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36화 (365/686)

10권 11화

제26장 신흉도올(新凶檮杌) (7)

검은색 무복, 상체엔 잘 무두질된 가죽 갑옷을 착용하고 손목과 발목에 비구를 찼다. 왼손에 들고 있는 튼튼한 철 방패는 상체를 전부 가릴 수 있을 듯하다. 등 뒤에는 활을 차고 허리에는 검과 도끼를 동시에 패용한 채 여러 가지 가죽 주머니를 매달았다.

어디로 보나 그동안 소호가 보아 왔던 흑시군의 모습이다. 검은색 복면으로 눈 아래의 얼굴을 가리고 있다는 것까지 완벽했다.

하지만 맨 앞의 세 명.

약관의 나이를 막 벗어난 세 명의 청년들은 분명히 소호가 아는 얼굴들이었다. 잘못 봤을 리는 없었다. 지난 육 년의 세월 동안 동고동락하면서 봐 온 얼굴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는가?

“왜 저기에 함께 있지?”

소호가 얼떨떨한 기분에 휩싸여 있는 사이, 섭주해도 소호가 본 것들을 알아차렸다.

“현무방의 이태산이랑 청룡방의 태성천이잖아요? 매번 무산제전에서 소호 형과 부딪쳤던.”

“맞아. 전대 현무방과 청룡방의 방장들.”

머리카락을 한 올도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뒤로 묶은 거구의 사내와, 긴 장발을 있는 대로 늘어뜨린 날카로운 인상의 검객은 무산학관에서 늘 보던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지난 일 년간 대체 어떤 경험을 한 건지, 차분하게 가라앉은 기세에서 숙련된 무인의 느낌이 물씬 풍겨 나왔다.

“거기에 한 명은 죽립을 쓰고 있네요……?”

“그렇긴 한데.”

소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저 사람도 우리가 아는 사람이야.”

“누군데요?”

“백설지.”

소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섭주해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몸 선이 비슷한 것 같긴 하네요.”

“근골이랑 손끝만 봐도 알 수 있어. 설지 선배가 여기에 왜 온 거지? 그것도 저런 복장을 하고?”

백설지는 마지막으로 본 게 무산제전 때니까 헤어진 지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다.

백설지, 이태산, 태성천.

세 사람은 인재들이 모래알처럼 많다는 무산학관 안에서도 손꼽히는 무재(武才)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나란히 흑시군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이 소호는 두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믿기질 않았다.

그들이 학관에서 그렇게 서로 친했던가?

소호가 기억하기로 그들은 전혀 친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세 사람은 개인적으로 친분은 없는 사이였다. 그런데 어째서 다 같이 모여서 흑시군에 들어간 것인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으음, 어쩌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어째서?”

“무산학관 자체가 왕진 태감의 의견으로 만들어진 곳이니까요. 학관 안에서 사신회라는 작은 모임 또한 왕진 태감에게 인정을 받은 학생들의 모임이었으니……. 소호 형에게 그러했듯 그들을 포섭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죠.”

“하지만 흑시군은…….”

소호는 뒷말을 삼켰다.

흑시군이 무림 강호에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는 굳이 그가 말을 하지 않아도 누구나 아는 이야기였다.

“예. 비정했죠. 하지만 그건 오히려 기회일 수도 있어요.”

“기회? 어째서?”

“무림 강호를 떠도는 강호인이 되겠다면 모르지만, 애초에 무관(武官)이 목표였다면? 그렇다면 흑시군은 그리 나쁜 선택이 아니에요.”

황실의 실세라고까지 불리는 왕진 태감이 이끄는 절대적인 무력 집단.

어찌됐든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되는 조직인 데다, 무산학관 출신이라는 명함 덕분에 그 조직의 장과 인연까지 있는 셈이다.

만약 무과(武科)를 보려고 하거나 다른 군벌의 밑으로 들어간다면 그 안에서 자리를 잡고 윗자리로 올라가기는 지난(持難)할 것이 분명했다.

“그럼 저 세 사람이 관직 욕심에 흑시군에 들어갔다고?”

소호는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죠.”

“그렇긴 하지만 뭔가 아닌 것 같아.”

“그게 아니라면 어쩌면…….”

“어쩌면?”

“소호 형이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집혼기. 그것 때문일 수도 있죠.”

섭주해의 단아하고 지적인 얼굴 뒤로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소호는 본인도 잊고 있었던 기억을 다시금 떠올렸다.

그랬다.

유준을 포함한 소위 ‘사신회(四神會)’에 들어 있던 학생들은 유준에게 인정을 받고 각자 집혼기를 하나씩 받은 사람들이었다.

현무의 이태산.

청룡의 태성천.

주작의 곽도엽.

백호의 유준.

거기에 더해 소호가 가진 것까지 다섯.

그 다섯 개가 무산학관이 가진 집혼기의 숫자였고, 육 년의 시간 동안 단 한 명도 숫자가 늘지 않았다.

“설지 선배는 집혼기가 없었어.”

“그랬죠. 하지만 왕 태감이 집혼기를 몇 개 만들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잖아요?”

“맞아. 그건 그래.”

소호는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그들을 다시 한 번 쳐다보고 황급히 몸을 낮췄다.

지나가던 흑시군이 보정다루를 힐끔거리며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럼 만약에 집혼기 때문이라고 치면, 왕 태감은……. 저 세 사람한테 전투를 경험시켜서 집혼기를 키우겠다는 거야?”

“네. 그럴 수도 있겠죠.”

“위험해 보이는데.”

“자세한 건 알아봐야겠죠. 어쩌면…… 집혼기에 우리가 모르는 비밀이 있는지도 모르고요.”

입을 다물고 찻잔을 내려다보는 섭주해의 안색이 몇 번이나 휙휙 바뀌었다.

소호는 들고 있던 철관음의 향을 마지막으로 음미한 뒤 찻잔을 내려놓았다.

“어쨌거나, 차를 마시고 있을 때는 아닌 거네.”

소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십오 일간의 기다림이 끝을 맺는 순간이었다.

소호는 섭주해가 하오문의 하북 지부로 향한 사이 보정부 인근을 지나가는 흑시군의 뒤를 몰래 쫓았다.

본래의 복장은 너무 눈에 띄는 관계로 객잔 주인에게서 허름한 하인의 옷을 빌렸다.

회색과 갈색으로 적당히 물들어 있는 옷은 의외로 활동하기가 편했다. 물론 보푸라기가 많이 일어난 데다 옷감도 해져서 거칠거칠한 느낌이었지만, 그러면 좀 어떤가. 지금은 눈에 띄지 않는 게 중요했다.

‘인근의 관청들을 돌고 있어.’

소호는 흑시군이 일을 마치고 잠을 잘 숙영지를 만들 때까지 기다렸다.

백 명가량의 흑시군은 능숙한 솜씨로 자신의 잘 곳을 만들어 각자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중에 백설지, 이태산, 태성천 세 명은 흑시군 병사들과 따로 겉도는 듯했다.

그들은 각자 따로 떨어져서 잠자리를 구했다.

특히 일행 중 유일한 여성인 백설지는 흑시군들과 꽤나 떨어진 자리에 양 가죽으로 만들어진 조그마한 침상을 만들었다.

소호는 나무 뒤에 몸을 숨긴 채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조용히 그녀의 근처로 이동했다.

백설지가 소호를 눈치챈 것은 그녀로부터 세 걸음 안의 거리에 소호가 들어갔을 때였다.

휘리릭―.

백설지는 몰래 다가서는 무뢰배에게 공격을 망설이지 않았다.

극한의 빙백신기(氷魄神氣)가 담긴 손바닥 장타가 소호의 목젖과 명치를 동시에 노리고 날아왔다.

소호는 양손을 위아래로 벌리듯이 움직여 그녀의 장타를 차단했다.

텅―.

공기가 떨리면서 얼어붙은 빙백신기를 주변에 터뜨렸다.

파공음이 컸다면 다른 사람들도 들었겠으나, 다행히도 소호는 태극권의 진결로 그녀의 내력을 최대한 흩어 놓았다.

탁! 타타탁!

우상타.

좌상, 좌하, 팔목에서 이어지는 회절(回折).

어스름한 불빛 아래 장타와 장타의 대결이 빠른 속도로 삼 초식가량 이어졌다.

무산학관 시절에 늘 해 오던 내력과 내력의 대결이었다. 백설지는 좌수 장타를 두 번 연속 내지르는 습관이 있었다. 그걸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반응해 반격까지 행하는 자는 이 세상에 흔치 않다.

백설지는 곧바로 그녀를 찾아온 상대방이 누군지 알아챌 수 있었다.

“장소호?”

“오랜만이네요. 설지 선배.”

서로의 손목과 손목을 붙잡아 비틀면서 소호는 웃음 지었다.

마침내 백설지가 자신의 죽립을 들어 올려 푸른 보석 같은 이국(理國)의 눈동자를 드러냈다.

“네가 어떻게 여길……!”

“쉿! 몰래 온 거니까. 조용히 해 줘요.”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손목을 놓고 뒤로 반보 물러섰다.

“휴우.”

길게 숨을 내쉬면서 합장.

무산학관 때나 지금이나, 맨손 장타 내력 대결을 끝마치면 하는 습관은 둘 다 변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흑시군 쪽에서 그들이 보이지 않도록 나무 뒤에 비스듬히 몸을 감췄다.

“지나가다가 우연히 보고 쫓아왔어요. 흑시군에 합류해 있는 걸 보고 놀라서요.”

“아…….”

“흑시군에는 왜 들어간 거예요?”

백설지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망설이는 얼굴.

푸른 호수 같은 눈동자에 깊은 고뇌가 담겨 있었다.

소호는 다른 흑시군들의 기척을 살폈다.

그들은 각자의 숙영 장소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백설지가 있는 곳을 신경 쓰는 기색은 없었다.

“너무 여러 가지 일이 터져서 정신이 없었는데……. 사실, 설지 선배를 만나면 묻고 싶은 게 있었어요.”

백설지는 침묵에 잠긴 채 눈빛만으로 무엇이 궁금하냐는 듯이 바라봤다.

“그날, 위군이 무슨 이야기를 했어요?”

“……!”

소호가 굳이 말을 덧붙이지 않아도, 백설지는 소호가 묻는 게 언제의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무산제전의 마지막 날.

남위군이 죽기 전에 백설지에게 들러서 무언가를 말해 주었고, 백설지는 그 말에 큰 충격을 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소호는 그때 백설지의 절망적인 얼굴을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걸 알고 있었어?”

“그날 저는 위군을 쫓아가고 있었어요. 그때 위군이…… 선배랑 이야기를 나누고 나오는 걸 봤죠.”

“그랬구나…….”

“일이 다 끝나고 돌아오니 선배는 사라졌고요.”

백설지는 망설이다가 뭔가를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나에게는 오라버니가 있어. 북해에서 가문을 물려받을 사람이었어. 재능이 뛰어나서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고……. 어찌 보면 너랑 비슷했어. 감각적으로 어떤 무공이든 쉽게 익혔지.”

소호는 백설지의 침잠된 목소리에서 이 이야기의 비극적 결말을 예상했다.

“오라버니는 무공을 완성시키고 오겠다면서 중원에 무림행을 갔는데…… 사라졌어. 갑자기.”

“완전히 연락이 끊긴 거예요?”

“끊겼어. 가문의 힘이 총 동원되어서 마지막 흔적을 쫓았는데……. 남경 부근에서 큰 싸움이 있었다는 것까지만 알아냈어. 그 후로도 가문에선 오 년간 미련을 끊지 못했지만 이제는 포기했지.”

백설지는 여전히 상처가 낫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런데 남위군이 소식을 전해 주었어. 오라버니는 왕진의 곁에 있는 것 같으니 확인해 보라고.”

“아…….”

소호는 그 순간 무산제전에서 벌어졌던 그 사건을 떠올렸다.

백검회의 습격 사건 때 활약했던, 한빙진기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던 그 거구의 사내가 생각나는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왕진을 찾아갔군요?”

“그래. 친절하면서도 섬뜩한 사람이더라. 그는 조건을 걸었어. 이걸 가지고 흑시군과 함께 악적들을 쓰러뜨리면서 강해지라고. 오라버니는 지금 중요한 임무 중이라……. 그 후에 볼 수 있다고 했어.”

백설지는 순진하지도 멍청하지도 않았지만, 그녀는 절박했기에 다른 길이 없었다.

백설지는 철 요대의 비밀 공간을 열고 자그마한 장신구를 꺼내 들었다.

중지만 한 길이, 섬세한 세공으로 기묘한 문양을 새겨 놓은 은판 가운데에 타원형의 호박 보석이 고정되어 있는 목걸이였다.

흔히 묘안석이라 불리는 보석이다. 황갈색 몸체의 가운데에 고양이의 눈처럼 세로로 검은색 줄이 새겨져 있는 강렬한 느낌의 보석이었다.

“집혼기……!”

소호가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가운데, 백설지의 말이 이어졌다.

“나랑 같이 온 세 사람은 흑저요새에 있는 악인을 잡을 거야. 그게 나에게 주어진 첫 번째 명령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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