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37화 (366/686)

10권 12화

제26장 신흉도올(新凶檮杌) (8)

백설지는 차분하면서 당당했고, 자신이 그 일을 성공해 낼 것이라고 확신하는 듯 보였다.

“악인을 잡아……? 명령?”

소호는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무모하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올랐다.

소호는 사흉을 다 만나 보진 못했지만, 지금까지 만나 본 자들만 하더라도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흑저요새에서 기다리는 그 ‘악인’이 누군지 정말로 알고 있긴 한 걸까?

선홍색 검기를 자유자재로 뿜어 내던 유준이 얼마나 강했던가.

온 건물을 불태우는 겁화를 극음진기로 진정시키던 궁기라는 남자는 또 얼마나 대단했는지.

도올이 유준이나 궁기와 같은 사흉이니 만큼 그도 숨겨진 능력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백설지로는 안 된다.

그녀는 약하지 않다.

수준으로 따지면 절정의 경지에 가까울 것이다.

무산학관 출신의 무인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강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녀에겐 불가능한 일이라고, 소호의 ‘본능’이 강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건 안…….”

소호는 뜨거운 불을 내뱉듯 마음을 토해 내려다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녀를 말려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과 동시에, 그걸 말리는 게 그녀에게 도움이 될까? 라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소호는 이제 열두 살의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위험하다고 말하면?

그만두라고 말하면? 무엇이 해결되는가?

말은 쉽다.

하지만 말만으로 무엇을 해결할 수 있나?

그녀는 방금 전에 잃어버린 오라버니를 찾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흑시군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큰 결심을 하고 흑시군에 들어왔는데 위험하다고 해서 이 일을 그만둘 리 없었다.

그런 백설지에게 소호는 무엇을 해 줄 수 있는가?

적이 강대하다고 말한들 그녀가 피할 마음이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불안만 가중시키는 꼴 아니겠는가.

‘어렵다. 왜 하필 이곳에 그녀가 와서……!’

소호는 양 주먹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두 손을 꽉 거머쥐었다.

찰나의 시간에 불과했지만 머릿속에선 진이 빠져 버릴 정도로 많은 생각들이 지나갔다.

“설지 선배, 흑저요새의 도올은…….”

소호는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푸른색 눈동자를 보며 잠시 말을 멈췄지만, 이내 마음을 강하게 먹고 담담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그자는 가면철왕에 버금가는 괴물입니다. 이미 명 제국의 군대와 싸워 지휘관을 죽이기도 했어요. 부디 섣불리 나서지 말고…… 목숨을 보중하길 바랄게요.”

“……!”

백설지는 안 그래도 커다란 눈동자를 더 크게 뜨면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 표정, 그 분위기에서 그녀가 사전 정보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백설지는 뭔가를 말하려 했으나, 그녀가 무언가를 말하기 전에 흑시군 쪽에서 다가오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소호는 그림자 속으로 조용히 몸을 감췄고, 백설지의 몸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움찔 떨렸다.

“백 소저, 무슨 일이 있나?”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묶은 거구의 청년, 한때 현무방의 방장이었던 이태산이 멀찍이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백설지는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가장하며 나무 밖으로 반쯤 몸을 드러냈다.

그녀는 싸늘한 눈빛으로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이 소협은 다른 사람의 연무(硏武)를 훔쳐보는 일을 좋아하나요?”

“뭐? 아니, 그건…… 크흠! 무공을 수련하는 중이었나? 미안하군. 어디선가 파공음이 들렸던 것 같은데, 백 소저가 보이지 않아서 찾으러 왔을 뿐이야.”

무산학관에서 항상 당당하고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던 모습과는 달리 그는 어째서인지 백설지의 말에 당황하고 있었다.

백설지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기세를 탔다.

“이해가 되질 않네요. 우리가 같은 입장에서 함께 일하게 되었지만 모든 것을 함께할 필요는 없잖아요?”

“크흠! 그야 그렇지만 나는 그저 걱정이 되어서…….”

“아무 일도 없어요. 홀로 무공을 수련하고 싶으니 방해하지 말아 주면 고맙겠어요.”

쌀쌀맞다 못해 냉기가 흐르는 그녀의 목소리에 이태산은 마음의 평정을 잃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바위 같은 육신을 가지고, 철탑 같은 무공을 연마했음에도 여인의 말 몇 마디에 평정이 무너지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마음을 빼앗긴 젊은 청년의 한계는 명확했다.

“무공 수련을…… 방해해서 미안하군. 사죄의 뜻으로 내가 무공 수련을 도울 일이 있다면 언제든 말해 주면 좋겠다.”

이런 상황에서도 올곧게 직진하듯 말하는 것이 이태산이라는 남자의 성정이다.

백설지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만년설 같은 차가움으로 그의 말을 싹둑 잘랐다.

“도움은 필요 없어요.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말씀드리죠.”

“지금은…….”

“…….”

“알겠다. 돌아가지. 방해해서 미안했다.”

이태산은 부끄러우면서도 분한 얼굴로 어찌할 바를 모르며 묵묵히 뒤돌아서서 멀어졌다.

백설지는 그가 원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모습을 한동안 지켜본 뒤에야 다시 나무 뒤로 몸을 돌렸다.

“다행히 잘 넘겼어. 저 사람이 요즘 들어 부쩍 말을 많이…… 소호?”

백설지는 당황하며 둘러보았지만 소호의 모습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꿈이라도 꾼 건가 의심스러울 만큼 당황스러웠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백설지는 무표정한 얼굴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소호는 떠났지만, 그가 마지막에 남기고 간 말은 그녀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가면철왕에 버금가는 괴물…….”

백설지는 흑저요새가 있는 방향을 묵묵히 바라봤다.

우뚝 솟아 있는 두 개의 산봉우리 사이에서, 흑저요새로 가는 길은 백설지의 마음처럼 어둡게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

“뭐가 없다고?”

도올은 거구다.

보통 사람들은 목이 꺾일 만큼 위로 고개를 들어야 그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구 척 장신이라는 말은 그를 위해 존재하는 말이었다. 통나무처럼 두꺼운 다리도, 말랑말랑하면서도 힘을 주면 강철처럼 단단해지는 팔뚝도 다 보통 사람보다 우월한 그의 능력을 상징한다.

그는 구부정하게 굽히고 있던 몸을 꼿꼿하게 세웠다. 졸린 듯 만사가 귀찮은 느낌의 눈이지만 그가 몸을 세우고 내려다보면 먹잇감을 가늠하는 맹수의 눈빛이 된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부관 역할을 맡고 있는 흑시군의 곽문기는 당장에 겁에 질린 얼굴이 되었다.

거북이처럼 어깨를 움츠린 그는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자금이…… 끄, 끊겼습니다. 인근 관청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닦달을 해도 모른 척하는 걸 보니 위에서 명령을 내린 게 분명합니다.”

도올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말없는 침묵은 효과적으로 곽문기를 압박했다.

그는 침묵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이마에서 흐르는 식은땀이 많아졌다.

“저는 최선을…… 다했는데…….”

“최선? 좋지. 그래서 돈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관청에서 아무리 성질을 부리고 물건을 때려 부숴도 상부의 명이라면서 버티는데…….”

“상부? 무슨 상부!”

쿠웅!

도올은 발을 구르면서 버럭 소리쳤다.

“내 머리 위에 누가 있다고! 감히 어떤 상부가 내 돈을 가로막아!”

도올이 발을 구르니 땅이 울리고 호통을 치차 천둥벼락이 치는 것만 같았다.

경천동지라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일 것이다.

곽문기는 심장이 떨려 서 있기가 힘들었으나, 살기 위해서라도 그는 바른 말을 해야만 했다.

“그러게 절충교위를 죽이면 안 된다고 제가 몇 번이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는 좌도독의 사람입니다. 자기가 아끼던 부관이 죽었는데 누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곽문기의 지적은 날카로웠고, 핵심을 정확하게 보고 있었다.

실제로 그가 인근 관청을 찾아갔을 때 그들은 누구의 명으로 돈을 주지 않고 버티는지 절대로 말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들의 그런 행위가 곽문기에게는 대체 누가 명령을 내린 것인지 추측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도 그럴 게, 흑시군의 대장이 왕진 태감이라는 것은 세상천지의 모든 사람들이 아는 바다.

그리고 왕진 태감이라고 하면 황제 폐하의 황사 자격으로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명실상부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황실의 실세.

그런데 그런 왕진 태감의 사람들에게 돈을 안 주고 버틴다?

그건 그들에게 명을 내린 것이 왕진 태감과 동등하거나 그보다 위.

즉, 황족의 격을 갖춘 자가 명을 내리고 있다는 말밖에 안 되는 것이다.

“끄응, 그놈 때문이었다고? 그 말만 번지르르하고 내 성질만 돋우던 관리 놈?”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절충교위도 전면전을 치를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저 자기 위세자랑 좀 하고 겁 좀 주려고 온 건데 그걸 목을 꺾어 죽여 버리시니 이 상황까지 온 것 아닙니까.”

“젠장, 내가 돈 줄이 막힐 줄 알았나.”

“그 성질머리를 좀 죽이셔야 합니다. 이번 일 잘 해결 못하면 정말 큰일 난다고요.”

우는 소리와 건방진 첨언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것이 곽문기의 장점이자 특기였다.

도올은 덮쳐 올 어두운 미래가 느껴지는지 자기 손가락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고민에 빠져 버렸다.

“젠장, 그러면 안 되는데. 얼마 전에 찾아온 환관 놈한테 내 일은 알아서 잘하니까 걱정 말라고 큰소리쳤는데. 돈이 없으면 흑시군도 못 모으고, 먹을 것도 못 사고……. 그래선 안 된다고.”

도올은 강렬한 눈빛으로 곽문기를 노려보았다.

“말해 봐. 지금 이 근방에서 돈을 갖고 오려면 어디로 가면 되겠나?”

“그 ‘갖고 온다.’라는 의미가 뭡니까? 뺏겠다는 말씀이세요?”

“힘이 있는 놈이 갖는다. 당연한 이치지.”

히죽 웃음 짓는 얼굴이 섬뜩했다.

털이 숭숭 난 얼굴에 자그마한 두 눈이 맹수처럼 샛노란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는 말 그대로 행동할 것이다.

정말 짐승처럼 지나가는 사람을 덮치기라도 할까 봐 곽문기는 황급히 그를 만류했다.

“안 됩니다. 정말로 큰일 나요!”

곽문기는 사색이 되어 외쳤다.

“지금은 사죄하셔야 합니다. 왕진 태감께 사죄하고 잘 하겠다고 하세요. 앞으론 주의하겠다고 하고요. 그러면 봐주실 겁니다. 대장은 사흉 아닙니까. 세상에 네 명뿐인 강자를 조금 문제 있다고 내치겠냔 말입니다.”

“흥.”

도올은 탐탁지 않게 코웃음 쳤다.

“못 내치지. 사흉은 더는 만들지도 못할 텐데.”

“예? 만들어요?”

“그런 게 있다. 그렇단 말이지. 사흉이라 못 내친다라…….”

도올은 의미심장하게 씩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곽문기는 생각했다.

자신은 여포의 곁에 있는 진궁과 같다고.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천둥벌거숭이 여포가 진궁을 만났기에 일대의 군벌로 성장한 것 아니겠는가.

곽문기는 그게 바로 자신들의 미래라고 생각했다.

도올을 잘 어르고 달래서 일대의 군벌로 만들어 낸다.

모든 꿈들은 그때부터 이뤄지는 것이다.

“그거구만.”

씩 웃는 도올.

그렇다.

곽문기가 자신을 진궁이라 생각했지만, 도올은 여포가 아니었다.

관청을 상상하며 씩 웃는 도올에게서 위험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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