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38화 (367/686)

10권 13화

제26장 신흉도올(新凶檮杌) (9)

석지관은 좌도독 석경의 종사(從事)로서 하북 지역 관청에 좌도독의 군령을 내렸다.

명령의 내용은 간단했다.

흑저요새로 향하는 모든 지원을 끊어라!

하북의 관청들은 군령을 거부하지 않고 흑저요새로 보내 주던 모든 금전과 곡식의 지원을 일제히 끊어 버렸다.

사실 이는 관청들 입장에서도 간절히 바라마지 않던 일이었다.

무리 없이 걷어 오던 세금이 흑저요새 때문에 두 배로 늘어나 버렸으니 어느 누가 좋아했겠는가. 심지어 세금을 내는 사람들의 불만불평도 다 관청이 도맡아서 처리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좌도독 석경이 직접 나서서 돈을 내지 말라고 말해 준 것은 그들에게 하늘이 구원의 빛을 내려 준 것과 다름없었다.

“이제 드디어 흑저요새 그 날강도 같은 놈들한테 돈을 안 줘도 되겠군.”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시달렸나? 좌도독의 명이 내려왔으니 이제 가차 없이 잘라 버리세.”

인근 지역의 태수부터 종구품의 하급 관료까지 관인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흑저요새를 욕했다.

석지관은 좌도독의 힘이 막강하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어 만족스러웠고, 관청 입장에서도 나중에 잘못되더라도 핑계를 댈 일이 생겼으니 만족스러워했다.

“새로운 흑시군이 나타났는데, 그들도 흑저요새로 가는 지원을 끊으라고 말하면서 돌아다닌답니다. 아무래도 그 안에서도 사정이 복잡한 것 같습니다.”

“흥, 도마뱀처럼 꼬리를 자르려 하나 보군. 우스운 일이다. 좌도독님이 무서워서 속보이는 행동을 하는 것이야.”

석지관은 혀를 차면서 왕진 태감을 비웃었다.

본인을 위해 수하를 희생시키다니.

아무리 황실의 실세라도 그렇게 살아서야 누가 존경을 하겠는가?

그러던 중 이변이 발생한 것은 석지관의 귀에 흑저요새의 부하들이 인근 관청에서 난동을 피우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쯤이었다.

처음엔 석지관은 코웃음을 쳤다.

흑시군 몇 명 따위가 난동을 피운다고 대명제국 좌도독의 명령이 바뀔 것 같은가?

말도 안 되는 소리.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라와 관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농촌 무지렁이의 소치다.

헌데 바로 그다음 날 경악을 금치 못할 소식이 들려왔다.

“세금으로 걷어 오던 쌀과 돈을 빼앗겼습니다. 피부색이 어두운 괴한이 달려들어서 호위병들을 모조리 쓰러뜨린 채 수레를 가져갔다고…….”

“피부색이 어두운 괴한? 그게 누구지?”

“구 척 장신에 거구. 거기에 창칼이 안 통하는 단단한 몸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흑저요새의 도올이라는 자 같습니다.”

“뭐야?”

석지관은 전율했다.

“생각보다 더 미친놈이군. 흑시군에 소속된 놈이 감히 나랏돈에 도적질을 한단 말이냐? 그것도 본인이 직접 나서서?”

석지관은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다.

“하긴 그런 놈이니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절충교위를 죽였겠지.”

상대는 법(法)도 상식도 없는 짐승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형벌로 다스려지는 것을 겁내지 않고 이렇게나 막무가내로 행동한단 말인가.

‘오히려 잘됐다. 우리에게 명분을 주었어. 이 일을 크게 만들어야겠다.’

석지관은 대명제국 좌도독의 종사로서 이 일은 허투루 넘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황실에 올릴 상소문을 작성하기 위해 먹을 갈고 붓을 들었다.

두 번째 급보가 들려온 것은 그가 한창 나랏돈을 습격한 흉수들에 대한 성토의 글을 쓰고 있을 때였다.

“대인! 관청이 습격당했다고 합니다. 짐수레를 습격했던 괴한이 관청을 찾아와서 좌도독의 사람은 어디에 있냐고 막무가내로 행패를 부리는데……. 막을 수 있는 병사가 아무도 없다고 합니다.”

“뭐라고……?”

“일단은 피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직 여긴 찾아오지 않았지만, 시간문제입니다.”

호위병들은 심각한 얼굴이었다.

그들은 석가장에서부터 그를 호위해 준 자들이었다. 무예가 뛰어나고 견식도 높다. 그런 그들이 위험하다고 평한다면 그건 정말로 위험한 일.

“설마 좌도독의 종사인 나를 어쩌려고 하겠느냐?”

“…….”

“아니, 우문이었군. 상대는 법도도 모르는 짐승이니까. 너희는 위험하다고 보는 것이로군?”

호위들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큰일이구나. 법보다 주먹이 더 가까운 세상이라니. 상소문을 쓰고 있다가 죽을 수는 없지. 대책을 강구해야겠다.”

석지관은 쓰고 있던 서찰을 조심스레 둘둘 말아서 품 안에 넣은 뒤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는 신분패를 꺼내 호위병에게 건네주었다.

“이걸 팽가에 전하고 도움을 요청해라. 황실로 가야겠다.”

“예!”

팽가의 호걸들이 석지관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뛰쳐나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석지관은 그를 도와주러 온 하북팽가 사람들을 보며 감탄을 토해 냈다.

기골이 장대한 삼십 명의 사내들이 말을 타고 자유롭게 도열해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맹호도객(猛虎刀客)이라 불렀는데 하나같이 잘 갈린 칼처럼 예기(銳氣)가 뿜어지는 사내들이었다.

특히 맹호도객들의 대장인 팽자겸이라는 사내는 무공에 대해 기초적인 소양밖에 없는 석지관이 보기에도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뭔가가 있는 사람이었다.

건장한 체구에 사내답게 각진 얼굴, 말의 고삐를 쥐고 있는 손에는 손바닥과 손등을 가리지 않고 흉터와 굳은살로 덮여 있어 백전연마의 흔적이 느껴졌다.

“대인께서는 안심하십시오. 하북 땅에서 팽가를 건드리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건 어째서 그러한가?”

“하북 사람 모두가 팽가의 도(刀)가 호랑이의 이빨처럼 사납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 말을 하면서 씩 웃는 팽자겸에게서는 자신의 가문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감이 물씬 풍겨 나왔다.

“그렇군. 마음이 놓여. 잘 부탁하네.”

석지관은 마차에 올라탔고, 팽자겸의 호위를 받으며 황실로 향하는 길에 올랐다.

츠츠―.

한 시진쯤 마차를 달렸을 때 가장 앞서서 달리던 맹호도객 한 명이 혀를 차는 소리를 냈다.

수상한 자가 앞에 있다는 비밀스런 그들만의 신호였다.

마차에 함께 타고 있던 석지관의 호위병은 자신들이 지금 주마강(拒马河)의 인근에 있다고 조용히 말해 주었다.

혹시나 얼굴을 알아볼 것을 대비해 창밖을 내다보는 것도 호위병이 대신해 주었다.

그는 밖을 한 번 살짝 내다보더니 경악을 감추지 못한 채 사색이 되어 주저앉았다.

“그자가 있습니다. 주마강을 건너는 다리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서 행인들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호위병은 숫제 질린 얼굴이었다.

“허어.”

석지관은 감탄을 토해 냈다.

‘우리가 북경으로 간다면 반드시 이 다리를 지나갈 것을 알고 있었다? 대단하군……. 짐승처럼 단순하고 생각 없는 놈이 아니었던 건가? 어떻게 다리를 장악하고 눌러앉을 생각을 했지?’

웬만한 배짱이 아니고서야 저지를 수 없는 일이었다.

하긴, 관청을 습격하고 나라에 바칠 세금을 빼앗아가는 놈이니 배짱은 원래 좋았다.

석지관은 멀리서 사람들이 언성을 높이고 화내는 소리를 들었다.

“난 오늘 안에 북경 대붕상회에 도착해야만 한단 말이다! 유정상회의 신용이 걸려 있어!”

“순천부 한림학사의 행렬이다! 어서 비키지 못할까!”

버럭 소리치는 사람들은 거상(巨商)의 집단도 있었고 북경 고위 관료의 행렬도 있었다.

그들은 말이 통하질 않자 건장한 사내들을 보내 해결하려 했던 것 같지만, 그 용감한 행동의 결과는 단말마의 비명이었다.

“컥…….”

“크륵.”

퍽― 하고 뭔가를 격타하는 둔중한 소리, 그 후에 바닥에 물을 뿌린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한순간 쥐죽은 듯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꺄악!”

“머, 머리가……!”

“살인이다! 백주대낮에 살인이야!”

다리 근처에 있던 평범한 사람들이 놀라서 소리치며 사방으로 도망치는 소리가 났다.

“또 저지른 건가……? 저놈은 대체……?”

석지관이 어이가 없어서 중얼거리고 있으니 마차 안에 있던 호위병들이 황급히 일어나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들은 목소리를 최대한 억누른 채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뭘 하고 있소! 어서 도망칩시다. 어차피 북경에서 관병들이 나올 거요. 다리가 다시 열릴 때까지 물러섭시다!”

팽가 사람들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일각이 천년 같은 침묵 끝에 팽자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을 뿐이다.

“대인, 이미 저놈은 우리를 봤습니다. 게다가 주변을 보니 흑시군들을 이용해서 지키고 있군요. 싸워야겠습니다.”

팽자겸은 예의를 지키고 있기는 했으나 그의 말은 제안이나 질문이라기보다는, 통보에 가까웠다.

“그렇군.”

석지관은 크게 심호흡하며 마음을 다졌다.

그러고는 호위 한 명에게 자신의 품 안에 있던 서찰을 건네주었다.

“헌충. 이건 아까 내가 써 둔 상소문일세. 다 쓰진 않았으나 요지는 이미 다 담겨 있지. 혹시 모르니 가지고 있게.”

“……!”

호위는 벼락을 맞은 듯 몸을 떨다가 두 눈에서 강직한 기세를 피워 올렸다.

“안 됩니다, 대인. 제가 죽기 전까지는 대인의 몸에 칼이 닿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럴 거라 믿네. 하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거지. 팽가의 사람들이 이기면 좋은 거고, 진다면? 나는 제법 위치가 있으니 죽이지 않고 사로잡을지도 모르지만…… 자네들은 어찌 될까.”

“…….”

“일단은 갖고 있게. 그리고 내가 잡힐 것 같으면 자네들은 도망쳐서 그 상소문을 꼭 좌도독께 전해 주게.”

석지관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호위들로서는 거절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석지관은 당당하게 마차에서 내렸다.

문을 열고 내리자 사방에서 집중되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중에는 팽자겸의 시선도 있었다.

처음에는 의아함과 경악이 담겼다가, 이내 감탄과 호감의 시선으로 변하였다.

“제법이오, 대인. 우리와 생사를 함께 해 주시는 것이오?”

“미안하지만 난 안 죽을지도 모르네.”

“하하핫! 그거 반가운 말씀이오. 팽가가 호위하는 사람이 죽어서야 안 될 일이지.”

석지관은 팽자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드디어 말로만 들어왔던 ‘흑저요새의 괴물’을 직접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다.

“크군.”

석지관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사두마차 두 대가 나란히 지나가도 될 법한 거대한 다리를 홀로 가로막고 있는데도 허전한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거무튀튀한 피부.

온몸에 수염이 덥수룩하게 났고, 그리 크지 않은 두 눈은 짐승처럼 샛노란 안광을 뿜어낸다.

그의 양옆에는 머리가 터져 버린 시신 두 구가 아무렇게 굴러다니고 있었다.

오십 보 이상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피 냄새가 물씬 느껴질 정도다.

으적. 으적.

흑저요새의 괴물은 시신을 앞에 두고도 새끼 돼지로 보이는 고기를 한 손으로 잡고 뜯어먹고 있었다.

그가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불에 잘 익은 새끼 돼지의 가죽 아래에서 육즙이 흘러나와 무성한 수염을 적시고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 태연함.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도 그대로 남은 수십 명의 사람들과, 하북팽가에서 온 도객 삼십 명을 눈앞에 두고 있음에도 그는 조금도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석지관은 외쳤다.

“도올! 흑저요새의 도올이 맞는가!”

다리 위의 거한은 힐끗 석지관을 쳐다봤지만 대답하지 않고 고기를 씹기만 했다.

“내 이름은 석지관! 대명제국 좌도독의 종사이며, 시급한 임무를 띠고 북경으로 향하는 중이다. 나를 지켜주는 도객들은 하북팽가에서 자랑하는 맹호도객들. 우리는 모두 명나라의 충실한 신하들이며 흑시군과도 척을 지지 않고 있다. 그대는 그럼에도 우리를 가로막을 것인가!”

석지관의 외침에 주변 모두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스산한 분위기가 흘렀다. 석지관은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팽자겸이 말했듯 흑시군의 모습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쿵.

그때, 다리 위의 거한이 둔중한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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