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32화 (361/686)

10권 7화

제26장 신흉도올(新凶檮杌) (3)

머릿속이 어질어질한 와중에도 대산은 철공주라는 여인의 눈빛이 참 맑다고 생각했다.

사심이 없는 눈.

말도 안 되는 힘을 뽐내고 그를 한 층 아래의 바닥에 처박은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보이지 않는 눈빛이다.

‘미치겠군.’

대산은 철공주의 어깨 너머로 이 층의 광경을 살폈다.

단검을 빼 들고 덤벼든 진광이 곰 같은 사내의 정권을 얻어맞고 뒤로 튕겨져 나갔다.

화살은 타격을 주지 못한 듯 보였다.

열 명의 호위들은 일제히 태극권을 사용해 화살을 옆으로 흘리거나 쳐 내서 제대로 몸에 격중되는 것은 단 한 발도 없었다.

휘리릭―.

쿵. 쿵.

철공주의 열 명의 호위가 아무런 상처도 없이 일 층으로 뛰어내렸다.

그는 졸지에 철공주와 호위들에게 둥그렇게 둘러싸여 버린 셈이 되어 버렸다.

물론 그 원의 밖에는 대산파의 사내들이 무기를 들고 바글바글 모여 있지만, 대산은 왠지 그들이 다 덤벼도 열한 명의 무인들을 이긴다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준비를 했는데 무산의 드높은 무공은 모든 것을 허무하게 만드는군.”

대산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철공주……. 으음, 그대의 무공은 놀랍지만, 세상이…… 힘만으로 다 될 것 같소?”

대산은 어깨와 허리에서 느껴지는 통증 때문에 중간중간 신음을 흘렸다.

“우리가 관리하는 상점들은? 관료들과의 인맥은? 휘하에 거느리는 거친 사내놈들은? 힘으로 다 따르게 할 수 있을 것 같은가?”

북경 제일. 하북 최대의 암흑가 방파의 두목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대산은 버럭 소리쳤다.

“관리? 정체도 모를 풋내기 꼬마들이? 하핫! 가당치도 않은 소리!”

결연한 그의 목소리가 건물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대산파의 사내들이 용기백배하여 각자 품 안에서 단검과 흉악한 무기들을 꺼내 들었다.

철공주를 따르는 십걸들이 주먹을 꽉 움켜쥔다.

“그렇게 생각해요?”

철공주는 대산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지 않았다.

그녀가 손을 뻗는다.

잔뜩 긴장한 대산의 얼굴 바로 옆, 튼튼한 목재 바닥 안으로 손끝을 꽂아 넣었다.

“힘만으로는 지배할 수 없다? 그건 아직 충분한 힘을 못 봤기 때문이 아닐까요?”

콱!

“……!”

경악하는 대산은 아랑곳하지 않고, 철공주는 한 손에는 대산의 멱살을 쥔 채, 다른 한 손으로는 건물 ‘바닥’을 손에 쥐고 들어 올렸다.

까드드득―.

쿠구궁―.

투견장과 투계장 출신 낭인들에게 그것은 그야말로 천재지변 같은 일이었다.

“우어어엇?”

“이게 뭐야!”

“지진이다! 지진이 일어났다!”

열 명의 호위들.

철공주를 호위하는 십걸들에게 시야가 가로막힌 낭인들이 보기엔 갑자기 건물 바닥이 울렁거리면서 진동을 만드는 걸로밖에 안 보였다.

발끝은 물론이고, 건물 전체를 뒤흔드는 강렬한 힘은 진짜였다.

목재 바닥이 삐걱거리는 비명을 지르면서 모서리에서 뜯겨져 나왔다.

바닥은 흔들거리고 건물 전체가 기우는 듯했다.

대산파를 상징하는 장소이기에, 그 이름부터 ‘대산루(大山樓)’인 곳에서 대산파의 낭인들은 부모를 잃은 어린아이처럼 얼어붙었다.

“흐음, 꽤 무겁네.”

철공주는 매끈하고 하얀 미간을 살짝 좁히더니, 대산의 멱살을 쥐고 있던 손을 놓고 양손으로 나무 바닥을 붙잡았다.

콰직!

비단 당혜를 신은 그녀의 양발이 나무 바닥을 짓뭉개면서 주변에 균열을 만들어 냈다.

안정적으로 굽힌 양다리와 허벅지, 그리고 꼿꼿이 세운 허리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흘렀다.

“잠깐, 잠깐!”

대산이 허둥지둥 말려 보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건물 전체가 들썩이고 있었다.

대들보가 흔들리면서 천장에서 그동안 쌓였던 먼지와 나무 조각들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알겠소! 알겠소! 알았으니, 일단 말로 합시다! 같이 의견을 조율해 보자는 말이오!”

철공주는 바닥을 반쯤 들어 올린 채로 얼굴만 돌려 말했다.

“나는 모두를 지배할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는 대산파가 아니잖아요?”

“그 말은……?”

“난 당신만 관리하면 되는 거죠.”

우두두둑―.

“우와아앗!”

“건물이 무너진다!”

주변을 둘러싼 사내들 중에 건물 밖으로 도주하는 자가 생겨났다.

한 명이 먼저 빠져나가기 시작하니, 그 뒤에는 제방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사람들이 우르르 밖으로 쏟아져 나갔다.

남은 것은 대산과 철공주, 그리고 철공주를 따르는 십걸뿐이다.

대산은 그 순간, 철공주와 자신의 가장 큰 차이를 느꼈다. 십걸 중에는 단 한 명도 지금의 상황에 두려움을 느끼는 자가 없었다.

반대로 그에게는 누가 남아 있는가?

이런 상황에서도 두목님을 지키겠다고 달려오는 놈은 왜 한 놈도 없는 건가?

“얍!”

철공주의 기합성은 의외로 귀여웠지만, 그녀가 들어 올린 바닥은 전혀 귀엽지 않았다.

바닥의 절반이나 다름없는 목재를 그녀는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쿵.

대들보가 부러지고.

끼이이익―.

쿠우우우웅!

거대한 용이 울음을 토해 내듯, 어마어마한 충격과 함께 대산루가 무너져 내렸다.

“우와아아악!”

시야가 확 어두워지면서 사방으로 온갖 것들이 다 떨어져 내리자 대산은 잔뜩 공포에 질려 버렸다. 그는 체면도 잊고 온몸을 비틀면서 비명을 지르다가 슬며시 실눈을 떴다.

“아……!”

그곳에 있었다.

목재 바닥을 우산처럼 들어 올려 무너지는 건물 파편으로부터 보호해 주고 있는 여신(女神)이다.

‘졌다.’

대산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대산파와 철공주의 대화는 그 후에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너무나 일방적인 폭력 이후에 진행된 일이긴 하지만, 대산파는 그런 방식에 익숙했다.

심지어 철공주는 건물을 무너뜨린 값이라면서 은자가 들어 있는 주머니를 건네기까지 했다.

“할…… 아니, 이쪽 일을 잘 아는 분께서 준 돈이니 충분할 거예요.”

철공주는 그런 순진해 빠진 소리를 하면서 주머니를 건넸다. 즉, 본인은 돈이나 재화(財貨)에 밝지 않다는 걸 시인한 거나 다름없는 소리다.

한데 대산은 주머니 안에 들어 있는 돈의 액수를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은자 백 냥.

물론 적은 돈은 아니다.

은자 한 개가 동전으로 이천 문이고, 쌀로는 두석 이상 된다.

은자 한 냥이면 평범한 농민 가족이 한 달간 넉넉하게 먹고살 수 있는 금액이란 소리다.

물론 대산파의 본거지라는 이름값은 전혀 고려하지 않아야겠지만, 그래도 은자 백 냥이면 대산루만 한 건물 하나를 짓기에 딱 맞춘 듯 적당한 돈이다.

‘우연일까? 아닐 테지. 이 세상에 우연은 없으니.’

철공주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은자 백 냥이라는 돈은 뒷세계에서 건물 하나를 잃었을 때 보통 보상으로 주는 금액이다.

대산은 과거에 있었던 일이 자연스레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예전에 하오문의 혈수라라는 사람이 대산파의 건물을 하나 무너뜨렸을 때 지불했던 금액도 은자 백 냥이었던 것이다.

금액이 똑같다는 것은 우연이 아닐 터.

‘누구냐, 철공주한테 조언을 해 주는 자가? 분명히 이쪽 업계 사람이 있나 보군.’

대산은 순순히 수긍하며 받았다.

사실 보상금은 명목상이나마 소액만 주어도 감지덕지할 텐데, 이렇게 정확한 금액을 주면 불만이 있을 터가 없다.

“잘 받았소. 대산파는 오늘의 일을 잊을 것이오. 대산루가 무너진 것은 건물이 낡아 새로 짓기 위해서라고 대외적으로 알려질 것이오.”

“좋아요.”

첫 만남과는 달리 따뜻한 차를 한 잔 사이에 두고 나누는 대화는 서로에게 호의적이었다.

“철공주, 그럼 대산파의 두목인 나, 대산을 통해 무엇을 이루고자 하시오?”

찻잔을 든 철공주는, 마치 다루(茶樓)에서 일하는 사람처럼 완벽한 다례(茶禮)를 선보였다.

팽자천수(烹者泉水: 찻물 끓이기)와 현호고충(懸壺高沖: 차에 물을 부어 우리기)의 동작이 완벽했다.

대산이 그 모습을 넋을 잃고 보는 사이, 철공주는 찻물을 입안에 한 입 머금고는 만족스럽게 웃음을 지었다. 차가 잘 우러난 모양이었다.

“우리가 원하는 건 단 하나예요. 그건 대산파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죠.”

“그게 무엇이오?”

“흑저요새(黑猪要塞).”

“……!”

대산은 찻잔을 떨어뜨릴 뻔한 것을 겨우 붙잡았다.

“거기를…… 어쩌려는 것이오?”

“없앨 거예요.”

대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혼란이 구름처럼 머릿속을 뒤덮었다. 이성이라는 땅 위에서 찬성과 반대가 서로 검을 들고 싸우는 기분이었다.

뒤에 서 있던 철공주의 십걸들이 일제히 쳐다봤지만 딱히 그를 제지하거나 위협하지는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대산의 실력으로는 철공주에게 위해를 끼칠 수 없다.

“진광.”

“예. 두목.”

“주변의 문을 다 닫아라. 근처에 아무도 못 오게 해.”

대산은 인근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두 번이나 확인한 뒤에야 다시 자리에 앉았다.

“흑저요새. 거기에는 괴물이 있소. 알고는 있소, 철공주?”

“들었어요. 얼굴이 검고, 왜인(倭人)의 투구를 쓴 자가 한 손으로 청룡언월도를 휘두른다죠?”

“그 정도가 아니오. 여기서만 하는 말이지만, 우리는 그가 도검불침(刀劍不侵)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소.”

“도검불침?”

처음으로 철공주가 흥미를 드러냈다.

“칼이 안 통한다고요? 금강불괴는 전설에 불과하지 않던가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소. 그를 멀리서나마 직접 보기 전까지는.”

대산은 심복인 진광 말고는 본 적이 없는 표정을 지었다.

공포와 절망에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철공주가 이미 알고 있듯…… 지금 대산파는 위기요. 하북에 지은 흑저요새를 중심으로 흑시군의 일부가 세를 불려 나가고 있소. 군력(軍力), 금력(金力), 권력(權力)……. 어느 쪽이든 우리보다 나은 자들이오. 기루와 낭인방을 짓고 우리보다 싼 가격에 당당하게 장사를 하더군. 그런 건 국법을 피해서 몰래하기에 비싼 건데……. 그들은 왕 태감의 허가를 받고 장사를 하니. 이건 상대가 될 수가 없었소.”

장사를 하기 위해 드는 돈이 있다.

관료들에게 주는 돈과, 인근 무림 문파에 ‘기부’하듯 주는 돈을 생각하면 도저히 이 이상 가격을 싸게 내릴 수가 없는 법이다.

하지만 흑시군 쪽은 그렇지가 않다. 애초에 불리한 판이었다.

대산은 땅이 꺼질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게다가 도박장은 거친 사내들로 습격해서 힘으로 빼앗으려 하고 있소. 겨우겨우 막고 있지만……. 솔직히 말하겠소. 한계에 도달했소. 결국 우리도 방법이 없으니…….”

머뭇거리는 대산을 지그시 바라보던 철공주가 툭 던지듯이 내뱉었다.

“살수를 보냈군요?”

“……그렇소.”

“어떻게 됐죠? 아니다. 답은 나와 있으니. 그래서 얼마나 실패했죠?”

“여덟.”

대산은 뼈아픈 심정으로 대답했다.

“세 번의 암살 시도가 있었고, 야조탑의 특급 살수 여덟이 모조리 죽었소.”

“…….”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시오? 철공주라면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원래 야조탑은 장담했었소. 그 정도 인원이면 구파의 장문인도 죽일 수 있을 거라고.”

대산은 찻잔 속에 가라앉아 있는 찻잎을 바라보았다.

물 위로 떠오르지 못하는 모습이 자기 자신 같았다.

“나는 보았소. 특급 살수가 내지른 검이 그 괴물의 피부에 박혔음에도, 피부를 뚫지 못하고 부러져 버리는 모습을. 그뿐인가? 수십 개의 비수가 몸에 박혀도 어깨를 한 번 털어 버리니 곧바로 떨어지더이다.”

철공주는 묵묵히 찻물을 한 모금 더 마신 뒤 물었다.

“그자의 이름이 뭐죠?”

“흑저.”

대산은 품 안에서 붉은색 서찰을 꺼내면서 말했다.

“본래의 이름은 왕진을 따르는 사흉의 일원, 도올이라고 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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