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23화 (352/686)

9권 23화

제24장 천려일실(千慮一失) (23)

피바람의 장막을 걷으며 모습을 드러내는 자.

유준이었다.

투박한 재질이지만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흰색 무복을 입고 양손에는 새하얀 수투를 낀 채 검을 잡고 있다.

그는 상대의 가슴을 베었다고 방심하지 않았다.

수평으로 날카롭게 곧추세우는 검.

섬광 같은 일격이 남위군의 복부를 꿰뚫었다.

“큽!”

까드득!

남위군은 강철판을 덧댄 검은색 수투로 재빨리 검을 붙잡았지만, 유준의 힘은 그의 상상을 초월했다.

화아아악―.

“……!”

유준의 전신에서 차가운 겨울바람 같은 황량한 기세가 피어올랐다.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고, 태풍에 나무가 뿌리째 뽑히는 압도적인 자연의 힘이 한 사람의 몸속으로 들어간 듯했다.

치솟는 기세, 적황색 검기(劍氣)가 선명하게 뿜어졌다.

까드드득!

푸욱―.

“흡……!”

남위군의 손이 허공에서 헛돌았다. 수투의 철판이 두부를 자르듯 잘려 나간 것이다.

승부는 한순간이었다.

생사의 갈림길은 너무나 허무하게 지나가 버렸다.

철판이 잘리고 남위군의 손바닥이 너덜너덜해졌다.

유준은 손잡이 부분만 겨우 보일 때까지 검을 깊게 밀어 넣었다.

“안 돼!”

소호의 비명은 한 박자 늦고 말았다.

남위군의 몸이 크게 펄떡거리더니, 한순간에 잠잠해지면서 제자리에 멈춰 섰다.

“쿨럭.”

내뱉는 기침에 핏물이 섞여 나왔다.

가슴의 상처에서 시작된 피는 더 이상 뿜어지지 않고 엉겨 붙었다.

“크……윽…….”

남위군이 아무리 핏발 선 눈으로 노려보아도 유준은 지그시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무산학관을 다닐 때와 똑같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가식적인 웃음만 짓고 있었다.

남위군에게로 얼굴을 향한 채, 유준은 소호에게 말했다.

“더는 다가오지 마라, 소호. 다가오면 검으로 이 녀석의 배를 찢어 놓겠다.”

으득―.

소호는 이를 악물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려던 발이 천근만근 묶여 버렸다.

“오랫동안 너를 쫓고 있었다, 은위군.”

유준의 목소리에는 억양이 없었다. 아무런 감정 없이, 단지 해야 할 일을 한다는 투다.

“아니, 남위군이라고 불러야 하나?”

“닥……쳐…….”

“백검회가 쓰는 백린탄을 누가 제조하는지 찾는 게 나의 임무였다. 고생을 많이 했지. 이 땅에는 수많은 장인(匠人)들이 있지만 명장이라 불리는 자들 중에도 백린은커녕 그 백린탄을 담을 수 있는 용기에 대해 아는 자도 흔치 않더군.”

“…….”

“단서를 쫓다 보니 호광 진인이 있는 백단장이라는 곳까지 찾아갔었다. 신비한 도인이었어. 천살이니 천괴니…….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곳에서 기갑문과의 연관성을 발견했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예전에 알고 있던 어린 소년이 사실 기갑문의 종손이었고 백검회에서 백린을 만들었을 줄이야.”

“닥쳐……!”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겠지. 대단해. 무산학관을 다니면서 암중살문에 들어가 위험한 병기를 만든다.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업적이 아니다.”

유준은 검날을 옆으로 살짝 비틀었다.

이미 배를 관통하고 있던 검이다.

옆으로 살짝 움직였을 뿐인데도 장을 꼬아 버리는 뒤틀린 고통에 남위군은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유준은 그 자세 그대로 차분하게 물었다.

나지막한 목소리엔 음험한 살기가 가득했다.

“네가 만든 백린탄이 황실을 따르는 군사들을 몇 명이나 죽였는지 아나?”

“군사는 무슨……. 권력에 빌붙은 파락호들 주제에…….”

“흑시군이 백 명이 넘게 죽었고 천여 명이 다쳤다. 위험한 물건을 만들고 그걸 황실을 해하기 위해 쓰다니 만 번 죽어 마땅한 대역죄인!”

“그것밖에 못 죽였나……. 더 만들었어야 했는데…….”

“그래?”

유준이 용기가 가상하다는 듯이 비웃었다.

남위군은 목숨 줄을 상대방에게 잡힌 채로도 진심을 다해 비웃었다.

유준은 자비롭지 않다.

당연하지만 그 대가는 장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이었다.

“으아아악!”

유준은 손을 비틀었다. 그는 귀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코앞에서 들으면서도 차분한 안색을 유지했다.

“내 검은 지금 너의 살가죽만 뚫었을 뿐 내장을 관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 치만 위로 올라가도 여러 종류의 장기가 잘리고 뒤섞여서…… 죽겠지.”

“끄으…….”

“대역죄인이긴 하지만 능력이 있는 것도 사실. 그러니 딱 한 번만 묻겠다, 남위군.”

유준이 검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산뜻하게 물었다.

“우릴 위해 일해라. 기관진식과 백린탄. 이제는 나라를 위해 쓰는 거다.”

고통에 신음하던 남위군이 멈칫 몸을 떨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부릅뜬 눈에선 살기가 가득하다.

“뭐라고?”

“왕 태감을 위해. 그리고 이 땅의 황실을 위해 일해라. 그러면 살려 주겠다.”

“……하하핫.”

남위군은 쉬어 빠진 목소리로 웃었다.

“올해 들은 말 중에 가장 웃겼다, 유준.”

“뭐가 웃기지?”

“모든 것이! 하핫, 왕 태감을 위해 일하라고……?”

“위군!”

소호는 격정적인 마음으로 함부로 대답할 것 같은 남위군을 불렀다.

이미 암습으로 목숨 줄을 잡혀 버린 상황이었다.

지금은 최대한 상대의 심기를 거슬려선 안 됐다.

무산학관에서 배운 가르침에서도 그러지 않았던가. 이미 늦었다면 패배를 시인하거나, 물러서는 것도 괜찮다고.

젊은 시절의 패배 몇 번은 아무런 흠도 되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걸 위해서라면 거짓 투항이라도 해야 한다.

그게 남위군을 살리는 일일 터.

“후후후.”

남위군은 고개를 저었다.

묵묵히, 나직하게 웃음까지 흘리면서.

그러고는 당당하게 버럭 소리쳤다.

“유준! 개소리하지 마! 쿨럭! 나를 뭘로 보는 거냐. 간신배 역적 놈을 돕느니 차라리…… 자결하겠다.”

“어리석군.”

유준은 더는 묻지 않았다.

그저 촘촘하고 섬세한 무형기로 남위군의 전신을 꼼꼼히 경계했다.

그의 마지막 경계심이 향한 곳은, 남위군의 입속이었다.

“입안의 백린은 사용하지 않을 건가?”

유준은 눈을 감고 있었지만, 눈을 뜬 자보다 더욱 많은 것을 보고 있었다.

남위군은 소호를 힐끔 바라보았다.

이를 악물고 잠시 고민하였으나, 그가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휘리리릭―.

남위군은 백린탄 대신 발작하듯 단검을 내던졌다.

여전히 날카롭긴 하지만 그 안에 실린 힘은 전보다 약하다.

기습에 이어 복부를 관통당하는 치명상까지 입었다.

원래대로의 기량이 나온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터.

“안타깝군.”

유준은 무심하게 그리 중얼거린 후.

촤아악!

“……!”

잔인하게 검을 비틀면서 손잡이를 거칠게 뽑아냈다.

검 주변을 견고하게 덮은 적황색 검기를 쫓듯 남위군의 핏물이 허공을 적셨다.

목숨을 건 반격의 끝은 허무했다.

유준은 아무렇지도 않게 날아오는 단검을 고개만 젖혀 피하거나 검 끝으로 쳐 내서 막아 버렸다.

“암습만…… 아니었어도…….”

남위군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이제 와서 말해 봤자 무얼 할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다.

양손으로 복부를 붙잡은 남위군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남위군의 무릎이 천천히 땅에 닿았다.

그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홍수를 손바닥만 한 제방으로 막는 셈이었다.

아무리 양손으로 그러모아도 울컥울컥 새어 나온 핏물이 자꾸만 땅을 적신다.

잠시 소강상태가 된 틈을 놓치지 않고 소호가 황급히 달려들어 남위군을 부축했다.

“이런……!”

남위군의 몸이 너무나 뜨겁고, 얼굴은 너무 창백했다.

잠깐 앞섶을 잡았을 뿐인데도 손이 온통 피로 새빨개졌다.

마치 물에서 막 꺼낸 빨래를 손으로 잡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다.

사람의 몸에는 이렇게나 많은 피가 흐른단 말인가.

소호는 가슴이 먹먹하고 손이 덜덜 떨리는 상황에서 남위군의 가슴과 복부를 지혈했다.

피가 흐른 만큼 생기도 빠져나간 듯했다.

평소라면 소호의 손길을 탁― 하고 기분 나쁘게 쳐 냈을 남위군이 몸에 힘을 뺀 채 가만히 기대어 있었다.

쌕쌕거리는 숨결이 차갑다.

소호는 남위군의 혈도를 짚고, 옷자락의 천을 끊어 남위군의 상처를 묶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소호는 억눌린 목소리로 물었다.

뒤로 훌쩍 물러난 유준은 더 이상 남위군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미 끝난 일.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한 태도다.

유준은 항상 품 안에 챙겨 다니는 작은 천으로 검날의 피를 깨끗이 닦아 내고 있었다.

방금 전에 잔인한 일을 저지른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태연했다.

“도대체 왜…….”

소호는 멍하니 굳어진 채 생각했다.

어째서 갑자기 이런 일이 생겼는가.

깊은 대화를 나눈 끝에 비로소 친해진 듯했는데.

이제 백검회에서 나오면 좋은 친구 사이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위군.”

쿨럭.

남위군은 피를 토해 냈다.

창백한 안색으로 허탈하다는 듯이 웃는다.

복잡한 기색도 잠시.

뭔가를 생각해 낸 듯 먼 곳을 바라본다.

그 모습을 보니, 소호는 함께 갇혀 있었던 팔검이 떠올랐다.

“팔검은, 마지막에 자신의 고향과 문파를 말했었어.”

“……유치하군.”

벌레가 기어가듯 작은 소리였지만 소호는 그래도 ‘위군’답게 굴 만한 힘이 남아 있다는 것에 조금이나마 안도했다.

“유준…….”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남위군이 같은 무산학관의 친구라서 구하려 했을 뿐. 그가 한 행동은 잘못된 것이었으니까.

어쩌면, 이렇게 죽임을 당하는 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납득은 되지 않았다.

어째서인가.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 일방적으로, 잔혹하게 죽여도 되는 것인가.

“항상 이렇게, 잔인하게 사람을 죽인 거야?”

유준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물론, 그게 죽여야 할 사람이라면.”

“이건 옳지 않아.”

“그건 네가 정하는 게 아니다, 소호.”

휙―.

핏자국을 다 닦아 낸 유준이 검을 곧게 세워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무인인 나는 검(劍)의 역할에 충실하면 될 뿐. 그게 옳은지 그른지 정하는 것은 내가 모시는 분이 할 일이다.”

“하핫.”

소호는 우습다고 생각했다.

“생각과 책임감을 다 남에게 맡긴다? 치사해. 치사한 변명이야.”

“그래? 너는 나라를 움직이는 그분보다 더 뛰어난 결정을 할 자신이 있나?”

유준은 코웃음 친 뒤에 냉랭하게 말했다.

“백검회의 오검은 역모의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으니 죽일 만해서 죽였을 뿐. 후회는 없다. 너에게도 경고하겠다. 역모의 무리 따위와 엮이지 마라. 그리고 대인의 곁으로 와서 신수의 힘을 얻어라.”

철컥.

검집에 검이 들어가는 소리가 섬뜩했다.

“신년 첫날에 황학루로 와라. 더 이상의 권유는 없다. 이 이상 거절한다면…… 네 주변 동생과 친구들을 베겠다.”

“뭐?”

“싸울 건가?”

지그시 내리깐 목소리.

검집에 손을 얹은 채, 은은하게 적황색 검기를 피워 올리는 유준의 살기는 압도적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