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22화 (351/686)

9권 22화

제24장 천려일실(千慮一失) (22)

소호는 백 명의 적에게 포위되어도 빠져나올 자신이 있었지만, 그를 환영하고 선망하는 사람들을 외면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자신과 한마디 대화라도 나누고 싶어 활짝 웃으며 손을 뻗는 아이들을 어떻게 매정하게 뿌리칠 수 있단 말인가?

“자아― 자아―, 여러분, 제 말도 좀 들어주세요. 너무 천무공자만 칭찬해선 안 됩니다. 아까 백검회의 난동을 막아 낸 우리 무산철공주 대미미 소저와 장차 호걸이 될 전상 소협에게도 칭찬을 좀 해 주십시오! 그 뒤에 서 있는 건장한 청년들은 현무방의 십걸입니다!”

눈치 빠르게 끼어든 섭주해가 잘 어울리지도 않는 말투로 소리쳤다.

의외였다.

섭주해라고 하면 평소에 조용하고 앞에 나서지 않는 동생이었는데, 막상 앞으로 나서니 꽤나 달변가적인 면모를 보였다.

“소호 형, 어서 가세요.”

소호는 옆구리를 툭툭 찔러 주는 섭주해가 그렇게나 고마울 수 없었다.

그제야 귀빈실 내로 모여들기 시작하는 흑시군들이 보였다. 진화 작업이 다 끝났는지 궁기도 왕진의 곁으로 복귀했다.

소호는 심장이 쿵쾅거렸다.

지금은 저들과 최대한 얽히지 않는 게 중요했다.

소호는 최대한 다급하지 않게 보이려 노력하며 재빨리 그곳을 빠져나왔다.

어디로 갔을까?

모른다.

하지만 어디부터 찾아봐야 할지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위군.”

소호는 백호방 기숙사에 도착했을 때, 막 백설지의 방에서 문을 열고 나오는 남위군과 마주쳤다.

열린 문 너머, 충격을 받은 얼굴로 다탁 앞에 멍하니 앉아 있는 백설지가 보였다.

그녀는 소호가 왔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멍하니 찻잔 속 찻물을 들여다보는 그녀에게서는 절망에 빠진 듯한 허무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대체 무슨 일이야?’

소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백설지에게 당장이라도 가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보다 우선해야 할 일이 있었다.

당장이라도 떠나 버릴 것 같은 남위군을 붙잡아야 했다.

탁.

남위군이 문을 닫자 백설지의 모습이 사라졌다.

왜일까.

화가 났다.

가슴 아래 거궐혈 부분이 따끔거리는 느낌이었다.

소호는 남위군을 응시했다.

“설지 선배를 만나고 나온 거야? 이렇게나 위급한 상황에?”

남위군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

“무슨 이야기를 했어?”

“그걸 왜 묻…… 그랬지. 너는 그녀를 많이 따랐지.”

“뭐?”

“별거 아니다. 그저 떠나기 전에 꼭 말해 줘야 할 게 있었을 뿐이야.”

고개를 비스듬히 꺾은 남위군의 옆얼굴에서 애수가 감돌았다.

“형제를 잃은 심정은 누구보다 잘 아니까.”

소호는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

“떠날 거야?”

“그래. 그리고 그녀에게 무슨 말을 했든 그건 내가 네게 해 줄 말이 아니다. 듣고 싶으면 백설지에게 들어라.”

남위군은 당장이라도 떠날 것처럼 몸을 돌렸다.

아니, 몸만 돌린 게 아니라 실제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휴우.”

소호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붕붕 흔들었다.

다시 마음을 다 잡고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왔다. 빠른 걸음으로 남위군을 따라잡았다.

“위군, 아직 늦지 않았어.”

“뭐가 늦지 않았단 거지?”

“아무도 몰라. 너는 그냥 무산학관의 학생이야. 그것도 곧 졸업할. 조용히 있기만 해도 어차피 학관에서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도 않았어.”

“…….”

남위군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지만, 귀를 기울이며 듣고 있었다.

“위군, 형이 네가 이러는 걸 원했을까?”

“무슨 말이지?”

“내가 네 형이라고 생각해 봤어. 그럼 나는 네가 네 나이 또래 아이들처럼 즐겁게 살아가길 바랐을 거야. 당연한 일이잖아? 이 세상에 자기 삶을 버리면서까지 내 복수를 해 주길 바라는 가족이 어디에 있어?”

“……형에 대해 안다는 듯이 말하지 마.”

“계획은 내가 막았어. 너는 막혔고. 그걸로 끝난 거야. 이상한 조직에 들어갈 필요도 없고, 오검이니 뭐니 숫자가 들어간 암호명 같은 걸 받을 필요도 없다고.”

“조용히 해.”

“이제 무산학관의 ‘은위군’으로서 살면 돼. 우리가 무산학관에서 보낸 시간들의 유종의 미를 거두는 거야.”

“그깟……!”

남위군의 걸음이 멈춰졌다.

휙― 하니 돌아서서 성큼 다가온 청년의 두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그래, 네가……!”

남위군은 이를 악물고 내뱉었다.

“……막았다!”

분노, 좌절, 절망, 애증.

그 모든 감정이 엉망으로 뒤섞여 폭발한 얼굴로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래. 너는 해냈다, 천무공자. 대단하신 천무공자님!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의 평생 숙원을 막아 냈지. 그것도 입으로는 날 위해서라고 지껄이면서. 본인은 그걸 업적 삼아 영웅이 되면서! 뻔뻔하게. 나한테 유종의 미를 거두면 된다고?”

지금의 남위군은 상처 입은 짐승 같았다. 얼굴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손가락으로 소호의 가슴을 찔렀다.

소호의 표정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내가 뭐라고 그랬나? 제발 조용히 며칠만 있어 달라고, 그러면 서로 아무 일 없이 각자의 삶을 살 수 있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위군.”

“그게 그렇게 어려웠냔 말이다! 조금 더러운 일이라도 그걸 바라는 사람을 위해 한 번이라도 그냥 못 본 척 지나치는 거, 대단하고 고결하신 천무공자님께서는 그마저도 못하냔 말이야!”

목소리만 낮을 뿐, 그건 울부짖는 것과 동일했다.

“그건 아니야, 위군.”

“뭐가 아니지?”

“내가 고결해서가 아니야. 친구가 잘못된 선택을 하는 걸 두고 볼 수 없었을 뿐이지.”

“입 닥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떳떳하지도 않은 집단에 들어가도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 그들이 원하는 건 다른 거니까. 나는 팔검……그리고 칠검의 죽음을 봤어. 네가 그렇게 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아.”

“입 닥치라고 했다.”

남위군은 숨을 씨근거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는 뜨거운 눈빛으로 소호를 노려보다가, 이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분하고 슬픈 얼굴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가장 날 화나고 슬프게 하는 게 뭔지 아나?”

“뭔데?”

“난 이번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이렇게 실패할 줄 알았던 것 같다는 점이다.”

“……!”

소호는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남위군의 표정을 봐선 그냥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조금 전에 귀빈석에서 왕진을 암살하려고 했을 때 어떠했던가.

대단히 치밀하고 위력적이었던 암살 시도.

다행히 막기는 했으나, 불이 타오르고 백린탄이 터져 나가던 그 광경은 누가 봐도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사건이었다. 소호도 막을 수 있을 것이라 장담 못할 만큼 치밀한 작전이었다.

그런데 남위군은 실패할 거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궁기라고 불리던 그 왕 태감의 호위 때문에? 그런데 왜 백검회에 이야기하지 않았어?”

“아니, 그걸 예측한 건 나 혼자만이 아니라, 사실…….”

남위군은 복잡한 눈빛이었지만 자세한 사정은 끝까지 말해 주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에 무언가를 감추듯 입을 꾹 다물었다.

남위군은 다시 몸을 돌렸다.

성큼성큼 걸어 처음에 소호와 싸웠던 북동쪽의 숲길로 향했다. 소호도 자연스레 그 뒤를 따랐다.

각자 복잡한 상념에 빠진 두 사람은 반각가량의 시간 동안 묵묵히 걷기만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산제전이 열린 연무장에 모여 있었기에 길은 인적이 없이 한산했다.

“난 영웅이 되고 싶지 않았어.”

“…….”

“눈앞에서 살수(殺手)가 사람의 목숨을 노리면 나는 막을 거야. 그게 협(俠)이고, 무공을 익힌 무인이 해야 할 일이니까. 내가 다니던 무산학관의 축제를 망칠 만한 일이라면 더더욱.”

“잘나셨군. 그래서 결과에 대한 깊은 생각 없이 도의만 보고 몸을 움직였다? 사람들은 그런 걸 영웅이라고 한다.”

소호는 위군의 잔뜩 비틀린 목소리를 솔직한 마음으로 되받아쳤다.

“위군, 너도 영웅이야.”

“헛소리.”

“형제의 복수를 위해 목숨 걸고 나서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야. 거기에 올해 무룡전의 우승자잖아. 지금의 너라면 황실 무관(武官) 자리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을 건데. 그렇지 않아?”

한적한 숲속, 걸음을 멈춘 남위군을 향해 소호는 목소리를 높였다.

아직 정신적으로 완성되지 않은 나이.

게다가 방금 전에 혼란스러운 경험을 했다.

모든 것이 부족한 어린 청년이지만, 말을 하면 할수록 막연했던 생각이 점점 구체적으로 변했다.

정답이 보이는 듯했다.

소호의 마음속에서도 곧은 신념이 생겨났다.

“그러니까 해낼 거면 네 힘으로 해내.”

“뭐?”

“힘이 부족하면 더 길러! 정정당당하게 정면으로 가서, 왕 태감에게 네가 잘못했다! 잘못했으니 사죄하고 벌을 받아라!라고 말할 수 있게 움직이란 말이야!”

“……!”

“이런 불의(不義)한 암살 시도는 왕 태감의 명분만 더 강하게 만들 뿐이잖아!”

신념의 외침이요, 협의의 일갈이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깨달은 소호의 두 눈은 당당하게 빛나고 있었다.

“너…….”

남위군은 입만 벙긋 거리다가 침묵에 잠겼다.

혼란스러운 기색,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본다는 듯한 시선으로 소호를 바라본다.

소호는 거기에 한술 더 떠서 협조의 약속까지 했다.

“숫자가 모자라면 말해. 도의(道義)에만 어긋나지 않는다면 내가 도와줄 테니까.”

“…….”

“그러니까 돌아가자. 네가 있어야 할 곳은 무산학관이야.”

소호는 한 마디, 한 마디에 전부 진심을 담았다.

남위군은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먼 산만 바라보는 등에서 혼란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도대체…… 이해가 안 된다.”

남위군의 목소리는 떨렸다.

“왜 날 이렇게 붙잡는 거지? 지난 육 년간 우린 대화도 몇 번 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몇 번 나눴는가는 상관없어. 넌 내가 육 년간 봐 온 친구고, 이게 옳은 일이라는 게 중요할 뿐이야.”

남위군은 탄식했다.

“그런가.”

“그래.”

“너는…… 대단하군.”

소호는 씩 웃었다.

“고마워. 그래서? 남을 거야?”

“……아니.”

남위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안타깝군. 이렇게나 쉬운 것을.”

“뭐라고?”

소호는 중얼거리는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러면? 백검회로 돌아가게?”

“돌아가야겠지. 일단은.”

남위군은 마음이 확고해 보였다.

다만, 소호와의 대화로 응어리가 많이 풀린 듯 언뜻 개운해 보이기도 했다.

“으음…….”

소호는 이제는 남위군을 정말로 잡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나마 ‘일단은’이라고 했다는 것에 위안을 삼고 만족해야 할 것이다.

“장소호.”

“어?”

“나는 변할 거다. 네 말대로 강해지겠다. 도움이 필요할 때는…… 연락하지.”

성큼성큼 걸어가는 남위군과 그런 남위군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소호.

두 사람의 이별이 마무리 되려는 그 순간이었다.

“그래. 연락…….”

연락을 하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둠 속에서 치솟은 백색의 그림자가 남위군을 덮쳤다.

“……!”

채채채챙!

쩌엉!

다급하게 반격한 남위군의 단검이 단 하나도 남김없이 튕겨 나가고, 사나운 뱀처럼 치솟은 은빛 검날이 검은색 수투를 강하게 후려쳤다.

탁월한 시점의 기습, 그리고 완벽에 가까운 검술이었다.

수투를 얻어맞고 열려 버린 가슴.

푸화아악!

“큽……!”

비스듬히 가슴이 갈라진 남위군의 몸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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