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35화 (364/686)

10권 10화

제26장 신흉도올(新凶檮杌) (6)

“전언?”

흑저가 슬쩍 상체를 굽혀 환관에게 다가가자 환관은 그 서슬에 놀라 몸을 움찔 떨었다.

거구의 몸에서 오는 육중한 위압감이 그를 경직시키고 있었다. 흑저는 몸만 큰 게 아니라 얼굴도 커서, 그가 입으로 크게 한입 물어뜯으면 얼굴의 절반이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짐승이 아니니 당연히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런 짓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기묘한 야성적인 분위기가 흑저에게는 감돌고 있었다.

“받았다.”

흑저는 서찰을 손가락으로 한 번 툭 치고는 말했다.

“네가 대신 읽어라.”

환관은 황당한 얼굴이 되었다.

왕진 태감이 내린 명이라면, 그의 수하인 흑저는 무릎을 꿇고 감읍해하며 서찰을 받는 척이라도 하는 것이 법도거늘.

“글씨 읽는 건 귀찮으니 어서 읽으라고.”

흑저는 숫제 글자를 모르는 사람처럼 손을 휘휘 저었다.

시커멓게 탄 피부, 털이 부숭부숭 난 얼굴에는 확실히 지성(智性)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는다.

“끄응.”

환관은 난감했지만 그는 흐름에 몸을 맡기는 요령을 피울 줄 아는 자였다.

흑저를 대신해 서찰에 정중히 예를 표하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그 안의 글자를 읽어 나갔다.

“좌도독의 군사는 왜구와 같지 않다. 우군(友軍)을 예로서 대하고, 도리를 반드시 지켜라. 역사에 이름을 남길 무장(武將)이 되고자 한다면 백귀처럼 행동하라.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킨다면 용서치 않겠…… 힉!”

환관은 왕진의 서찰을 읽다가 신음을 흘리는 불찰을 범하고 말았다.

내용을 듣고 있던 흑저에게서 하늘을 꿰뚫을 듯한 살기가 치솟았던 것이다.

“백귀, 그놈의 백귀.”

흑저는 씹어 뱉듯이 웅얼거렸다.

“누가 누굴 용서해? 힘을 쥐어 주면 나를 노예처럼 부려먹을 수 있을 줄 알았던가? 헛소리!”

흑저가 바닥을 내리치자,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발밑이 흔들렸다.

흑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환관은 목이 아플 정도로 위를 올려다봐야만 했다.

구 척 장신은 허명이 아니다.

흑저는 정말로 인간인가 싶을 정도로 큰 몸을 꿈틀거리며, 짐승처럼 이를 드러냈다.

“나는 사흉(四凶)이다. 대륙을 찢어발기며 사해에 이름을 떨칠 사흉의 짐승이란 말이다.”

“흐억?”

“이 몸이 직접 선택한 것이다. 선택을 받은 게 아니라. 내가 직접! 사흉이 되겠노라, 선택했단 말이다.”

흑저는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어찌나 뜨거운지, 바로 앞에 있던 환관은 눈앞에 불덩이가 있는 것처럼 느꼈다.

“알겠소. 알겠으니 일단 진정을…….”

그러다가 훅― 하고 흑저가 오른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던졌다.

섬뜩한 소리와 함께 환관을 따라왔던 호위 한 명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대체 뭘 던진 건가 싶었는데, 살을 다 발라먹은 돼지의 다리뼈를 던져서 공격한 것이었다. 피를 뿜으며 쓰러지는 호위의 머리에 돼지의 다리뼈가 뿔처럼 돋아나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공공! 피하십쇼!”

그때 남은 한 명의 호위가 재빨리 환관의 앞으로 튀어나왔다.

흑저의 움직임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주먹을 내뻗는 동작에 특별한 격식이 없었으나 마치 양다리가 땅과 연결된 듯 하체가 지극히 안정되고 그 안에 막강한 내력이 담겨 있었다.

우우우웅―.

착각일까?

흑저가 주먹질을 하니 땅이 떨리는 것 같았다.

호위는 왼손을 올리고, 오른손으로 왼쪽 팔꿈치를 잡아 충격에 대비했다.

환관을 지켜야 했기에 그는 피할 수가 없다.

그도 보정부에서 무공을 익힌 몸, 몸을 한껏 굳히고 내력을 끌어 올리면 한 번은 버틸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퍽.

섬뜩한 소리와 함께 호위의 왼팔이 비정상적으로 꺾이고, 동시에 그의 허리가 두 동강이 나서 부러졌다.

비틀비틀 물러서던 호위가 맥없이 쓰러져 굼벵이처럼 꿈틀거린다.

흑저가 커다란 발로 호위의 등을 짓밟자 마치 작은 병아리를 밟은 것처럼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환관은 자신에게 얼굴을 들이미는 흑저에게 놀라 황급히 몸을 뒤로 뺐다.

“흐익!”

환관은 덜덜 떨었다.

살기에 짓눌려 그의 다리 사이에선 소변이 흘러나왔다.

“킁.”

흑저는 코를 씰룩거리더니 불쾌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기묘한 살기로 번들거리던 붉은색 눈동자가 서서히 원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그는 손가락 하나로 환관의 가슴을 툭 밀었다.

“가라. 가서 전해. 나는 내가 맡은 일을 충실히 하고 있으니 잔소리하지 말라고. 그렇게 마음에 안 들면 차라리 다시 전장에 보내 달라고 전해.”

흑저는 그 말을 끝으로 제자리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눕자마자 드렁드렁 코를 골기 시작하는데, 털이 숭숭 난 팔이며 몸을 보니 영락없는 산짐승이다.

“이런. 이런 일이…….”

환관은 호위 두 명의 비참한 시신을 일별한 뒤, 당장이라도 구역질을 할 것 같은 얼굴로 비틀비틀 빠져나왔다.

환관은 흑저의 방에서 나온 뒤 다른 곳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본래 타고 왔던 말을 타자마자 북경의 자금성으로 곧바로 말을 달려 나갔다.

***

“참으로 난훈(難訓: 가르치기가 어렵다)하군요. 과연 도올이라고 해야겠어요.”

황제의 방이라고 해도 믿을 법한 화려한 방에서, 이제 제법 흰머리가 많이 나기 시작한 왕진 태감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는 춘추좌씨전과 산해경에 나오는 사흉에 대한 묘사를 떠올렸다.

사흉 중의 도올은 항상 천하를 어지럽히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거만하고 고집불통에 사납기 짝이 없고, 한번 싸우면 죽을 때까지 물러서지 않는다. 이런 성품 때문에 오한(傲狠)과 난훈(難訓)이라는 별명이 붙었으니, 거만한 승냥이에 지독하게 말귀를 못 알아듣는 가르치기 어려운 자라는 뜻이다.

“세상에 제가 뜻한 대로 움직여 주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마는, 그래도 도올은 유난히 다루기가 어려운 듯해요.”

“송구합니다. 태감 어르신…….”

단 하루 만에 십 년은 더 늙어 버린 듯 주름이 많아진 환관이 엎드린 채 일어날 줄을 몰랐다.

왕진은 괜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원래부터 어려운 일이었지요. 사실은 석 도독을 만났을 때 죽을 수도 있는 일이지 않았던가요. 나는 그대가 무사히 돌아온 것만으로도 만족하니 너무 심려치 마세요.”

왕진은 환관을 향해 인자한 미소를 지어 주었지만, 그의 미소를 본 환관은 오히려 더욱 불안해하는 듯 보였다.

“호위 무인들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훌륭한 영웅들입니다. 가족과 친지들에게는 제가 위로금을 보내도록 하지요.”

왕진이 손짓을 하자,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재빨리 왕진에게 뭔가를 서명 받고 밖으로 나갔다.

환관이 다 죽어 가는 듯한 기색으로 밖으로 빠져나간 뒤에야, 왕진은 본래의 심유한 눈빛으로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왕 공공, 어떻게 하실 건가요? 백귀를 부를까요?”

날이 갈수록 왕진을 닮아 가는 청년이 무심한 목소리로 무서운 일을 말했다.

항상 왕진의 곁을 지키던 소동(小童)은, 이제 완연히 왕진의 부관(部官)으로 자라나 온갖 일에서 왕진을 돕고 있었다.

“백귀를 부른다? 불러서 어떻게 하려고? 죽이자고?”

“말을 듣지 않는 짐승은 교육을 다시 시키든가, 죽여야 하지 않을까요?”

왕진은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후훗, 선. 여전히 배울 점이 많이 남았구나. 도올은 저래 뵈도 머리를 많이 굴리고 행동하는 거란다. 도올은 왜구들과 전쟁을 벌이면서 많은 혼백을 흡수했지. 우리가 백귀를 보내도 백중세일뿐더러 그렇게 싸우다가 백귀가 죽거나 크게 다친다면 그보다 큰 손실이 어디에 있겠니?”

선은 왕진을 닮은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탁자를 툭툭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럼 지금, 그자는 자기를 버리기는 어렵다고 생각해서 배짱을 부린다는 거잖아요?”

“그렇지. 표현이 좀 저급하긴 하지만, 맞는 말이구나.”

“더 괘씸하네요. 당장 죽이고 집혼기를 회수하죠.”

“후훗, 선. 그래선 안 돼요.”

왕진은 하나뿐인 손가락으로 거절의 뜻을 보였고, 선은 눈살을 확 찌푸렸다.

“왜죠? 힘이 문제라면 궁기를 부르면 되잖아요?”

“궁기는 지금 최우선으로 해야 할 일을 하는 중이야. 백택을 찾는 일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일이지. 그걸 방해해선 안 돼.”

“으음…….”

“그보다는 계획을 앞당기기로 하자. 사흉의 원래 목적대로. 흉험한 칼날을 사용할 때가 다가오는 모양이야.”

“그 말씀은…….”

왕진은 격동하는 선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백귀에게 연락하렴. 그 아이들을 보내라고. 하나…… 아니지, 세 명을 모두 보내라고 해.”

“알겠습니다. 그럼 드디어 마지막 계획으로 진행하는 건가요?”

“그래.”

왕진은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의 이상이 가리키는 모습.

찬란한 황금 갑옷을 입은 사신(四神)의 성수(聖獸)가 지키는 황제 폐하와 그만의 황궁의 모습을 상상했다.

“이제 때가 되었어.”

***

소호는 오늘로 열다섯 번째 똑같은 철관음을 마시고 있었다.

그들이 보정객잔에 온 지 벌써 십오 일이 지났다.

그리 길지는 않은 시간이지만, 짧은 시간도 아니었다.

하도 차만 마시다 보니 이제는 찻주전자에 새겨진 무늬만 봐도 이게 어제와 같은 주전자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도 있게 되었다.

차향에 익숙해진 것은 물론이고, 나이 많은 객주는 소호의 얼굴을 보자마자 묻지도 않고 찻물을 끓여 공손히 삼 층 자리로 안내해 줄 정도였다.

“이렇게 태평하고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싫지는 않지만……. 우리 사정이 사정이니만큼 조금 더 시간을 아껴 쓰는 게 좋지 않을까?”

소호의 지적은 타당했다.

만금의 재산이 있어도 살 수 없는 게 세월이라지 않던가.

한창 때의 젊은이가 아무것도 없는 보정객잔에서 철관음만 십오 일째 마시는 건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세월을 낚는 태공망에게 물어도 똑같이 답해 줄 게 분명했다.

“소호 형…….”

하지만 섭주해는 질린 듯한 얼굴로 그 말을 부정했다.

“지금 가장 시간을 아껴 쓰는 건 소호 형 같은데요?”

“응? 내가?”

“일단 진정하고 그 역근경 자세부터 풀어요. 소호 형.”

소호는 다리는 기마 자세를 한 채 몸을 뒤로 젖혀 손가락 한 개로 몸을 지탱하는 자세에서 고개를 갸웃했다.

“이 자세가 왜?”

“보고만 있어도 속이 불편하고 머리에 피가 쏠리는 기분이네요.”

“하하핫, 너한테 지금껏 들어 본 이야기 중에 가장 웃기는 말이다.”

소호는 길게 숨을 내쉬면서 손가락에 힘을 준 채 서서히 원래의 편안한 기마 자세로 돌아왔다.

찌뿌둥했던 몸에 활력이 돌았다. 관절의 가동 범위, 온몸의 근력이 오늘도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소호는 합장을 한 채 크게 들숨과 날숨을 번갈아 쉬면서 역근경 수련을 마무리했다.

“난 되게 편했는데.”

“저는 불편하네요. 그걸 보고 있으면 저도 태극권이라도 해야 할 것 같거든요.”

“그래? 그럼 태극권을 같이 해 볼까? 사실, 요즘 들어 태극권에 숨겨진 권경이 몇 개 있다는 생각이 드는…….”

“아뇨, 아뇨. 무당의 비전 무공 같은 것에는 관심 없어요. 어서 철관음이나 드세요, 소호 형.”

소호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찻잔을 들었다가 곧 다시 내려놓았다.

삼 층 전각의 창틀 너머, 보정부로 향하는 대로에서 새카만 옷을 갖춰 입은 일단의 무리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왔다, 왔다. 주해야, 왔어.”

소호가 다급하게 손가락을 움직여서 신호하자, 이상을 알아챈 섭주해가 소호와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어? 저 사람은……?”

소호는 일단의 무리 중에 아는 얼굴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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