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권 3화
제25장 회혼비처(回魂秘處) (3)
그 순간 서달은 그동안 청년을 쫓아다니며 들었던 그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장 공자님은 천상에서 내려온 영웅이십니다!”
“새하얀 비단 장포를 입은 멋들어진 공자님이셨지요.”
“장 공자님? 헤실헤실 귀여운 얼굴로 차만 한 잔 마시고 떠났어요. 속없고 착해 보이던데?”
“무시무시한 분이었습니다.”
“은룡패를 꺼내면서 비키라고 소리치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서달은 그 순간 그동안 들었던 말들 중에 틀린 것이 하나도 없음을 깨달았다.
제단에서 뛰어내린 청년이 천무공자임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새하얀 비단 장포를 멋들어지게 입은 것도 맞고, 헤실헤실 웃는 게 잘 어울릴 것 같은 선한 인상의 미남이라는 것도 맞다.
짙고 깊은 검은색 머리카락과 연한 갈색의 눈동자를 지녔다. 키도 꽤나 큰 편이고 탄탄하게 균형 잡힌 몸은 걸치고 있는 비단 장포를 더욱 풍성하게 돋보여 주었다.
문제는 그 ‘기세.’
생긴 것만 봐선 황자(皇子)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전신에서 뿜어내는 기세와 무형기에 가득한 ‘분노’는 기품 있는 외모와 달리 사납기 그지없었다.
병사들이 무서워하는 것도 당연하다.
천상의 아들같이 차려입은 자가 제천대성처럼 제멋대로이고 천방지축의 분노를 뿜어내고 있으면 어느 누가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스릉―.
천무공자가 칼을 뽑는 소리가 괴물들을 자극했다.
괴물들은 분노했고, 또한 탐욕스러운 아귀처럼 살아 있는 자의 생기를 탐했다. 괴물들이 발을 딛을 때마다 석재 바닥이 금이 갈 것처럼 떨렸다. 한 발을 내딛을 때마다 성큼성큼 일 장 너비를 뛰어넘는다.
한때는 인간이었던 열 명의 괴물들은 앞뒤 가리지 않고 한꺼번에 천무공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천무공자의 눈빛이 깊어진 것은 그들이 손만 내밀면 닿을 것처럼 가까이 온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아아아!
다섯 괴물, 열 개의 손이 천무공자의 앞에 그물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걸 상대하는 천무공자는 놀랍도록 빨랐다.
열 개의 손이 허우적거리듯 탐욕스럽게 움직이는 동안 정확히 세 번의 도격이 있었고, 세 개의 팔이 허공을 날았다.
천무공자는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았다. 덩실덩실 가벼운 몸놀림으로 태극검의 움직임과 소림권법 같은 동작을 섞어서 쓰는데 그 둘이 기이할 정도로 조화롭다.
스걱―.
파라라락―.
천무공자는 계속해서 물러났다.
괴물들은 쫓아가고, 천무공자는 물러나는데 팔다리가 날아가는 건 괴물들뿐이다.
마치 거친 동물을 조련하는 듯했다. 청년은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동작으로 본인에게 단 한 번의 공격도 허용하지 않았다. 손가락이 날아가고, 팔목이 베였다. 광기에 찬 괴물들은 박도에 베일 때마다 늪에 빠진 것처럼 점점 약해져만 간다.
하지만 괴물들은 집요했다.
팔이 없다면 이로 물어뜯을 기세로 달려드는 괴물의 가슴에 결국 칼끝을 박아 넣는 순간, 천무공자의 얼굴이 처음으로 침중하게 일그러졌다.
푹.
심장이 뚫리는 소리는 전장의 북소리처럼 귓속으로 파고든다.
처음으로 괴물이 완전히 목숨을 잃었다.
그아아아!
괴물이 하나 죽자 남은 괴물들은 더더욱 흉포하게 소리를 질렀다.
싸움은 격화되었고, 천무공자는 다시 평정을 되찾고 빈틈없이 방어를 완비했다.
깡!
그러다가 딱 한 번, 가장 몸집이 크고 피부가 불그스름한 괴물이 손으로 칼을 쳐 내자 쇠와 쇠가 부딪치는 듯한 거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저게 바로……!’
서달은 흑시군들이 죽기 전에 반혼귀라고 외쳤던 것을 기억했다.
그들이 반혼귀라고 외쳤던 게 바로 저 붉은 피부를 지닌 괴물이다.
반혼귀는 다른 괴물들보다 훨씬 더 빨랐고, 힘도 강력했다. 육체도 비정상적으로 일부만 부푼 게 아니라 전신이 균등하게 커져 있었다. 반혼귀가 내뻗는 주먹에서 시뻘건 권기가 뻔뜩였다.
후우웅―.
파라락―.
까강! 서걱!
천무공자는 반혼귀의 공격을 흘려서 넘기면서 그사이에 주변 괴물들부터 하나씩 정리했다.
바닥에 자작하게 고여 있던 핏물이 괴물들이 쓰러질 때마다 철퍽거리면서 붉은색 액체를 주변에 흩뿌렸다.
마침내 반혼귀를 제외한 아홉의 괴물들을 쓰러뜨렸을 때 천무공자의 바지자락은 새빨갛게 물들어 버렸다.
그아아아아!
까가가강!
천무공자는 광기에 휩싸여 양손을 휘두르는 반혼귀의 공격을 부드러운 동작으로 비스듬히 흘려냈다. 동시에 그의 칼끝이 반혼귀의 명치를 베고 지나갔다.
움찔― 몸을 멈추는 반혼귀의 품 안에서, 천무공자의 칼은 커다란 반원을 그리며 반혼귀의 목을 베고 지나갔다.
휘리릭―.
천무공자는 그 후에 버들잎처럼 가벼운 몸놀림으로 곧바로 물러섰다.
처음에 서달은 천무공자의 칼이 빗나간 거라 생각했다.
도격이 얼마나 깔끔했는지 칼로 두부를 베는 듯한 소리조차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괴물은 그 뒤로도 삼 보(步)나 더 움직였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리고 세 걸음.
천무공자를 따라잡은 괴물이 양손에 강대한 권기를 두르고 휘두르려는 순간 괴물의 머리가 뒤로 넘어갔다.
주체도 대상도 잃어버린 붉은색 권기는 쓸쓸하게 허공을 후려칠 뿐이다.
사람의 손길에 뚝 떨어지는 죽순처럼 거칠게 날아가 버린 목에서 피가 솟구친 것은 그로부터 한 호흡이 흐른 뒤였다.
푸화악―.
천무공자는 들고 있던 박도를 도갑에 납도하면서 피가 뿜어지는 모습을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좁혀진 미간, 심각하게 가라앉은 눈빛에서 뿌듯함이나 자만심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고통스러워 보일 정도의 자책감과 무거운 중압감만 느껴질 뿐이다. 천무공자는 책임감을 갖고 괴물의 최후를 지켜보는 듯했다.
‘이상하군.’
서달은 그 모습에서 기이함을 느꼈다.
일세의 영웅이 괴물을 무너뜨리는 모습에 서달은 감탄을 참기 힘들었다.
하지만 동창의 창위이자 견검삼대의 대주로서 살아온 그의 차가운 머리가 계속해서 경고성을 내뱉고 있었다.
‘천무공자는 흑시군이 죽을 때는 가만히 지켜보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괴물을 보면서 책임감과 자책감을 느끼는가?’
검은 안개처럼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서달의 의구심을 날려 버린 것은 괴물의 몸에서 은은하게 흘러나온 붉은빛도 아니고, 시선을 옮겨 지그시 서달을 바라보는 천무공자도 아니었다.
제단 위.
너무나 강렬한 전투가 벌어진 탓에 이제껏 주목하지 못했던 곳에서 들려온 광소(狂笑)가 서달의 머릿속을 하얗게 날려 버렸다.
“캬하하하핫! 하하하하하핫!”
귀에 거슬리는 웃음소리는 한참 동안이나 이어졌다.
“캬핫! 카캇! 죽였구나. 결국 죽였어! 반혼귀의 혼백은 맛이 어떻던가? 그건 무예에 능한 백 명의 혼백의 집합체였다. 일반적인 혈귀들과 달리 묵직한 느낌이 들지 않던가? 배 속이 간질거리고 몸 안에서 힘이 솟구치지 않던가? 천인귀가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을. 아쉽구나. 천인귀는 사흉이 다 먹어치웠다. 다시 만들려면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어.”
서달은 입을 벌리고 굳어 버렸다.
제단 너머, 높은 천장에 단단하게 고정된 굵은 쇠사슬에 양손이 묶인 채 매달려 있는 사내가 있었다.
그는 비싼 의복을 입고 있었지만 온몸에 튀어 있는 정체 모를 자국들과 이리저리 쓸려서 넝마처럼 해진 소맷자락이 그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새치가 듬성듬성 생겨 반백이나 다름없는 머리는 산발하여 아무렇게나 헝클어졌고, 초로의 나이로 보이는 얼굴은 깨끗한 인상이었으나 기이하게도 두 눈에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광기가 가득했다.
“혈귀는 열, 반혼귀는 백. 거기에 흑시군까지……. 크큭, 지금 네가 먹은 혼백만 해도 천이 넘거늘. 아이야. 너는 이미 돌이킬 수 없다. 만인지적(萬人之敵)이 되는 그날까지, 아귀 같은 갈증이 너를 핏속으로 이끌리라.”
캇캇거리는, 귀에 거슬리는 웃음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서달은 질린 심정으로 기억을 더듬었고, 동창의 기밀문서를 뒤지다가 발견했던 이름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혈귀에 반혼귀까지 자세히 알고 있는 데다가 저 고급스러운 의복……. 그렇군. 저자가 간평인가. 신수비처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던.’
과거에 불미스러운 일에 엮여서 초야에 묻혀 살던 자를 왕진 태감이 찾아서 데려온 일을 서달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초야에 숨어 있던 간평을 찾아내고, 그를 ‘호위’해서 이곳 회혼비처로 데려온 것이 바로 견검대였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금 정신이 특이할 뿐 정상적인 문인(文人)처럼 보였는데……. 기이하군. 도대체 어떤 일을 겪었기에 저렇게 변했단 말인가.’
서달은 천무공자에게 주목했다. 간평의 변화가 극적이긴 하지만, 여전히 지금 이 일의 향방은 천무공자가 쥐고 있었다.
“만인지적이 될 때까지 핏속의 길을 걷는다라…… 재밌네요. 이 뜨거운 감정은 피를 봐야 해소가 된다는 건가?”
천무공자의 목소리는 나지막하면서도 선명했다.
서달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순수하고 맑은 목소리였다.
“그렇다, 아이야. 너는 멈출 수 없는 전장의 업에 발을 들인 셈이다. 전쟁터로 향하든, 무림으로 향하든. 어느 쪽이든 생명을 빼앗아라. 마구마구 먹어치우고, 세상을 호령할 강대한 신수(神獸)가 되는 거다!”
간평이 소리칠 때마다 철컹거리는 쇳소리가 짐승의 울음처럼 섬뜩했다.
기이한 위압감.
무공도 익히지 않은 자가 광기 하나만으로 무시무시한 기세를 뿌리고 있었다.
천무공자는 그런 간평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되물었다.
“제가 그러기가 싫다면요?”
“싫다고?”
간평은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캬하하핫! 싫다니! 정말로 어린아이 같은 말이 아닌가. 아이야. 아이야. 정신 차리거라. 네가 싫다면 이미 세상 밖으로 나간 사흉들이 네가 가진 집혼기(集魂器)를 빼앗기 위해 덤벼들 것이다. 빼앗거나 뺏기거나. 너는 이미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잔인한 고리 속에 들어온 것이다.”
“그래요?”
“그러하다!”
“궁금한 게 있어요. 그 신수라는 거, 누가 만들었죠? 아까 그 혈귀랑 반혼귀도 포함해서요.”
“누가 만들었냐고? 누가 만들었더라. 양…… 양선후, 그래. 그 늙은이가 만들었다. 집혼기도, 신수도, 이 잔인하고 무도하고 천벌 받을 짓거리도 다 그 늙은이…… 그래, 그 늙은이가 만들었어…….”
간평은 말하면 말할수록 과거의 기억과 광기에 침식되고 있었다.
“하지만 혈귀들은 내가 발견했다. 암, 그래! 그게 내 업적이야. 혈귀, 반혼귀, 천인귀! 다 내가 발견했다. 그걸 만들어서 사흉들을 완성시키는 방법도. 집혼기를 개량해서 부작용을 줄인 것도 다 내가 해낸 거다! 내 업적이라고!”
마치 하늘에 외치듯 양손을 펼친 채 간평이 미친 듯이 웃었다.
물론 하늘은 보이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투박한 돌덩이뿐이지만, 간평은 개의치 않고 하늘을 향해 물었다.
“내 업적이 어떤가! 양 노사여, 대답해 보아라! 캬하하핫! 내가 이겼다. 백택과 기린을 넘어, 내가, 이 간평이 신을 만들어 낼 것이다아아아아아!”
고래고래 소리치던 간평이 한순간,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정신을 잃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쌔근거리는 숨소리와 들썩이는 가슴만이 그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서달은 광기 어린 침묵 속에서 천무공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허리춤의 철 요대를 꽉 붙든 채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잠시 후 천무공자가 서달 쪽으로 몸을 돌렸을 때, 그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인사를 건넬 상황이 아니나 그래도 간략하게 소개하겠소. 나는 동창에서 일하는 서달이라고 하오. 그대가 천무공자라 불리는…… 장 공자가 맞소?”
서달이 간평의 이야기를 들은 탓일까?
화려하고 선한 인상 너머, 인간 이상의 무언가를 간직한 듯한 청년이 탐색하는 듯한 눈빛으로 서달을 바라보며 답했다.
“여기서 답할 내용은 아닌 것 같네요”
청년의 손가락은 바닥을 뒤덮은 진득한 핏물을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