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권 5화
제26장 신흉도올(新凶檮杌) (1)
“칼이 심장을 찔렀을 때의 느낌은……. 내 생각보다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었어. 그래서 더 놀랐던 것 같아.”
다루에 앉아 먼 곳을 바라보는 소호의 손에는 찻잔이 소중하게 들려 있었다.
양손으로 찻잔을 감싼 소호가 다도(茶道)의 절차에 맞춰 찻물을 입안에 머금었다.
향긋하면서 진중한 향.
용정(龍井) 향이었다.
소호의 건너 쪽에 앉아 있던 낯빛이 유난히 흰 문사 청년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의 목숨이란 한 푼의 동전만큼의 가치도 없을 때도 있고, 천금보다 귀할 때도 있는 법이지요.”
“그래도 너무 함부로 대하면 그 업보가 나에게 돌아오겠지?”
“그렇습니다. 혈귀……라고 했죠?”
섭주해는 남들이 듣지 못하도록 목소리를 낮췄다. 시간도 아직 이르고 다루의 꼭대기 층에는 그들 말고 아무도 없었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소호도 덩달아 목소리를 낮추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백 개의 영혼이 모이면 반혼귀, 천 개의 영혼이 모이면 천인귀인 것 같아.”
“천륜과 법도를 어기는 행위입니다. 수없이 많은 기괴한 주술 중에서도 금술 중의 금술일 텐데. 모산파가 그런 짓에 가담하다니……. 왕 태감의 권세가 하늘을 찌르기는 하는군요.”
소호가 신수비처에서 겪은 일들을 전해들은 섭주해는 보이는 것 너머의 숨겨진 진실까지 알아차린 것 같았다.
“밝혀지면 온 세상의 비난이 쏟아질 게 분명한데도 손을 대는 것을 보니 결과적으로 얻을 이득이 훨씬 더 큰 게 분명합니다. 게다가 간평이란 자가 말했다던 신수(神獸)……. 백택과 기린. 그건 저도 들어 본 적이 있어요. 소호 형도 떠오르는 게 있을 테지요?”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어. 내 생각이 맞지?”
“네. 군부 출신이니 황실과 엮였을 확률이 높죠, 그리고 무엇보다 그 이름.”
은자촌의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험한 이야기를 적당히 걸러서 이야기해 주곤 했지만, 그 아이들은 영특했고 이제는 장성한 청년이 되어 일의 전후 과정을 추리할 만큼 자라났다.
“역대 황제의 수호위사였다는 백택, 그리고 소호 형의 아버님 말입니다.”
“느낌이 와. 아무래도 연관이 있는 것 같아.”
“아버님께 여쭤봐야 할 일이 생겼네요. 이쪽은 제가 알아보죠.”
“그래. 그건 주해에게 부탁하도록 할게.”
소호는 담담한 듯 보였으나 눈빛이 조금 어두워져 있었다. 십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항상 붙어 있었던 섭주해는 소호가 지금 침울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섭주해는 안쓰러운 마음으로 소호의 찻잔에 다시 한 번 찻물을 따라 주었다.
“괴물이 된 자들의 영혼을 해방시켜 준 것입니다. 마음 상해하지 마세요. 소호 형.”
“……아까도 말했듯이 그 과정에 대해서는 아무렇지도 않아서 오히려 놀라울 정도야. 그러니 괜찮아. 주해야.”
“검을 찬 자는 언제든 목숨을 잃을 각오도 해야 하는 법입니다.”
“그래. 내가 죽인 것은 괴물일 뿐……. 힘들면 솔직하게 이야기하도록 할게. 그보다 문제는 집혼기야.”
소호는 허리춤의 철 요대에 손을 가져갔다.
“이 요대 안에 넣어 둔 보석이 심장처럼 두근거리는 것을 느껴. 혈귀들의 혼백을 정말로 이 조그마한 보석이 흡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나는 그 전보다 더 강해져 있어. 그것만은 확실해.”
조용히 집혼기와 교감하며 자신의 힘을 점검하는 소호에게서는 심상치 않은 눈빛이 언뜻언뜻 드러났다가 모습을 감추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섭주해는 그런 소호의 모습을 진지한 얼굴로 응시했다.
어렸을 때부터 신기(神氣)가 너무 강했기에 신력을 가로막는 부적을 몸 안에 열 장씩 붙이고 살아야 했던 사람이 바로 섭주해다.
소호의 내면과 외면에서 소용돌이치는 혼백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을 터.
하지만 섭주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변화는 변화이되 강인하고 초월적인 변화였다.
이전까지의 소호는 그저 재능을 타고난 후기지수의 느낌이라면, 지금의 소호에게서는 아버지 장기린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간평의 말대로 나는 혈로(血路)에 몸을 던진 걸까? 일만 명의 영혼을 탐욕스럽게 요구하는 신수의 길에 들어선 건가?”
“소호 형,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
“운명에 먹히면 범재, 운명을 넘어서면 영웅이지요.”
섭주해는 소호를 아끼지만 팔불출 부모처럼 끼고 도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찻주전자를 내려놓고 따끔한 말투로, 냉철하게 조언해 주었다.
“힘의 부족을 말한 것은 소호 형이었습니다. 그 부작용도, 위험도 알고 있었지만 신수의 힘을 확인하고 얻을 수 있으면 힘을 얻고자 한 것은 형의 결정이었어요.”
“사흉의 힘은 무림 십대고수의 힘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넘어선다며? 무공 수련만으로 거기까지 오르기엔…… 시간이 부족해.”
“저는 좀 기다려도 된다고 생각하긴 하는데요.”
“안 돼. 그동안 고통받을 사람이 너무 많아. 백검회를 봐. 당장이라도 다들 달려가서 몸을 불태울 것만 같잖아. 이 이상 왕 태감과 흑시군을 가만히 둬선 안 돼.”
섭주해는 가만히 소호를 바라보다가 툭 던지듯이 하나의 이름을 내뱉었다.
“유준.”
“…….”
“그자 때문에 마음이 급해진 것이겠죠.”
“……맞아. 부정할 수 없네.”
“그럼 받아들이세요. 맞서 싸우세요. 제가 남해의 검령을 받아들일 수 있게 강해지라 말했던 건 소호 형이잖아요?”
섭주해는 소호와 똑같은 철 요대 안쪽에 매달아 둔 손바닥만 한 작은 단검을 손으로 툭툭 두드렸다.
청동 재질의 손잡이 부분이 웅웅―거리며 떨렸다.
“혼백의 속삭임? 피를 원하는 갈증? 제가 이겨 낸 일입니다. 소호 형은 분명히 해낼 수 있어요.”
섭주해의 강한 신뢰가 소호에게로 전해졌다.
소호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 내가 너무 어리광을 피웠구나?”
“열두 살 때로 돌아간 줄 알았네요.”
“하하핫! 그래? 너무했네.”
소호는 찻잔 속의 찻물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결심한 듯 숨을 차분하게 골랐다. 그는 창밖으로 보이는 거리를 가리켰다.
“밖을 좀 봐봐. 주해야. 사람들이 거의 다니질 않아.”
“그러네요. 북경 대시(大市)까지 뻗어 있는 대로가 바로 근처인데도 말이죠.”
“맞아. 게다가 여기 다루를 봐. 우리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단 한 명도 다루 위로 올라오지 않았어. 차를 마시러 올 여유조차 없는 것처럼 보여.”
“……사람들 얼굴에도 여유가 없네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
답은 간단했다.
대로를 지나다니던 사람들이 갑자기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얼굴로 양옆으로 갈라지며 쥐새끼처럼 골목 사이로 숨어 들어간 것이다.
텅 비어 버린 거리로 검은색 복장을 하고, 검은색 복면을 쓴 자들이 나타났다.
한 손엔 철 방패를 들고 허리춤에는 여러 가지 가죽 주머니를 매달고 있는 병사들이었다.
“역시.”
소호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들을 한 번 노려본 뒤 시선을 떼어냈다. 그는 품 안에서 돌돌 말려 있는 종이를 꺼내 다탁 위에서 펼쳤다.
간단명료하면서도 핵심적인 지형도(地形圖) 위로 정갈한 글씨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소호는 그 글씨들을 손가락으로 쭉 훑어 내렸다.
“나는 이걸 위군도라고 부르기로 했어.”
“……위군? 남위군의 지도?”
“응. 그 친구를 기억하려고.”
소호는 아련한 마음으로 남위군의 최후를 떠올렸다.
천려일실.
내부의 적을 외치던 남위군의 집념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왕진은 어떻게 그리 많은 증오와 원한을 받으면서도 태연히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왕 태감은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흑시군과 사흉의 패악질이 극에 이르렀다고 소문이 자자해. 그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야.”
소호는 지형도를 손으로 꾹 눌렀다.
“협(俠)!”
섭주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었다.
“직접 알아보고, 죄가 있다면 당당하게 꾸짖고 혼내 준다!”
“어디부터 가실 거죠?”
“흑시군이 사천에서부터 시작해서 북경까지 무림행을 했지?”
“예. 그랬죠. 그 덕분에 무산학관에 무공 장서가 크게 늘었죠.”
어깨를 으쓱하는 섭주해의 말투는 신랄했다.
“피로 빼앗아 온 무공을 직접 익혀 다시 피로 되갚아준다. 논리적인 이야기네요.”
“맞아. 논리적인 이야기야.”
“그럼 소호 형도 흑시군처럼 사천부터?”
“아니.”
소호는 하북 지방에서 신수비처 다음으로 북쪽에 위치한 비처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우리는 반대로 위에서부터 내려가면서 흑시군을 쓰러뜨리자. 하남을 지날 때쯤에는 결과가 나오겠지.”
“후후훗.”
섭주해는 소호의 말에 반대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 정도는 되어야 힘이 난다는 듯 열정에 눈을 빛낼 뿐이었다.
“그렇다면 일단은 대산파. 그리고 하북팽가로군요.”
“맞아. 미미는? 지금 어디에 있어?”
섭주해는 의뭉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잔에 찻물을 다시 한 번 따랐다.
“그럴 줄 알고 미리 보냈습니다.”
“미미를? 어디로?”
“대산파.”
소호는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핫, 역시 주해네. 다 예상했던 거야?”
“예상이라기보다는. 어차피 해야 할 일인 것 같아서요.”
“대단해. 속일 수가 없어.”
“하오문이 열정이 넘치더군요. 그동안 대산파랑 야조탑 때문에 북경에 진출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답니다. 저희보다 더 열심이에요.”
소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열정이 솟구쳐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나도 내 일을 해야겠네.”
“같이 출발하죠.”
성큼 발을 내딛는 소호의 뒤를 따라 섭주해도 조용히 따라나섰다.
두 사람의 발길은 하북에서 가장 유명한 객잔으로 향했다.
***
대산파(大山派)는 꽤나 오래된 역사를 지닌 뒷세계의 방파였다.
초대 두목이 역적으로 몰린 귀족 출신 걸물이라는 소문도 있었고, 명태조 주원장과 같이 활약했던 홍건적 출신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북경 대시 쪽에 있는 투견장과 투계장, 청루와 홍루를 포함해서 ‘파락호’가 필요한 업종은 대부분 대산파가 장악했다.
대산파로 흘러드는 자금은 인근의 관리들과 무림 방파로 흘러들어갔고, 위쪽으로 흘러간 돈은 또다시 다른 이권과 사업을 낳아 날이 갈수록 대산파의 몸집은 점점 커져만 갔었다.
헌데 그런 황금기를 거치던 대산파가 갑자기 위축되기 시작한 것은 왕진이 흑시군을 이끌고 하북에 입성한 순간부터였다.
이미 무림 일통을 이뤘다는 평을 들으며 온갖 소문을 낳던 왕진 태감과 그 휘하의 흑시군.
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대산파의 본파 인근에 커다란 장원을 하나 짓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대산파의 두목, 삼 대 ‘대산(大山)’은 나날이 머리가 빠진다는 게 어떤 심정인지를 직접 체험하고 있었다.
“이 일을 어찌한다.”
대산은 자신의 눈앞에 놓인 붉은색 서찰을 뚫어져라 노려보던 중 문을 두드리는 부하의 목소리를 들었다.
“두목, 방문객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