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27화 (356/686)

10권 2화

제25장 회혼비처(回魂秘處) (2)

병사들은 고개를 꼿꼿이 들고 답했다. 자꾸 우릴 귀찮게 하지 말고 궁금한 게 있으면 직접 물어보라는 식이다. 이만한 기개가 있으면서 왜 천무공자에게는 겁을 먹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안에…… 있다고?”

서달은 신음을 흘렸다.

한 달간의 추적 끝에, 드디어 천무공자가 담장 너머 손닿을 거리에 있다니.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다.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한 가지 묻겠다. 지금 이곳을 담당하는 사흉은 누구인가? 안에서 지키고 있나?”

“으음, 그게…….”

병사들이 난색을 표했다.

“오 일 전부터 담당이 백귀(白鬼)로 바뀌었는데 여길 누가 쳐들어오겠냐고, 형식상 지키는 것 아니냐고 해서…….”

“그래서?”

“먼저 처리할 일이 있다고 다른 곳으로 가셨습니다.”

“뭐야?”

서달은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이해는 된다.

제멋대로인 모습이 딱 사흉이 할 법한 행동이니까.

하지만 하필 지금, 이렇게 자리를 비웠을 때 천무공자가 오다니.

‘어떻게 일이 이렇게 꼬일 수가……? 아니, 아니지. 일부러 노렸을 수도 있지. 만약 그렇다면 치밀한 행동이다. 책사가 있는 건가?’

서달은 이번 일은 그가 노린 상황이라는 가정하에 마음속에서 천무공자에 대한 위험도를 한 단계 위로 끌어 올렸다.

“사흉이 없다면, 안에 흑시군은 있나?”

“예. 다섯 명씩 스무 조. 흑시군 백 명이 대기 중입니다.”

“백 명……?”

서달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백 명이라니.

앞서 지나온 마을에서 천무공자가 잡아온 도적의 숫자도 백 명이었다.

이 또한 우연이란 말인가?

불안함이 느껴지는 것은 착각인 것일까?

‘의심스럽군. 만약에 미리 백 명과의 싸움을 대비하려고 연습한 것이라면? 그래서 도적 떼와 일대 다수의 전투를 미리 치러 본 것이라면?’

서달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비약이었다. 생각이 너무 많아져서 온갖 상상을 다하는 모양이었다.

“알겠다. 그럼 들여보내다오. 장 공자를 만나 봐야겠다.”

“…….”

“뭐지? 문제 있나?”

병사 둘은 딱딱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절차대로 해야 합니다. 은룡패, 혹은 그에 준하는 명령서와 신분패를 보여 주십시오.”

“이런……!”

서달은 화산이 폭발하듯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꾹 눌러 참았다.

“이봐, 아까 내가 한마디 한 것에 대한 복수라면 이건 실수하는 거다. 똑같이 동창 왕 대인을 모시는 자들이 아닌가?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 비켜.”

“저희는 절차대로 할 뿐입니다. 출입을 하시려거든 절차대로 해 주십시오.”

“뭐야?”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던 서달이 품 안에서 밀서를 꺼낼지 아니면 허리춤의 검을 뽑을지 고민하던 바로 그 찰나였다.

뎅― 뎅― 뎅― 뎅―.

안에서 비상사태를 알리는 다급한 종소리가 들리고, 문 앞을 지키던 두 명의 병사들은 얼굴이 서릿발처럼 굳어졌다.

“이런!”

“출입은 금지입니다. 절차대로 문을 폐쇄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재빨리 움직여 한 명은 사람 몸통만 한 나무 지지대를 들고 오고, 다른 한 명은 대문을 닫고 걸쇠를 걸었다.

서달이 눈치를 보니 지금 폐쇄하면 다시는 못 들어갈 분위기였다.

“미안하군.”

그는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달려들어 병사 두 명의 목에 점혈을 가했다.

“억!”

“큭?”

설마 동창의 요인이 자신들을 공격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손가락을 쭉 편 사교권(蛇鮫拳) 이 타(打)에 뒷목을 격타당한 병사 두 명은 속수무책으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서달은 큰소리가 나지 않게 재빨리 무거운 지지대를 붙잡아 바닥에 살짝 내려놓았다. 걸쇠를 다시 빼고 안으로 밀자 문은 별다른 저항 없이 열렸다.

뎅— 뎅―.

아련한 종소리가 안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아직 한창 해가 빛날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안개가 짙고 음산한 분위기였다. 안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는 악령이 속삭이는 것 같은 섬뜩함이 있었다. 서달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명부(冥府)의 입구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 것이다.

예전에도 한 번 와 본 적이 있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기분 나뿐 공간이었다.

사박, 사박.

주변의 축축한 안개가 소리를 다 잡아먹고 있으니 발밑에 깔린 모래가 쓸리는 소리조차 크게 들렸다.

‘예전에는 이곳이 기갑문이라 불렸었지. 지금이야 이렇지만 그때는 꽤나 성세를 이뤘었는데…….’

서달은 그러고 보니 자신도 꽤나 늙었다고 생각하며 별로 길지도 않은 턱수염을 무심코 손으로 쓰다듬었다.

과거에 대장간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던 공간에는 이제 커다란 연무장이 있어서 언제든 무인들끼리 싸움을 붙일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와 반대쪽인 우측에는 음산한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도교(道敎)식 목탑(木塔)이 구 층이나 지어져 있었는데 그 주변으로 작은 향불을 든 도사들이 혼이 빠진 얼굴로 중얼거리면서 탑돌이를 했다.

무량수불…… 무량수불…….

번현보호…… 보리무변…….

어느 날 갑자기 동창의 일을 돕기 시작했던 모산파의 도사들이었다.

그들은 시끄럽게 울리는 경종 소리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모두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주문을 중얼거렸는데, 그들 중 몇 명은 계속해서 지전을 태우면서 허공으로 날려 보내는 행동을 반복했다.

“이보게, 벽려, 그만하게. 그러다가 큰일 나.”

“무량수불……. 무량수불…… 더…… 원혼이 너무 많아. 지전이 더 필요한데…….”

“벽려!”

서달은 혼란스러워 보이는 모산파 도사들을 애써 못 본 체하며 지나쳤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저들이 아니었다.

이곳 비처에 들어온 천무공자.

그리고 내부에서 들려온 경종 소리의 원인을 파악하는 게 급선무다.

“이런.”

가장 안쪽의 회혼비처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전에 눈을 돌리고 싶은 섬뜩한 공간을 지나쳐야만 했다.

사람이 가두어져 있는 뇌옥(牢獄)이다.

대부분 어두컴컴한 지붕 아래에 있어 보이질 않는데, 그 와중에 밖으로 반쯤 나와 있는 철창의 문이 열린 채 삐걱거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서달은 애써 못 본 척 그곳을 지나쳤다.

저곳에 갇히는 자들은 모두 죄수들이다.

각지의 감옥에서 데려온 자들이라는데, 저들을 데리고 회혼비처에서 무엇을 하는지는 높으신 분들과 모산파 도사들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철창 안의 사람들이 정말로 죄수가 맞는가?

왜 지금 철창의 안은 텅텅 빈 것처럼 보이는가?

서달은 모른다.

그리고 솔직히 알고 싶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비처(秘處)가 비처라고 불리는 것엔 이유가 있는 법이며, 비밀은 그걸 들은 사람에게 책임을 강요한다.

서달은 점점 속도를 높여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벗어났다.

그리고 마침내 도달했다.

커다란 불상 두 개가 마주 보는 사이에서 거대한 청동 향로가 천년만년 타오를 것 같은 커다란 불길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서달은 제자리에 못 박힌 듯이 멈춰 서서 조용히 숨을 골랐다.

비처의 가장 은밀한 곳, 왕 태감 같은 윗분들에게는 신수비처(神獸秘處)라 불리며, 내부에서 일하는 자들 사이에서는 죽은 자의 영혼도 도망치다가 다시 잡혀서 되돌아온다는 두려움 가득한 이름으로 불리는 곳, 회혼비처(回魂秘處)에 도착한 것이다.

“흡……!”

서달은 코를 찌르는 듯한 혈향(血香)에 소매로 얼굴을 가렸다.

거대한 향로 불이 등 뒤에서 활활 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향은커녕 피 냄새만 자욱했다.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는지 알 방법이 없다. 복도 위에 규칙적으로 매달려 있는 등불만이 그가 나아갈 길을 비춰 주고 있었다.

서달은 묵묵히 걸어 나갔다.

메말랐던 땅바닥이 흘러내린 피로 철퍽거리고, 신체의 한 부분이 없는 시신들이 하나둘씩 바닥에 널브러져 있어도 그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두꺼운 대문을 만난 건 축복이라고 할 만했다.

대문에 큼직하게 새겨져 있는 ‘비(秘)’라는 글자는 서달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이 좁고 피 냄새 가득한 공간을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

끼기기긱―.

커다란 대문은 손만 댔을 뿐인데도 미끄러지듯이 열려 방문객을 환영해 주었다.

서달은 손끝이 미친 듯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의 나이 마흔다섯.

견검삼대의 대주로서 볼꼴 못 볼꼴을 웬만큼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런 수준을 넘어서 있었다.

아비규환(阿鼻叫喚).

현세에 펼쳐진 지옥도(地獄道)였다.

“막아! 방패를 들어!”

“활을 쏴! 독은 듣지 않는다! 훈련은 잊어! 방진만 펼쳐라! 세 명씩 모여서……으아악!”

“젠장! 어서 간평만 데려와! 간평만 데리고 밖으로 빠져…… 끄아악!”

이미 절반은 죽어 없어진 흑시군이 비정상적으로 몸이 부푼 데다 살기에 휩싸여 있는 괴물들과 만나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괴물들은 너무나 기이했다.

분명히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기는 한데, 목 근처의 승모근만 부푼 자도 있고 한쪽 어깨와 팔만 굵어진 자, 심지어는 다리만 굵어져서 뒤뚱뒤뚱 뛰는 자도 있었다.

분명한 건 그들이 기괴한 모습을 한 만큼 강력하다는 점이다. 심지어 일부 무공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지(理智)를 잃은 눈으로 시뻘건 살기를 토해 내는데, 덤벼드는 모습이 마치 체술을 극도로 연마한 짐승들 같았다.

손으로 석벽을 잡아 뜯으면서 천장에 매달리고, 바닥을 내리치면 돌바닥이 힘을 못 이기고 쩍쩍 갈라졌다.

그런 괴물들이 백 명.

고작 오십 명 남은 흑시군이 상대하기엔 너무나 많은 숫자였다.

서달은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그들의 싸움을 응시했다.

흑시군은 처절했다.

쇠 방패로 막고, 화살로 눈을 쏘고, 도끼와 칼로 괴물들의 팔다리를 베어 냈다.

다행히 괴물들도 금강불괴(金剛不壞)는 아닌지 창칼에 상처 입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사람은 피부가 잘리면 고통을 느끼고 물러서는 법인데 괴물들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더더욱 사납게 달려들었다. 심지어 한 명씩 죽을 때마다 괴물들은 더욱 강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팔이 잘리면 남은 한 팔로 방패를 붙잡았고, 그사이에 다른 괴물이 뛰어들어 방패를 든 흑시군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결국 마지막 흑시군이 죽는 순간까지 괴물들은 구십 명이 쓰러졌다.

오십 대 구십.

흑시군 한 명이 쓰러지면서 두 명의 괴물도 쓰러뜨리지 못한 셈이다.

지난 세월, 팔파일방의 무림인들을 상대로 무쌍한 위력을 발휘했던 흑시군치고는 참혹하리만큼 부족한 성과였다.

하지만 어찌 흑시군을 탓할 수 있겠는가.

괴물들은 고통을 몰랐고, 사람을 상대하는 법만 훈련했던 흑시군에게는 너무나 불리한 상대였다.

그아아아아―!

괴물들 중에서도 특히 몸집이 거대해 보이는 괴물이 거칠게 울부짖었다.

남은 숫자는 열.

흑시군을 모조리 전멸시키고 살아남은 열 명의 괴물들은 다른 괴물들보다 훨씬 흉폭하고 강해 보였다.

바로 그때 나타났다.

커다란 대리석을 깎아서 만든 제단 위에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던 청년.

백색의 비단 장포를 입고, 한 자루 박도를 든 청년이 제단 아래로 성큼 뛰어내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