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권 25화
외전 ― 전장귀환(戰場歸還)
진구는 늘 자기가 꽤나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 평범한 농가의 아홉째 자식으로 태어나 이름도 단순하게 구(九)가 되었다.
열두 살 언저리의 진구는 철부지 사고뭉치였지만, 그때 이미 ‘이대로 살다간 별 볼일 없이 죽겠구나.’라고 생각했던 것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했다.
평범한 농가의 아홉째 자식이 할 수 있는 선택이란 건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첫째나 둘째 형이 물려받을 땅에 빌붙어서 소작을 하거나, 아니면 이름 모를 부잣집에 빌붙어서 소작을 하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소작농이다.
태어나자마자 보고 자란 게 농사밖에 없는데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러던 와중에 북로전쟁에 나갈 병사를 구한다는 소식은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나 다름없었다.
진구는 그대로 부모에게도 말하지 않고 집을 나와 버렸다.
가족에 대한 미련은 없었다.
부모든 형제든, 눈에 안 보이면 ‘어디서 밥 빌어먹다 죽었나 보다.’라고 말한 뒤에 신경도 안 쓸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진구는 그들을 탓하지 않았다.
자기라도 그랬을 테니까.
세상은 냉혹하다.
아무런 힘도 없이 땅이나 파먹고 사는 촌부들에겐 더욱더 잔인한 것이 세상이다.
그런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뭔들 못할까.
다행히 병사가 된 진구에겐 재능이 있었고, 백에 아흔다섯은 죽는다는 첫 번째 전투에서 당당히 살아남아 공훈까지 세웠다.
첫 번째에 살아남으니 그다음 전투는 쉬웠다.
살아남고, 살아남고, 또 살아남았다.
그게 다섯 번을 넘어가니 전쟁터의 높으신 분들이 진구의 얼굴을 알아봐 주기 시작했다.
오장(伍長)이 된 지 얼마 지나기도 전에 백부장(百夫長)이 되었다.
그때쯤이었을 거다.
‘적룡’에 가 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 게 말이다.
***
“그래서 나는 과감하게 적룡에 가 보기로 했어. 원래 소속된 곳에 가만히 있든가, 아니면 청룡대에 갔어도 부장(副將)까지는 했을 것 같은데……. 뭐, 어쨌든 전쟁터에서 이름을 날리기엔 적룡기마대만 한 곳이 없었거든.”
진구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적룡기마대라는 곳은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사지(死地)만 찾아다녔어. 지금 생각해 보면 저 윗분들이 우릴 버리려고 했던 것 같아. 그런데 자꾸 살아남으니까. ‘어? 이것 봐라? 그럼 이것도? 이건 어때?’ 하면서 점점 더 어려운 짓을 시킨 거지. 나중엔 무슨 오십 명으로 오천 명이 넘는 부대를 쫓아내길 바라더라니까?”
진구는 소리 내어 웃었다. 진구가 어깨를 들썩거릴 때마다 주변에서 끅끅거리는 신음 소리가 대답 대신 들렸다.
“오십으로 오천이라니……. 말도 안 되지. 하핫, 아무리 좁은 관문을 막고 버티는 일이라지만 숫자가 백배가 넘게 차이 나잖아? 군수를 담당하던 짠돌이 원 장군 몰래 창고에서 화포란 화포는 모조리 끌고 오고, 이틀 밤낮을 정신없이 싸우고 나니까 철 갑옷이 너덜너덜해져 있더라. 물론 결국 해내긴 했어. 해내긴 했는데……. 제정신으로 내릴 수 있는 명령이 아니었어, 그건. 그걸 받아들인 우리 대주님도 제정신이 아니었고.”
진구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입가엔 아련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말이 너무 많았네. 이해해 줘. 지금 기분이……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아서 말이야.”
진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피투성이. 시산혈해.
박살 나고 부서진 시신들이 길바닥의 돌멩이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널브러져 있었다.
자세히 보면 그들은 모두 사인이 비슷했다.
가슴이 꿰뚫리고 몸이 접힌 채 아무렇게나 처박힌 게 절반이다. 하얀색 가면은 모조리 깨져서 얼굴에 대롱대롱 걸려 있었고, 특히 입이 멀쩡한 시신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수가 무려 서른 명이다.
진구는 단신으로 쳐들어와 서른 명의 백검회 무인들을 처단한 것이다.
“끄으으…….”
가면에 구(九)라는 숫자가 새겨진 사내가 신음을 토해 냈다.
진구는 그의 턱을 붙잡고 있던 왼손에서 힘을 조금 뺐다.
그제야 숨통이 트였는지 사내가 거세게 기침을 토해 냈다.
“쿨럭! 끄으, 우여……라…….”
“죽여 달라고? 그건 어렵지 않지. 근데 네가 하필 구(九) 번이라서 살려 준 건데 좀 아깝지 않아?”
“퉤!”
진구는 구검이 뱉은 침을 고개만 살짝 기울여서 피해 냈다.
“난 그런 걸로 기분 나빠하지 않아. 더한 것도 많이 겪었거든. 내가 궁금한 건 그거다. 도대체 여기에 뭘 숨겨 놓은 거야?”
진구는 진지하게 구검의 두 눈을 들여다보았다.
오기와 깡으로 가득 차 있던 구검의 두 눈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공포에 질려 간다.
진구가 진심으로 살기 가득한 기세를 뿜어내자 온 세상이 까맣게 변해 버리는 듯한 충격을 받은 것이다.
“끄아으…….”
구검은 자신의 몸에서 생기가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거대하고 막강한 살기 앞에서 그저 숨만 쉴 줄 아는 무력한 사냥감에 불과했다.
“난 여길 박살 내러 온 게 아냐. 그냥 살펴만 보고 가려고 했어. 책임자가 있다면 이야기해 보고, 우리 마을이랑 상관이 없다면 뭐…… 응원도 해 줄 수 있었지.”
진구는 억울하다는 듯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덤볐잖아. 죽기 살기로. 그것도 저렇게 이상한 암기를 써서 자진까지 해 가면서.”
진구가 오른손에 들고 있던 작살 같은 철창으로 건물의 입구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머리에서 상체까지 새카맣게 타 버린 시신이 지금도 탁탁거리는 소리를 내며 하체를 불태우고 있었다.
진구가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만난 사람이며, 가장 먼저 암기를 써서 진구를 공격하려 했던 인물이다.
진구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나 아니면 당했다, 저거. 무슨 살수들처럼 입안에 저딴 걸 숨겨 놓고 그래?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너희들이 보이는 족족 입부터 박살 냈잖아.”
“끄으으……!”
“내가 지금까지의 경험상, 실패하면 목숨부터 버리는 놈들 중에 제대로 된 놈들이 없었어요. 그래도 가면에 숫자가 쓰여 있는 네가 제일 높은 것 같으니 한번 말해 봐. 왜 이렇게까지 한 거야?”
“…….”
“도대체 뭘 숨기고 있기에 이렇게나 과민반응을 한 거냐고.”
진구는 지그시 구검을 응시했고, 심력(心力)을 다해 흔들린 그는 사소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눈동자가 저쪽을 보네? 그것도 걱정스럽고 불안해하면서. 저쪽에 뭐가 있는데?”
“……!”
구검이 깜짝 놀라 부정하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전쟁터에서 ‘제대로 된 심문’을 본 적도 있는 진구가 보기에 구검은 아직 세상 경험도 못한 어린아이와도 같았다.
진구는 구검을 땅바닥에 내팽개친 뒤 붉은색 천을 길게 늘어뜨려 장식해 둔 나무 벽을 향해 다가갔다.
퉁, 퉁.
손으로 두드려 보니 안에서 비어 있는 소리가 났다.
가벽(假壁)이다.
그리 두껍지 않는 나무판으로 벽처럼 위장해 놓았을 뿐, 이 안에는 꽤나 넓은 방이나 아니면 어딘가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는 게 분명했다.
“여기였군.”
진구는 씩 웃었다.
옆에서 구검이 안 된다는 듯이 발악하며 몸을 꿈틀거렸지만 이미 팔다리 관절이 모두 박살 난 몸. 위협이 안 되는 송충이나 다름없었다.
“그만 조용히 하고 거기서 보고 있어. 난 네가 걱정하던 이곳을 확인해 볼 테니까.”
진구는 오른손에 든 철창을 들어 올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쒜에에엑―!
“……!”
이른 아침에 창틈으로 새어 든 햇살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백색 청강검이 나무 벽을 뚫고 튀어나왔다.
그대로 목이 날아가지 않은 것은 진구의 반응이 빨랐던 덕분이다.
진구는 황급히 상체를 뒤로 빼면서 물러섰고, 새하얀 청강검은 마치 검 끝에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진구의 뒤를 무섭도록 추격했다.
서걱―!
쿠구구구궁―.
가벽이 십자(十字) 모양으로 쪼개지는가 싶더니 수십 개의 파편이 되어 사방으로 날아왔다.
티티티팅―.
진구는 철창을 회전시켜 날아오는 나무 파편들을 일제히 쳐 냈다.
안에서 검은색 무복을 갖춰 입은 백가면의 사내가 튀어나왔다.
키는 육 척.
팔은 길고 손가락도 길어 타고난 검사의 체형이다.
백가면엔 이제껏 보지 못한 영(零)이라는 숫자만 새겨져 있는 것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두 개의 눈구멍 사이로는 용맹하면서도 섬뜩한 집념이 줄기줄기 새어 나왔다.
발을 내딛자 오행의 기운이 조화롭게 기세를 더하고, 검을 흩뿌리자 마치 눈앞에 거대한 매화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 듯 수많은 검격들이 꽃잎이 되어 시선을 사로잡았다.
진구는 그 순간 향긋한 꽃내음을 맡는 듯한 환상에 휩싸였다.
압도적인 기세, 놀라운 검기(劍技)였다.
“화산?”
진구는 믿을 수 없는 심정으로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검향지경이라니.
화산파의 무공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제껏 보아 온 백검회의 인물들과 무공의 수준이 다르지 않은가.
앞서 보아 온 백검회의 무인들이 알에서 막 깨어난 병아리라면 지금 눈앞에 있는 자는 두 날개를 한껏 펼친 대붕(大鵬)이다.
휘리리릭―.
스르륵 다가온 검 끝이 진구의 소맷자락에 닿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소맷자락 전체가 난도질되며 잘려 나갔다.
대경한 진구는 두 다리를 강하게 뿌리박고 양손으로 철창을 붙잡았다.
“스으읍― 후우!”
왼손은 앞으로 뻗고, 오른손은 허리에 붙인 채 거창의 자세를 취한다.
후우우웅―.
격하게 빨려 들어왔던 공기가 한순간에 폭발하듯 터져 나간다.
쒜에에에에엑―!
전력을 다한 찌르기 일격.
군문에서 용의 수염 자세라고 부르는 평범한 거창 자세가 진구가 펼치자 막강한 위력의 절세 무공이 되어 버렸다.
채채채챙!
상대도 경시하지 못하고 오행매화보로 물러서며 몇 번이나 검을 휘둘렀다.
진구가 뻗어낸 찌르기는 방향이 틀어져 애꿎은 천장을 꿰뚫었다.
나무판이 뚫리고, 대들보가 무너지며 머리 위에서 온갖 파편들이 후드득 떨어졌다.
‘위험!’
진구는 다시 한 번 훌쩍 뛰어 뒤로 물러섰다.
백가면의 두 눈에서 분노와 증오가 번뜩였다.
“이놈! 어딜 도망가는가!”
벼락같은 노성과 함께 내리치는 천류신화검법이 진구의 가슴을 길게 갈랐다.
진구에게는 미처 반응할 시간도 없었다.
극강의 쾌검격.
화산파의 현기 가득했던 무공이 막강한 위력을 지닌 위험천만한 살인검으로 뒤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큭?”
진구는 신음을 흘리면서도 발작적으로 창을 휘둘렀다.
다행히 상처는 얕았다.
작살 같은 철창을 휘둘러 추가 공격을 막아 낸 뒤, 다시 한 번 창을 앞으로 내찔렀다.
‘관통’에 특화된 찌르기가 나선형으로 회전하며 정면을 꿰뚫는다.
쒜에에에엑―.
“……!”
이번에는 영검의 눈빛도 일변했다.
진구의 공격에 담긴 공력을 한눈에 알아챈 것이다.
그는 한 자루 청강검으로 공격을 맞받지 않고 피하는 것을 택했다.
퍼버벅!
상대가 피했음에도 진구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주변의 나무 벽을 부수고, 박살 내고, 꿰뚫으며 무지막지하게 돌진한 창이 대들보를 박살 내고 창끝이 뒤로 튀어나온다.
퍼엉!
“……!”
창끝이 닿은 나무판의 뒤편에서 뒤늦게 진구의 공력을 이기지 못하고 나무 조각들이 튀어 올랐다.
진구는 그 자세 그대로, 마치 커다란 망치를 휘두르듯 철창을 머리 위로 회전시켰다.
쿠와아아―.
두 발을 땅에 박아 넣고, 허리를 회전시키면서 전력을 다해 옆으로 휘두른다.
건물의 중심 기둥이 창에 얻어맞으니 화탄을 맞은 듯 근처의 벽면들이 일제히 터져 나갔다.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었다면 눈을 의심할 위력.
인간의 몸으로 행할 수 있는 극한의 무공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으득―.
백가면의 사내도 진구의 특별함을 느낀 듯했다.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 바닥에 쓰러진 시신들과 창밖을 번갈아 보는 그에게서 초조함이 느껴졌다.
쿠웅!
끼릭― 드드드드―.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건물이 들썩이며 기둥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진구는 영검을 노려보았다.
영검은 무리해서 진구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유려한 발놀림으로 피하는 몸놀림은 비류보(飛流步), 소리 없이 어느새 훌쩍 물러서는 몸동작은 그야말로 암향표(暗香飄)의 정수다.
우르릉―.
건물이 흔들리며 무너지려는 기색을 보일 때까지, 진구의 공격은 단 한 번도 영검에게 적중되지 못했다.
몇 번 안 되는 출수만으로도 화산 무공의 정수를 보여 준 사내.
영검은 숨을 몰아쉬는 진구와 열 걸음 정도를 떨어진 채 냉랭한 눈빛으로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는 백검회의 영검, 육모담이다. 네놈은 누구인가.”
“……진구.”
“진구. 지금은 시간이 없어 먼저 떠나지만, 반드시……. 네놈은 내 손으로 죽이겠다.”
영검, 육모담은 곧바로 몸을 돌려 건물 밖으로 빠져나갔다.
“……뭐?”
진구는 어안이 벙벙한 채 굳어 있다가, 그제야 상황을 알아채고는 벌레 씹은 듯한 얼굴이 되었다.
황급히 밖으로 따라나서 보니, 어느새 그곳엔 주변에 사는 평범한 민초들이 잔뜩 모여서 흔들거리는 건물을 걱정스럽게 보고 있었다.
그들 중에 육모담으로 보이는 자는 없었다.
“놓쳤나……!”
진구는 이를 갈면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피투성이가 된 손.
막강한 경력을 버텨 내느라 손바닥의 피부가 너덜너덜했다. 조금 전에 그의 창을 아무렇지도 않게 쳐 내던 검술을 떠올리니 소름이 끼쳤다.
“백검회에 이런 강자가 있었다고……?”
진구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먼 동북 방향을 바라보았다.
소호가 엮인 일에서 이런 강자가 나타나다니.
예상 밖이다.
그는 연락을 취해야 함을 깨달았다.
“마을에 알려야겠어.”
진구의 목소리는 앞날의 험난함을 예고하듯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