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권 4화
제25장 회혼비처(回魂秘處) (4)
전투의 흥분도 채 가라앉지 않은 상황이다. 피와 시신이 즐비한 지옥도에서 인사를 나눌 여유가 있냐는 지적이었다.
서달은 묵묵히 고개를 저은 뒤 조심스레 말을 이어 나갔다.
“그렇기에 더더욱 인사를 나눠야만 했소. 나 서달. 황실의 공무를 수행하던 중에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오해를 받아 천무공자의 칼에 죽는 것은 싫기 때문이오.”
“내가 왜 당신을 죽일 것이라 생각하죠?”
“흑시군이 참혹하게 죽는 모습을 보았소.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황실을 오고 가며 한 번쯤은 인사를 나눴을 사람들이오. 지금도 저 시신들 속에서 미처 잠들지 못한 누군가가 두 눈을 부릅뜨고 나를 노려보지는 않을까 두렵소이다.”
서달은 공손한 듯하면서도 말속에 날카로운 칼날을 숨기고 있었다.
묵묵히 듣고 있는 청년을 향해 서달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대는 흑시군이 괴물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지 않았소? 만약 그게 그대가 황실을 싫어해서 그런 것이라면……. 나 또한 흑시군과 똑같은 처지가 될 터이니. 당연히 그대에게 인사를 하고 목숨을 구해야 하지 않겠소?”
“말속에 뼈가 있네요.”
“기분이 상했다면 미안하오. 난 그저 그대에게 내 생각을 이해시키고 싶었소. 말재주가 없어서 부드럽게 돌려 말하는 걸 잘 못한다오.”
서달은 연신 허리를 굽실거렸지만, 정작 그의 말속에는 검을 휘두르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의미들이 숨어 있었다.
황실을 싫어하냐는 위험천만한 질문.
그리고 힘이 있으면서도 일부러 그들을 죽게 내버려 둔 것에 대한 호된 질책이나 다름없다.
“말재주가 없기는 무슨.”
청년은 연한 갈색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흥미를 띄웠다.
“그런 말솜씨로 말재주가 없으면 이 세상엔 말재주 좋은 사람이 없겠네요.”
“칭찬은 감사하나 아첨에 말재주가 없는 것은 사실이오.”
“그래요?”
청년은 태연한 얼굴로 그를 보며 왼쪽 허리에 비스듬히 차고 있는 박도의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한 달 전부터 동창의 창위 하나가 나에 대해 묻고 다니며 뒤를 쫓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죠. 그게 서 창위였나 봅니다.”
“알고 있었소?”
“황실에서 사람이 나올 때가 됐다고 들었으니 예상은 했어요. 그게 지금일 줄은 몰랐지만.”
서달은 속으로 천무공자에 대한 위험 등급을 한 단계 올리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청년은 황실에서 사람이 나올 때가 됐다고 ‘들었다’고 했다.
즉, 참모가 있다는 뜻이며 그는 왕진의 일처리를 미리 예측할 정도의 지모(智謀)를 가진 유능한 자라는 뜻이다.
“서 창위의 말은 맞아요. 내 이름은 장소호. 무산학관에선 부끄럽긴 하지만 천무공자라고 불렸습니다.”
“역시……! 반갑소, 장 공자.”
“저는 반갑다는 말은 아직 못하겠네요. 서 창위는 나를 왜 쫓아왔는지 아직 이야기 하지 않았으니까요.”
“…….”
서달은 위장이 조여 오는 듯한 긴장감을 느꼈다. 천무공자가 그를 경계하고 있다는 건 말투에서부터 드러나고 있었다.
보이지는 않으나 목 밑에 칼이 겨눠진 느낌이었다.
그는 천무공자가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
혈귀니 반혼귀니, 흑시군이 상처 하나 내기도 어려워하던 그런 무시무시한 괴물들 열 명을 생채기 하나 나지 않고 쓰러뜨린다?
서달은 할 수 없다.
당연히 그런 일을 해낸 천무공자와도 싸울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아직 나를 믿지 않는구려. 장 공자, 내가 동창에서 나왔다는 걸 믿기는 하는 거요?”
“물론.”
천무공자는 그 말에는 망설이지도 않고 긍정했다.
“긴장할 때 팔꿈치를 굽히고 손끝을 모으는 동작, 발뒤꿈치를 항상 들어 올린 채 팔진(八陣)의 법칙에 따라 언제든 물러날 준비를 하는 보법. 은종보(隱縱步)에 사교권을 익힌 사람은 동창의 창위밖에 없죠. 그 점은 의심하지 않아요.”
“……!”
서달은 탄성을 내지를 뻔했다.
무공을 쓰지도 않았는데 어떤 무공을 익혔는지 한눈에 알아맞히다니, 놀랍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호사가들은 늘 객잔에서 천무공자에 대해 떠들곤 했다. 천무공자에게는 세 가지 보물이 있으니, 첫 번째는 상대가 어떠한 무공을 익혔는지 한눈에 알아보는 눈, 두 번째는 어떠한 무공이든 다 익힐 수 있는 천부의 재능이며, 세 번째는 무산학관에서 길러져 모든 무공의 상성을 꿰뚫어 보는 식견이라는 이야기다.
‘천무공자라더니, 명불허전(名不虛傳)!’
서달은 감탄을 숨기지 못한 채 포권을 취했다.
“과연 천무공자요. 장 공자에게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알겠소.”
“아첨은 못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첨이 아니요. 진심 어린 감탄일 뿐. 솔직히 말하겠소. 나는 상부에서 명령을 하나 받았소. 그 명령서에는 다섯 글자뿐이었지.”
“뭐라고 쓰여 있었죠?”
“추신은룡패(追新銀龍牌)!”
“새로운 은룡패를 쫓아라?”
“그렇소. 내가 받은 임무는 그뿐이오. 그러니 북경의 자금성에서부터 발자취를 더듬어 공자를 쫓아왔소.”
“흐음.”
천무공자는 박도에서 손을 뗄지 말지 고민하는 듯 보였다.
“그래서 명령대로 저를 쫓아왔군요. 그럼 우리가 만나 버린 지금, 이제 서 창위는 무엇을 할 겁니까? 나를 잡아갈 겁니까?”
서달은 이를 악물고 마음을 다졌다.
천무공자의 등 뒤에 있는 무형기가 넘실넘실 그의 목을 위협하는 듯 보였다.
“……솔직하게 말해도 되겠소?”
“물론.”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겠소. 장 공자께서는 황실을 싫어하시는 것이오? 흑시군이 죽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본 이유는 무엇이오?”
굳이 똑같은 질문을 다시 한 것은 그 답에 따라 자신의 답도 달라진다는 뜻이었다.
서달은 양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마음이 불안하여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흐음.”
천무공자의 표정은 미묘하게 흐트러졌다.
“그게 관료의 생각인가…….”
“뭐라고 하셨소?”
“답해 드리죠. 첫째, 황실은 싫어하지 않습니다. 둘째, 그들은 죽을 만해서 죽었습니다.”
“……!”
그 말을 하는 천무공자에게서는 오히려 왜 서달이 이해를 못하냐는 듯한 답답함이 느껴졌다.
“어째서 그들이 죽을 만한 자들이오?”
“어째서냐고요?”
천무공자는 환하게 웃었다.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 태양처럼 웃는 웃음 뒤로 무시무시한 무형기가 섬뜩하게 소용돌이쳤다.
그는 분명히 분노하고 있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서달이 기세를 잃고 움츠러들었다.
감히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재능과 무공이 송곳니를 드러낸 듯했다.
“각지에서 수천, 어쩌면 수만의 생명이 끌려왔고, 저 간평이라는 자가 그들에게 이상한 술법을 사용해 괴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인륜을 벗어난 행동이죠, 서 창위는 저를 추궁할 게 아니라 이곳 신수비처에서 일어난 일에 더 분노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흑시군은 수년간 이곳을 지키면서 대체 무엇을 했습니까?”
천무공자의 목소리는 점점 더 열기를 띄었다.
“몰랐다? 명령을 받았을 뿐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바로 옆에는 뇌옥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가축처럼 사람들을 가둬 두었죠.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흑시군은 눈을 돌렸어요. 그동안 이 미친 짓을 가만히 두고 보았으니 그들은 공범이나 다름없습니다. 오히려 제가 되묻죠. 서 창위, 내가 왜 그들을 도와야 하죠?”
“그건…….”
서달은 천무공자의 강렬한 눈빛을 감히 마주 보지 못하고 바닥으로 시선을 돌렸다.
황금색 눈을 가진 호랑이를 눈앞에 둔 기분이었다. 온몸의 피부가 강렬한 기세를 견디지 못하고 따끔거리는 통증을 전달했다.
바닥을 질퍽하게 적신 핏물 위로 천무공자가 내뿜는 기파가 파문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사람이라면……. 괴물들에게 같은 사람이 당하고 있다면……. 구하는 게 당연하지 않소?”
“둘 중에 누가 사람이었죠?”
“그게 무슨 소리요?”
“제 눈에는 오히려 괴물들이 더 안타깝던데요.”
“……!”
서달이 말문이 막힌 사이, 천무공자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창 뜨거워졌던 분노가 천천히 가라앉는 듯 보였다.
“제가 보기엔 괴물들은 이 모든 일의 피해자, 흑시군은…… 왕진 태감인지 간평인지 모르겠지만, 이 일을 계획한 자와 함께하는 공범입니다. 제가 누구를 위해 싸워야 할지는 명백해 보이네요.”
“그렇다고 해서…….”
“죄를 지었다면 벌을, 옳은 일을 했다면 칭송을.”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강력하다. 서달은 일순 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저는 또다시 같은 상황이 되어도 흑시군은 도와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업자득이죠. 쇠사슬에 비참하게 매달려 있는 저 사람처럼!”
천무공자는 몸을 반쯤 돌려 쇠사슬에 묶인 채 축 늘어져 있는 간평을 가리켰다.
서달은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천무공자는 조건 없는 협의지도를 말한다. 그게 사람이든 괴물이든. 황실이 연관되어 있든 일개 죄수가 연관되어 있든.
말은 쉽지만 실제로 똑같은 문제를 일으켰다 할지라도 천한 노비를 대할 때와 귀족을 대할 때는 그 처리를 다르게 하는 것이 상식이다.
포청천이 왜 용작두와 개작두를 나누겠느냐는 말이다.
“천무공자 그대는…… 특이하구려.”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세상이 특이한데요.”
천무공자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박도의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서달은 비로소 목덜미에서 칼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해방감을 느꼈다.
“서 창위는 명령을 따를 뿐이겠죠. 돌아가서 왕 태감에게 전하세요. 당신이 도의에 벗어나는 일을 하는 한, 내가 그를 따르는 일은 없을 거라고.”
그는 아쉬운 듯한 얼굴로 간평을 한 번 돌아봤을 뿐, 그 후엔 거침없이 걸음을 옮겨 밖으로 빠져나가 버렸다.
새하얀 비단 장포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자, 서달은 그제야 휘청― 하는 몸을 힘겹게 가눈 채 숨을 몰아쉬었다.
“괴물……!”
무림 초출의 순진한 청년?
헤실거리면서 웃고 다니는 한량?
다 틀렸다.
서달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늘이 내린 무재. 천무(天武) 하나만은 맞는 말이군…….”
막강한 무공에 흑시군의 죽음을 손놓고 지켜볼 수 있는 위험한 성정.
황실의 법도와 동창의 실세인 왕 태감조차 눈 아래로 보는 오만무도한 사고방식.
그야말로 천하를 오시(傲視)하는 그릇이다.
“도저히 통제할 방법이 생각나질 않는다. 왕 태감은 저런 자를 원하는 건가? 어쩌자고 저런 자에게 은룡패를?”
서달은 패왕의 자질이 있다면 저런 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무사히 살아남았다는 것에 감사했으나,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면 머리가 아파 왔다.
“간평, 흑시군, 혈귀, 모산파. 거기에 이 참혹한 피바다…… 왕 태감에게는 어떻게 보고한단 말이냐?”
서달은 어질어질한 이마를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회혼비처라더니, 내 혼이 빨려나가겠다.”
서달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짧은 다섯 글자의 명령서로 시작된 회혼비처(回魂秘處)로 향하는 임무.
그 끝이자 시작은 서달의 끝없는 한숨으로 마무리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