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권 8화
제26장 신흉도올(新凶檮杌) (4)
북경에서 북경대로를 통해 북쪽으로 쭉 올라가면 내장성(內長城)을 지키는 거용관이 나오고, 회래, 토목보, 선화를 거쳐 그 유명한 외장성(外長城)의 관문이자, 북로전쟁의 교통로였던 장가구가 나타난다.
헌데 북경에서 서쪽으로 향해도 내장성을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 그게 바로 울주 쪽의 자형관을 넘는 방법이다.
소호는 섭주해와 함께 자형관으로 가기 전, 북경의 남대문이라고 할 수 있는 보정부(保定府)인근 객잔으로 들어갔다.
보정객잔이라는 이름이었다.
평범한 삼 층 전각에 허름해 보이는 외관만큼이나 오래된 객잔으로 보였다.
“귀하신 공자님들. 무엇을 드릴까요……?”
당장 내일이라도 쓰러져서 못 일어날 것 같은 늙은 객주가 두 사람을 맞이했다.
깨끗하긴 하지만 소맷자락과 무릎이 다 해진 옷이 객잔의 성세(盛世)를 보여 주고 있었다.
“어…… 일단 차를 한 잔 마시고 싶은데요.”
“예, 예. 내드려야죠. 그런데 지금 저희 가게에는 철관음밖에 없는데 괜찮으신지요?”
“철관음이 있어요?”
소호는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다.
철관음은 광동, 복건 이남에서 주로 재배되는 차였다.
북경 쪽에 있어도 이상할 건 없지만, 보통 북쪽은 용정, 벽라춘, 옥로 같은 녹차를 즐겨 마신다.
이런 다 허물어져 가는 객잔에서 남방의 차가 있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닐 터였다.
“녹차 종류는 세금으로 다 빼앗겨서…… 아이고, 제가 실언을. 귀하신 공자님들이시니 남방의 철관음도 입맛에 맞으시겠지요?”
차를 한 잔이라도 더 팔고 싶은 객주의 간절함이 눈에 보였다.
소호는 섭주해의 동의를 확인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걸로 마실게요.”
“예, 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위층에 앉아도 되죠?”
“물론입죠. 편하신 데 앉으세요, 공자님들.”
소호는 섭주해와 함께 가장 높은 삼 층의 다탁에 마주 앉았다.
창밖으로 펼쳐진 산세가 꽤나 절경이었다.
그리 높거나 낮지도 않으면서 길게 뻗은 산세와 그 위로 펼쳐진 푸른 하늘이 가슴을 탁 트이게 만들어 준다.
“꽤나 좋은 풍경이다. 어때? 주해야.”
“좋네요.”
철관음을 가지고 올라온 객주는 찻물을 우리는 동안 옆에서 잠시 말동무가 되어 주었다.
찻값에 몇 개의 동전을 얹어 주면서 그의 처지를 위로해 주니, 객주는 마치 봇물이 터지듯 자신의 신세한탄을 쏟아냈다.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지요. 북경이라고 하면 높으신 관리분들이 모여 사는 곳이고, 보정부라고 하면 그런 북경에 무관(武官)으로 갈 사람들이 모여 사는 유서 깊은 마을이 아니겠습니까?”
“보정부의 깨끗한 무예는 명성이 높죠. 그런데요? 요즘은 달라졌습니까?”
“달라졌지요. 천하가 뒤집힌 것처럼 크게 달라졌지요. 요즘은 무관이 되기 위해 아무도 보정부로 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객주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소호는 호기심에 눈빛이 반짝 빛났다.
“자, 자. 객주님도 차나 한잔하면서 이야기해 보세요. 저희 같은 외지 사람이 아니면 누가 말을 들어주겠어요?”
“아이고, 외모만 멋지신 게 아니라 이렇게 마음까지 자비로우시다니. 복을 받으실 겁니다, 공자님들.”
객주는 차 한 잔을 넙죽 받아 마시면서 최근 보정부의 근황을 털어놓았다.
“보정부의 바로 아랫마을에 흑저요새라는 것이 들어왔지요. 검은 돼지 한 마리가 엎드려 있는 것처럼 시커멓게 햇빛이 닿지 않는 곳이라는 뜻에서 흑저라고 불리던 곳인데, 거기에 처음에는 목책을 쌓는가 싶더니, 이젠 돌담까지 올려서 성벽 같은 걸 만들어 버린 겁니다.”
객주는 의외로 말재주가 꽤나 있는 사람이었다.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마치 자기가 직접 보고 온 것 같은 생생한 현장감을 살렸다.
“그때부터 희한한 소문이 슬슬 흘러나왔지요. 흑저요새에는 흑시군이 주둔하고 있다. 거기에만 가면 황실의 무관은 따 놓은 당상이다, 라고…….”
보정객잔의 객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실이었지요. 그 자체가 틀린 말은 아니었어요. 실제로 흑저요새를 찾아간 젊은이들이 흑시군이 되거나, 황실의 새로운 무관이 되어 나타나곤 했으니까요.”
“그럼 좋은 것 아닌가요?”
“좋았지요. 그놈들이 갑자기 주변에 세금을 걷으러 다니기 전까지는.”
“세금을 걷어……?”
이해할 수 없는 소리에 소호와 섭주해는 둘 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세금은 각성의 성주들이나 관료들이 걷는 것 아닌가요?”
“그러니까 이런 말이지요. 흑시군은 흑저요새를 운영할 운영비를 ‘자기가 알아서’ 세금으로 충당하게 되었지요.”
객잔 주인의 비판적인 목소리에 두 청년은 잠이 확 깨는 것을 느꼈다.
“그런 게 가능한 일입니까?”
“가능하지요. 흑시군이 하는 일인데요. 하북의 도지휘사든 성주든, 아무도 흑시군은 건드리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관(官)의 세금을 안 걷는 건 또 아니라며, 객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세금을 두 배로 내는 셈입니다. 북경을 제외한 하북의 각 지역이 난리가 났지만……. 어디 높으신 분이 보기에 저희가 관심을 줄 만한 일이나 되던가요.”
늙은 객주는 그저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을 뿐이라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소호가 권하는 차를 세 잔이나 마실 만큼 많은 대화를 나눈 뒤에 감사해하며 내려갔다.
“상황이 생각보다 더 심각하네요.”
다시 둘만 남게 되었을 때, 섭주해는 조용히 결론을 내렸다.
“흑시군을 관리할 수 있는 건 관아뿐인데……. 그걸 관에서도 건드리기 껄끄러워하다니. 그야말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이 아닙니까?”
“그러네.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해.”
소호는 가슴 앞에서 팔짱을 낀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객잔 너머, 서북방으로 이어진 길목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저 길 너머에 있다.
하북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흑저요새가.
“소호 형,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지금 요새를 먼저 친다면 우리의 계획을 꽤나 바꿔야 해요.”
“……그렇지?”
“흑저요새는 단기필마로 쳐들어갈 곳이 아닙니다. 사해 무림을 떨쳐 울린 흑시군들의 요람 같은 곳인 데다, 거기엔…… 사흉이 한 명 있어요.”
“으음…….”
소호는 고민했다.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
알고 있다.
그런데도 현실에 고통받는 민중들을 보면 마음이 아픈 것을 어찌하겠는가.
소호는 지그시 눈을 감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다시 한 번의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아무래도 무너뜨려야겠어.”
“그럴 줄 알았어요.”
섭주해는 놀랍지도 않다는 듯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품 안에서 손바닥만 한 종이를 꺼내 소호의 앞에 펼쳤다.
“하오문의 정보를 토대로 작성해 본 흑저요새의 전력입니다.”
“역시 주해야. 미리 준비해 뒀구나?”
“소호 형의 행동은 늘 계획보다 앞서 나가니까요.”
“하핫, 미안하네.”
소호는 빙긋 웃으며 종이를 읽어 보았다.
“사흉 중 도올, 흑시군 이백, 예비 흑시군 일천, 일꾼이 오백. 기마가 오십, 노(弩)가 열. 와아―, 뭐야 이거, 이 정도면 여긴 군사 거점 아니야?”
소호의 질문에 섭주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군사 거점이나 다름없죠.”
“이런 위험천만한 걸 도지휘사들이 그냥 둬?”
“흑시군이니까요.”
당연하다는 듯한 섭주해의 말 안에 신랄한 비판이 담겨 있었다.
소호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일단 흑저요새를 무너뜨리겠다고 마음먹었으니 이제는 방법을 생각해야 할 때였다.
“으음, 쉽지는 않겠네. 일단 전면으로 들어가 볼까?”
“은룡패를 내세워서요?”
“응.”
“그것도 좋겠죠. 정찰은 중요하니. 하지만 그렇게 들어가서 어떻게 하려고요?”
“만나 보는 거지.”
“누구를요? 사흉을?”
“응.”
소호가 눈을 빛내며 머리를 굴렸다.
“지난번에 인상착의를 들어 보니 유준은 아냐.”
“네. 키가 구 척에 달한다든가, 한 손으로 청룡언월도를 휘두른다든가, 유준의 특징은 아니죠.”
“전에 무산제전에서 봤던 그 남자도 아냐. 그는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데다 한빙진기를 쓰니까. 그럼 누굴까? 궁금하지 않아? 새로운 사흉이잖아.”
“호기심만으로 만나 보기에는 위험부담이 커요. 흑저요새의 분위기나 그 자의 성정을 들어 보니 다짜고짜 죽이려드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어요.”
“그럼? 병력을 더 모아?”
“예. 그것도 필요하죠. 하지만…….”
섭주해는 골똘히 생각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예로부터 최고의 병법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이라고 했지요.”
“책략을 쓰는 거야?”
“예.”
섭주해는 부드럽게 웃으며 소호에게 건네주었던 종이를 다시 받아 품 안에 넣었다.
“저만 믿고 열흘만 기다려 주세요. 마지막에는 소호 형의 무력이 필요할 거예요.”
***
사흘간 사라졌던 섭주해는 불쑥 돌아와 소호에게 도움을 청했다. 흑시군의 복장을 하고 누군가를 공격해서 쓰러뜨려 달라는 이야기였다. 어디서 구했는지 꽤나 몸이 날랜 낭인을 열 명이나 데리고 나타났다. 소호는 당연히 허락하고 몸소 나섰다.
일은 쉬웠고, 어렵지 않게 성공했다.
흑시군의 무공을 본 따서 방패 위주의 무공을 사용해 달라는 부탁은 소호에게 있어서는 땅 짚고 헤엄치는 것처럼 쉬운 일이었다.
둥그런 보름달이 산 너머로 넘어가는 야밤에, 보정부 인근의 기루 뒤에서 그 일은 벌어졌다.
소호를 따라온 낭인들이 기루를 찾아온 사내들에게 시비를 걸었고, 그들은 치열한 싸움 끝에 상대방을 흠씬 두들겨 패 준 뒤 당당하게 돌아갔다. 몸을 숨기기 전에 흑저요새 쪽으로 향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기이하게도 소호가 그 일을 해 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북의 분위기가 뒤숭숭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흑저요새도 마찬가지였다.
요새 안팎으로 횃불이 꺼지는 일이 없었다. 그들은 상처 입은 짐승처럼 모든 것을 경계하면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문제는 팔 일째 되는 날 일어났다.
누가 봐도 꽤나 높은 관직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젊은 사내가 삼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흑저요새 앞으로 진군한 것이다.
그는 흑저요새의 책임자인 도올과 짧은 대화를 나눴고, 결국 격노하여 흑저요새를 쓸어버리라고 명령을 내렸다.
싸움은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
젊은 지휘관은 숫자의 차이가 크니 싸움이 일방적으로 전개될 거라 생각했던 모양이지만, 흑저라는 괴물 같은 무장과 그의 밑에 있는 흑시군은 생각보다 더 잘 단련된 정예였다.
마침내 해가 지고, 흑저요새 인근은 시산혈해의 진풍경이 펼쳐졌다.
그리고 요새 안을 뛰쳐나온 도올의 손에 지휘관의 목이 붙잡혀 버렸다.
“끄윽, 죽여라……!”
도올은 그 말을 듣고 망설이지도 않았다.
삼천기병의 지휘관이었던 사내를 지체 없이 목을 꺾어 죽여 버렸던 것이다.
왜구들의 장수가 쓰는 초승달 모양의 뿔이 달린 커다란 철 투구와 그 앞을 가린 검은색 천 사이로 작고 둥그런 노란색 눈빛이 흘러나왔다.
소호는 그 모습을 보며 전율했다.
도올은 확실히 유준이 아니었고, 무산제전 때 봤던 궁기도 아니었다.
새로운 인물이 가진 막강한 무공은 그야말로 괴물이라는 말이 잘 어울린다.
‘이길 수 있을까?’
소호는 차분한 얼굴로 필승의 의지를 다져나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