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34화 (363/686)

10권 9화

제26장 신흉도올(新凶檮杌) (5)

“때로는 말 몇 마디가 만 명의 병사를 능가하지요.”

섭주해는 지난번에 소호에게 붙여 주었던 열 명의 낭인들을 이용해 한시도 쉬지 않고 흑저요새와 좌도독 휘하의 병사들 사이에 헛소문을 퍼뜨렸다고 했다.

“자네 그거 들었나? 흑저요새에 갇힌 놈들이 명제국의 진정한 군인은 흑시군뿐이라고 떠들었다더군. 무림인들과 싸워 본 적도 없는 자들이 무슨 나라를 지키냐고 떠드는 모양이야.”

그들은 흑저요새 쪽 사람들에게는 또 다르게 말했다.

“절충교위 밑의 병사들은 흑시군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더군. 환관을 따르는 놈들답게 재수 없게 굴고 늘 잘난 척한다면서, 다음에 만나면 주먹으로 가르침을 좀 내리겠다던데?”

의혹은 의혹을 낳고, 불신은 불신을 낳았다.

“환관이나 따르는 고자 새끼들!”

“무공의 무자도 모르는 나약한 놈들!”

며칠 지나기도 전에, 흑저요새의 흑시군과 도지휘사의 군병들은 길에서 마주치기만 해도 으르렁거리면서 싸우는 들개처럼 굴었다.

섭주해가 소호에게 공격을 부탁한 건 바로 그때쯤이었다.

“소호 형이 공격한 건 좌도독이 아낀다고 소문난 절충교위(折衝校尉)와 그 휘하의 부관들이었어요.”

“그래서 싸움이 났구나?”

“예. 그 덕분에 지금 흑저요새는 타격을 받았죠. 원래 어느 한쪽이 죽는 상황까지는 예상 못했습니다만……. 생각보다 황실 내부에서도 알력이 큰 것 같네요.”

소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절충교위 휘하의 병사들이 흑시군을 공격하는 모습을 직접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잘 훈련된 정예 기병들이었다.

정식으로 전장에 배치되었다면 많은 무훈을 세웠을 인재들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들이 패배하고 대장인 절충교위가 당한 것은 단지 숫자의 열세조차 뒤집어 버리는 사흉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그런데 삼천 기병이 죽거나 다치고 지휘관이던 절충교위가 죽었어. 그래도 되는 건가? 명 황실은 정식 무관과 삼천 기병이 싸우다 죽어도 관심이 없을 만큼 허술한 곳이야?”

“그럴 리가 없죠.”

섭주해는 단호하게 답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차분하게 앉은 그에게서 냉혹한 책략가의 분위기가 흘러나왔다.

“소호 형은 우리가 적왕을 잡으려 했을 때를 기억하죠?”

“기억하지. 그때 엄청 재밌었는데. 누가 더 적왕의 등에 오래 타고 있나 내기하고 그랬었잖아?”

“그와 비슷합니다. 커다란 짐승을 잡으려면 덫을 놓고, 다리를 절게 만들고, 화살을 쏴서 움직일 수 없게 만든 다음 목숨을 거두는 법입니다.”

“커다란 짐승…….”

“사흉의 짐승은 이제 덫을 밟았습니다. 소호 형은 준비하세요. 말씀드렸듯이 최후에는…… 형의 무력이 필요해질 거예요.”

***

대명제국 좌도독(左都督) 석경(石璟)은 선황인 선덕제의 장녀 순덕공주(順德公主)의 부마였다.

대륙 제일의 부(富)를 지닌 석가장의 직계 출신인 데다 부인이 선황의 장녀다. 거기에 군권의 최상위 직급인 도독 중의 한 명이기까지 하니, 황족을 제외한다면 이 땅에서 가장 고귀한 피가 흐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석경은 이제 겨우 불혹에 가까워지는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게 미간에 주름이 잔뜩 잡혀 있었다.

이른 시각 급히 날아온 서찰은 평온했던 그의 아침을 거세게 뒤흔들어 놓았다.

그는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은 서찰을 내려놓은 뒤 분통을 참지 못하고 양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감히!”

석경은 무예에 능한 편은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사람을 압도하는 듯한 분위기가 있었다.

그는 은은한 향기가 나는 자단목 탁자 위에서 두터운 옥으로 만들어진 손바닥만 한 군령(軍令)을 꺼내 들었다.

손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군령을 꽉 붙잡은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걸 들고 군무(軍務)를 보는 집무실에 내던지기만 하면, 만 단위의 군사들이 일제히 그 요새를 무너뜨리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병량이 움직이고, 군사가 물밀 듯이 밀어닥쳐 하북 땅이 요동칠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사건이 일어난 곳은 하북.

황제의 거처인 북경의 근처다.

황제의 재가도 없이 북경 인근에서 만 단위의 군사를 움직이다가는 역모죄를 뒤집어쓰기 딱 좋은 일이다.

“왕진. 왕진……! 황제 폐하를 등에 업은 환관이여. 네가 결국 일을 내는구나.”

석경 도독은 뒷짐을 진 채 탁자 앞의 짧은 거리를 왕복했다.

고민에 빠졌을 때 그가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이었다.

그는 얼마 전에도 직접 만나 함께 술잔을 기울였던 절충교위 설환을 떠올렸다.

그는 무예를 좋아해 건장했고, 젊은 나이답게 무모하면서도 열정이 넘쳤으며, 이 나라를 지켜내겠다는 충심으로 가득 찬 사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석경이라는 사람을 진심으로 따르고 있었다.

“설환아. 내 너를 크게 쓸 마음이 있었건만, 어쩌자고 이리 허망하게 간단 말이냐.”

절충교위라는 자리를 준 것도 애초에 그를 키우기 위해서였다.

무과에 합격한 인재들을 첫 번째로 맡아서 교육시키고 훈련시키는 자리가 절충교위 아니던가.

스쳐 지나가는 젊은 인재들과 교류를 나누고, 훗날의 기반을 닦기에는 그만한 자리도 없는 것이다.

생각할수록 안타까운 마음이 커져만 갔다.

석경은 군령을 손에서 놓지 못한 채 입술을 앙다물었다.

“실리인가, 명예인가.”

석경은 스스로에게 되물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결심을 내린 그가 한 걸음을 내딛으려는 찰나였다.

“좌도독! 황실에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황실에서?”

석경은 눈을 가늘게 떴다. 시기가 너무 공교로웠다.

“누가 보냈느냐?”

“왕진 태감이 보냈다고 합니다. 사례감의 환관 한 명이 직접 찾아왔습니다!”

“지금 당장 만나 보겠다.”

석경은 벽면에 걸려 있던 장군검을 한 손에 들고 성큼성큼 움직였다.

도독부 안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석경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서둘러 자리를 피해 주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듯 난폭한 분위기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좌도독을 뵈옵니다.”

황실의 관복을 차려 입은 환관은 잔뜩 겁에 질려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석경은 대꾸도 하지 않고 곧장 그의 앞에 털썩 앉았다.

방석과 서탁은 하인들이 서둘러 그의 곁에 가져다주었다.

“어디 한번 말해 봐라, 환관. 왕 태감이 뭐라고 하던가.”

석경의 두 눈에서 불이 뿜어지는 듯했다.

환관은 감히 그의 두 눈을 직접 바라보지 못하고 땅만 보며 우물쭈물했다.

“그것이…….”

“나는 지금 인내심이 없다. 당장 말하는 게 좋을 것이다.”

철컥.

석경은 한쪽 무릎을 세우면서 장군검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와, 왕 태감께서…… 좌도독께 부하의 실책을 사과드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왕 태감이 직접 쓴 서찰이며, 뒤에 있는 것은 사죄의 뜻을 담은 선물이옵니다!”

환관은 마치 황제를 배알하듯 깊이 고개를 숙인 채 양손으로 서찰을 내밀었다.

석경은 벌떡 일어나서 그의 서찰을 받아 펼쳤다.

“수하의 실책을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석경은 비웃었다.

말뿐인 사과 따위 누가 원했던가.

미친개를 풀어놔서 사고가 났다면 개 주인이 책임지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던가.

석경은 성큼성큼 다가가 왕진이 보냈다는 선물 가마의 뚜껑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그 안에는 용봉으로 문양을 넣은 패물 상자와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금화들이 꽤나 잔뜩 들어 있었다.

대륙 제일의 부를 지녔다는 석가장의 직계인 그가 봐도 ‘많은 돈’이 들어 있는 것이다.

‘이것 봐라?’

순간, 석경의 마음속에서 분노보다 호기심이 커졌다.

수하의 실수를 책임지는 자세는 옳다.

감히 군부의 무관과 병사들을 죽이고 다치게 만들었으니 내란을 꾸민다는 소릴 들어도 할 말이 없을 터다.

문제는 그런 게 포함된 값이라고 하더라도 너무 많다.

당금 황실을 좌지우지하는 자의 그릇을 보여 주려는 것일까?

선물 가마 안에 있는 보물들만 하더라도 만 명의 병사는 길러 낼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이었다.

“그런가…….”

석경은 곰곰이 생각을 거듭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서탁으로 다가가 누가 보더라도 명필이라며 감탄할 만한 글씨로 답례문을 써서 사례감의 환관에게 건네주었다.

“왕 태감께는 잘 받았다고, 이번 일은 유감이나 왕 태감의 성의를 보아 최대한 올바르게 처리하겠다고 전해 주게.”

“좌도독의 말씀을 한 자도 틀림없이 전하겠나이다!”

환관은 한참이나 절을 한 뒤에야 죽다 살아난 듯한 얼굴로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으음…….”

석경이 모든 일이 끝났음에도 제자리에 한참 동안이나 앉아 있으니, 종사(從事)인 석지관이 의아한 듯 다가와서 물었다.

“좌도독, 무엇을 그리 고민하십니까?”

“동생아. 너는 남들에게 안 들켰으면 하는 보물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석지관.

공적으로는 석경 도독의 종사이자, 사적으로는 석경의 친동생인 그는 당황하며 대답했다.

“꽁꽁 숨겨서 남들에게 소문이 나지 않도록 조심하겠지요. 보물이란 미인과 같아, 소문이 새어 나가면 누구나 탐을 낼 것이니까요.”

“만약에 그랬는데도 딱 한 놈, 우연히 보물의 존재를 알게 된 놈이 있다면?”

“그렇다면…….”

석지관은 고민하는 듯 보였다.

석경은 맘 놓고 말하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석가장의 방식대로라면 그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돈을 주고 그다음엔 빚을 만들어서 입을 다물게 만들겠지요. 군문(軍門)의 방식대로라면…….”

“죽여야겠지.”

석경은 석지관이 차마 끝까지 하지 못한 말을 대신 해 주었다.

“그래. 그래야 말이 될 테지.”

석경은 장군검과 함께 들고 있던 군령을 석지관에게 내던졌다.

“종사 석지관!”

“예! 좌도독!”

석지관은 관인의 예를 취하며 제자리에서 꿇어앉았다.

“지금 당장 하북 흑저요새라는 곳으로 가서 그곳으로 흘러 들어가는 모든 병량과 군자금을 끊어라. 인근의 관청을 돌면서 그곳에 지원되는 물자가 쌀 한 톨이라도 있으면 군령을 어긴 하극상으로 다스리겠다고 전해!”

“존명!”

석경은 절도 있게 포권을 취하는 석지관에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지관. 명심해라. 지금 이 순간부터 왕진 태감은 적으로 간주해라.”

“……예!”

강직한 기세를 품고 걸어 나가는 석지관과 그의 뒤를 바라보는 석경.

두 사람의 결심에 의해 황실의 균형은 큰 변환점을 맞이하고 있었다.

***

한 남자가 눈을 떴다.

구 척에 달하는 키와 괴물 같은 힘을 지녔다고 평가받는 자.

최근 들어 하북 땅에 악명을 떨치기 시작한 흑저(黑猪)는 낮잠을 방해받아 기분이 예민했다.

“무슨 일이냐?”

석경 도독의 집에서 빠져나온 사례감의 환관은 최대한 흑저를 직접 쳐다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품 안의 서찰을 건넸다.

“왕 태감의 전언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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