제법 검술이 뛰어나군요. 절정의 초입? 초절정은 아닌 것 같은데……. 으음, 무공은 어려워요. 그 정도 수준이 백검회의 칠 번을 달 수 있는 걸까요?”
소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왕진은 지금 상황을 알고 있기는 한 것일까?
지나치게 태연하고 의뭉스러운 목소리였다.
아니나 다를까. 칠검의 기세가 일변한다.
폭발하듯 타오르는 살기.
칠검은 진원진기까지 사용하였는지 한순간에 검끝에서 검기가 솟구쳤다. 미친 듯이 강한 힘으로 소호를 압박했다.
그뿐인가.
내뻗은 검이 스쳐 지나가자 청아한 매화향이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이십사수매화검법? 거기다가 검향지경!’
쉬이이익―.
맺고 끊는 검술의 경지가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달라져 있었다.
진원(眞元)진기를 태우는 자.
자신의 경지보다도 높은 힘을 얻을지니.
파라라락―.
소호는 여기서 흐름을 끊어야 함을 깨달았다.
쿠웅!
광견처럼 달려드는 칠검을 향해 오히려 한 발 나아간다.
두 치 차이.
한 치 반.
세 치.
이십사수 매화검법은 모두 종이 간발의 차이로 피해 냈다.
키이잉―!
소호의 두 눈이 번쩍 빛났다.
팔목을 유연하게 꺾으며 허공에 커다란 원을 그렸다.
그가 선택한 것.
태극검이었다.
아니, 박도를 사용하니 태극도(太極刀)라고 불러야 할까.
강(强)은 유(柳)로 상대해야 하는 법.
부드러운 경력. 한번 휩쓸리면 끈끈하게 달라붙으며 끝없이 이어지는 검술. 상대하면 상대할수록 사량발천근의 묘리로 그 힘이 강해지는 유(柳)의 검술을 택했다.
기이이잉―.
소호가 양발을 균일하게 내딛고 박도의 각도를 비스듬하게 위로 꺾었다. 칠검이 내뿜는 매화검술을 하늘 위로 쳐 냈다가, 둥그렇게 원을 그리며 돌고 돌아 태극.
쩌어엉―!
“큭!”
그 후엔 반대로 검끝을 엮어서 아래로 내리쳤다.
까드득!
파바밧!
바닥에 긴 칼자국이 새겨졌다. 칠검의 몸이 휘청거리면서 소호 쪽으로 끌려왔다.
지글지글.
가까워지자 살가죽이 타는 냄새가 따갑도록 코를 찌른다.
소호는 숨도 쉬지 못할 압박감 속에서도 눈살을 찌푸리지 않았다.
시간은 칠검의 편이 아니었다.
승부의 수가 곧 나올 터.
“캬아아악!”
칠검은 검술로 돌파구를 찾지 못하자, 결국 왼손의 백린탄을 내밀었다.
소호의 눈이 반짝였다.
‘결국!’
칠검에겐 안타깝고 미안하지만, 눈과 코에서 불꽃을 내뿜으며 활활 타오르는 광경은 이제 사양이다.
그는 재빨리 허리에 찬 요대에서 손바닥만 한 찻잔 모양의 철기, 봉신갑을 꺼내 들었다.
소호는 비스듬히 몸을 돌렸다.
꺼내 든 봉신갑을 등 뒤로 숨겼다. 뒷짐을 지는 듯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칠검은 아무것도 모른 채 손에 든 백린탄의 뚜껑을 한손으로 따고 있었다.
텅!
철컹!
촤르륵―.
소호는 봉신갑 아래쪽을 손가락의 감각만으로 더듬어 요철을 꾹 눌렀다. 손바닥만 했던 철기가 부챗살을 펼치듯 사람의 머리통만 한 크기로 변했다.
등 뒤에서 왕진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진다.
거슬렸지만, 지금은 한눈을 팔 때가 아니었다.
“캬아아악!”
칠검은 백린탄을 그대로 던지는 우(愚)는 범하지 않았다.
던지면 소호가 받아 내거나 쳐 낼 것을 알았을 것이다.
어찌할 것인가?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를 택했다.
결연해지는 눈빛.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돈다.
칠검은 백린탄을 왼손에서 그대로 터뜨려 버렸다.
펑!
“이런!”
칠검의 왼손에서 백린액이 울컥 솟아오르고, 사람의 피부와 닿은 백린액은 들끓는 겁화가 되어 시뻘건 불꽃을 피워 올렸다.
“그아아아아!”
칠검은 그것을 그대로 앞으로 던지려 했다.
검강으로 검벽을 만드는 무림오존급의 고수가 아닌 이상, 이미 불이 붙은 채 흩뿌리는 백린액을 막을 방법은 없다.
소호는 그렇기에 그 직전의 상황을 노렸다.
‘지금!’
무언가를 던지기 전에 사람은 어깨를 열고, 팔꿈치를 등 뒤로 잡아당기는 법이다.
소호는 바로 그 찰나의 순간을 잘라 냈다.
쒜에에엑―.
봉신갑을 앞으로 내밀어 조준하고, 뒤에 있는 철사를 잡아당겨 앞으로 쏘아 내는 것은 불과 반호흡 만에 이루어졌다.
키리리리리릭―.
까앙!
“……!”
텅, 하고 철과 철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강렬하게 타오르던 백린 불꽃이 마치 무언가에 잡아먹힌 것처럼 한순간에 사라진다.
주변에서 탄성, 탄식, 비명이 들려왔다.
가장 먼저 소리친 건 칠검이었다.
봉신갑이 백린 불꽃을 먹어 치우는 것과 동시에 그것을 쥐고 있던 칠검의 손을 잘라내 버렸다.
“끄아아아아악!”
비참한 비명 소리가 무산학관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칠검은 손바닥의 절반과 손가락 네 개가 모조리 잘려 나간 자신의 손을 보면서 울부짖었다.
심지어 불도 다 꺼지지 않았다.
반만 남은 손바닥은 지글지글 불타며 징그럽게 오그라들었다.
핏발 선 눈동자가 소호를 노려본다.
소호는 이미 내친걸음을 망설이지 않았다.
퍼억―!
전질보로 다가가 그의 오른쪽 무릎을 걷어차고, 부드러운 장타(掌打)로 가슴을 밀어 바닥에 눕혔다.
쿠웅!
칠검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스릉!
소호는 칠검의 목에 박도를 겨누었다.
“크윽……!”
칠검의 눈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갔다.
백린탄을 잃은 그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까드득.
칠검은 다시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소호는 놔주지 않았다.
칠검의 오른손을 왼쪽 발로 밟은 채, 냉엄한 눈빛으로 가만히 있을 것을 종용했다.
“흐윽, 흐윽.”
칠검은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헐떡이다가 말했다.
“죽여라…….”
소호는 침묵했다.
아직 꺼지지 않은 백린 불꽃에 휩싸인 채 땅에 떨어져 있는 봉신갑이 너무나 무겁게 느껴졌다.
“불살의 천무공자님은…… 끝까지 나를 죽여 주지 않을 것인가?”
“…….”
“그렇군. 멍청이 같으니.”
칠검은 오른손에서 검을 놓아 버리고는, 물러서려는 소호의 바지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영웅 놀이가 좋은가? 천무공자여. 어리석다……! 어리석어……! 어린애처럼 놀아나는 꼴이라니……. 잘 생각해라. 대의는 우리에게 있다. 너는 편을 잘못 택한 것이야.”
소호는 섬뜩함을 느꼈다.
무력으로 인한 것이 아닌, 사람의 됨됨이에서 소름이 끼쳤다.
소호는 주춤 한 발을 물러섰다.
왕진은 소호를 바라보며 박수를 쳐 주었지만, 소호는 외면했다.
무거운 표정으로 그 모든 것을 지켜보며 철탑처럼 버티고 선 철우가 보이고, 그 뒤에서 백검회의 사람들을 모조리 제압한 무산학관의 학생들이 소호를 향해 함성을 질렀다.
“천무공자가! 왕 태감을 구했다!”
“와아아아!”
“천무공자가 이겼다!”
무산학관 학생들을 시작으로, 무산제전을 지켜보던 관중들까지 모두가 환호했다.
분위기가 들썩인다.
소호를 향해 칭찬과 선망의 눈빛이 쏟아졌다.
평소라면 기분이 좋았을 광경.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가슴이 따끔거리는 느낌이다.
“이건…….”
소호는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지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알 수 없었다.
본능적으로 철 요대를 붙잡고 간신히 마음을 다잡았다.
가장 가까운 단상에서 섭주해가 밝은 얼굴로 소호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뭐지? 뭐가 잘못된 거지?’
주춤거리다가 옆을 보니 왕진이 웃으면서 흡족하게 박수를 치고 있었다.
“큭큭큭…….”
소호는 귓가에 들리는 나직한 웃음소리를 향해 휙― 하니 몸을 돌렸다.
어느새 다시 잡았을까.
칠검은 자신의 검을 꼿꼿이 세운 채 수직으로 내던졌다.
아무도 없는, 그저 벽뿐인 천장을 향해서.
“이왕 될 거면 영웅이 되어 봐라. 그리고 뼈저리게 느껴. 날 죽이는 건 너다. 천무공자…….”
나직하게 중얼거린 그의 말은 귀빈석에 있던 세 사람, 소호, 왕진, 철우만이 들을 수 있었다.
칠검이 내던진 검이 천장을 찌른다.
쩌억!
궁기가 얼려 두었던 얼음이 깨지고, 그 안에 얼어붙어 있던 백린액이 산산조각 나며 아래로 떨어졌다.
“안 돼!”
막으러 가려는 소호의 소매를 뒤에 있던 왕진이 붙잡았다.
무공을 모른다고 생각했건만, 소매를 붙잡는 힘이 범상치 않게 강했다.
후두두둑―.
잠시 멈칫한 사이에 이미 모든 게 늦어 버렸다.
바닥으로 떨어진 얼음 파편들은 밑에서 올라온 열기에 녹아 칠검의 전신에 스며들었다.
칠검의 몸이 발작하듯 떨렸다.
펄떡.
펄떡.
잔인한 펄떡거림 끝에 사지 육신이 뻣뻣하게 오그라든다.
검은색 연기와 함께 시뻘건 불꽃이 타오르는데, 칠검의 두 눈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또렷하게 빛났다.
“백검은 반드시 흑시를 단죄한다아아아(白劍必斷罪黑矢)!”
칠검의 절규는 불꽃이 되어 타올랐다.
소호는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가슴이 찌릿찌릿했다.
속이 울렁거리는 듯했다.
소호는 손이 하얗게 질리도록 허리춤의 철 요대를 꽉 움켜쥐었다.
“후후후훗.”
왕진은 나직하게 웃었다.
“백검회. 역시 재밌군요. 항상 저렇게 의미 없이 목숨을 버리도록 만들다니. 어떤 의미로 대단해요.”
왕진은 칠검의 분신(焚身)에도 아무런 감흥이 없는 듯했다.
소호는 멍하니 서 있었다. 왕진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소호의 손목을 잡고 귀빈석의 앞쪽으로 나아갔다.
“자, 오늘의 영웅이 되어 주세요.”
왕진은 소호의 손을 잡고 하늘로 들어 올렸다.
“백검회라는 악적들로부터 나를 구해 준 영웅입니다! 강호의 재인들이여! 천무공자라는 이름을 잊지 마세요!”
당당하면서도 대중을 휘어잡는 목소리였다.
와아아아―.
군웅들이 일제히 함성을 내질렀다.
“군자는 은혜를 잊지 않는 법! 본 공공은 이 일을 영원히 잊지 않고 반드시 보은하겠어요! 역시 무산학관은 무림 강호의 미래입니다!”
왕진이 몇 마디 말로 정리하자 무산학관은 이미 축제의 현장이나 다름없게 변해 버렸다.
흥청거리는 분위기, 선망의 눈빛 속에서 오직 소호만이 무겁게 침묵을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