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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객잔 2부-239화 (368/686)

10권 14화

제26장 신흉도올(新凶檮杌) (10)

그 순간, 팽가의 맹호도객들이 팽자겸을 중심으로 삼각형의 진형을 형성했다.

“대인, 싸움이 시작되면 마차 안에 올라타고 무조건 앞으로 달리십시오.”

팽자겸은 석지관에게 등을 보인 채로 나직하게 말했다.

커다란 등에서 뿜어지는 박력은 상대가 누구든 쓰러뜨리고 승리할 것 같은 안정감을 주었다.

그런 사내가 잔뜩 긴장한 채 도망을 전제로 말하는 상대가 약할 리가 없다.

석지관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고, 언제든 마차에 올라탈 수 있도록 마차의 문을 붙잡고 서 있었다.

쿵. 쿵. 쿵.

거구의 사내는 둔중한 발소리를 내면서 걸어왔다.

석지관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무공을 기초 소양만 익혔을 뿐이지만, 그럼에도 무공의 기본이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몸을 가볍게 하는 것’이라고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저 거구의 사내는 그런 기본조차 안 되어 있는 듯했다.

아무리 거구라도, 무인이라면 발소리 정도는 안 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 이상 다가오지 마라!”

팽자겸이 웅혼한 외침을 토해 냈다.

“가까이 다가온다면 하북팽가의 참철도(斬鐵刀), 나 팽자겸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쿵. 쿵.

거구의 사내는 팽자겸의 경고를 듣고도 멈추지 않았다. 심지어 다리 위에 앉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한 손에 든 새끼 돼지를 계속해서 으적으적 먹고 있기까지 했다.

“이놈……!”

사방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팽가의 사내들을 업신여기는 그 태도에 맹호도객들이 흥분한 것이다.

거구의 사내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석지관의 심장은 두근거렸다.

언제 마차에 올라타야 할 것인가.

마부와 눈을 마주친 석지관은 오로지 그 생각만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분위기가 바뀐 것은 거구의 사내가 새끼 돼지의 코를 질겅질겅 씹다가 바닥에 퉤! 하고 뱉어 버리는 순간부터였다.

고오오오오―.

“……!”

육중한 존재감에 호흡마저 끌려가는 듯한 기분.

구 척 장신의 거구가 하늘에 머리가 닿는 거인으로 보일 정도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냈다.

“하아아아압―!”

가장 우측에 서 있던 팽가의 맹호도객 한 명이 번개같이 달려들며 칼을 내리그었다.

우르릉―.

어기신풍(御氣神風)의 신법을 사용한 구름 같은 몸놀림, 내리치는 일도양단의 참격은 혼원벽력도(混元霹靂刀)의 칠 성 성취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그야말로 섬전 같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참격이었으나, 거구의 사내는 덩치와 달리 재빠른 몸동작으로 맹호도객의 공격을 정면으로 후려쳤다.

그가 무기로 사용한 것은 다 먹고 살점이 조금 붙어 있는 새끼 돼지의 척추 뼈였다.

빠각!

당연한 일이지만 새끼 돼지의 척추 뼈는 단박에 박살 나 흩어졌다.

맹호도객의 혼원벽력도는 기세가 조금 죽기는 했지만, 그래도 새끼 돼지의 척추 뼈 따위는 날려 버린 채 거구의 사내의 오른손을 날려 버리는 듯한 모양새였다.

“오오오!”

석지관이 마차에 올라타는 것조차 잊고 감탄을 토해 내는 것도 잠시.

경악할 만한 일이 벌어졌다.

꾸우웅―.

“……!”

맹호도객의 혼원벽력도가 거한의 오른쪽 팔뚝에 막혔을 뿐 아니라 상처조차 입히지 못한 것이다.

마치 커다란 통나무를 조그마한 손도끼로 후려친 듯했다.

충격은 있지만, 거죽조차 뚫지 못했다.

“금강불괴……?”

팽가의 한 무인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거한이 씩 웃었다.

그가 맨주먹으로 휘두른 좌수 권격이 무시무시한 파열음을 내며 맹호도객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커헉!”

우드득―.

실 끊어진 연처럼 날아간 사내가 처참한 몰골로 바닥을 굴렀다.

그는 피를 토하면서 벌떡 일어섰지만, 곧바로 더는 버티지 못하고 옆으로 쓰러져서 꿈틀거렸다.

그의 희생은 모두에게 경각심을 주는 신호탄과 같았다.

석지관이 마차에 올라탔고, 마부는 미친 듯이 말에 채찍질을 했다.

히히히힝―.

마차를 끌던 두 마리의 말은 입에서 거품을 물면서 다리에 더 힘을 주었다.

“둘러싸라! 연환패왕진(連環覇王陣)을 펼쳐!”

팽자겸의 지시 아래 팽가의 사내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그때쯤엔 석지관도 볼 수 있을 만큼 주변을 둘러싼 흑시군들이 가까이 와 있었지만, 그들은 이상하리만큼 싸움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

“이놈!”

후우웅―.

맹호도객 두 명이 선명한 도기를 뿜어내며 동시에 상체와 하체를 노리고 비스듬하게 공격해 들어갔다.

선명한 기(氣)는 일류를 넘어섰다는 증거.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공격이 들어갔으나 거한은 그를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저 마차만을 바라보며 강하게 발을 굴렀다.

쿵.

가벼운 발 구름이었으나 그 여파는 가볍지 않았다.

쿠구구구구―.

“뭐야!”

“지진?”

경악에 가득 찬 비명과 경호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땅바닥이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파도치듯 울렁거리고 있었다.

일시적인 현상이었고, 그 후엔 원래대로 돌아갔지만 사람이 도저히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땅을 뒤흔들던 그 느낌은 몸서리치도록 선명했다. 그건 분명 진짜 발밑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거한의 두 눈과 가슴 한가운데에서 지옥의 악귀처럼 시뻘건 빛이 흘러나왔다.

그는 하체를 노려 공격하던 칼을 발바닥으로 짓밟았다.

상체를 노려 베어 오던 사내는 왼 주먹으로 망치로 내리치듯 내리쳐서 팔목을 꺾어 버렸다.

까가강―.

“커헉!”

무시무시한 패기가 뿜어졌다.

팽가의 연환패왕진은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흔들리는 바람에 연계가 깨진 상태였다.

쿵.

다시 한 번 땅이 진동했다.

거한은 주저앉는 것처럼 완전히 양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가 멀리뛰기를 하듯 펄쩍 뛰어 다리 쪽으로 뛰어 날아갔다.

후우우웅―.

미친 듯이 말을 달린 마차는 이제 겨우 다리의 초입에 발을 걸치는 중이었다.

포탄처럼 날아간 거구의 사내는 마차의 뒤꽁무니에 달라붙듯 양손으로 마차의 끝단을 붙잡았다.

콰직!

끼기기긱―.

충격이 얼마나 강했는지 마차가 뒤로 뒤집어질 것처럼 휘청거렸다.

“으아아악!”

마부가 비명을 지르고 말들은 깜짝 놀라서 더더욱 빨리 도망치기 위해 미친 듯이 움직였다.

마차의 바퀴가 바닥에서 헛돌았다.

말은 앞으로 가려고 하지만, 뒤에서 짓누르는 힘이 너무 강했다.

단단한 돌다리를 파고들 것처럼 짓눌리던 마차바퀴가 결국 견디지 못하고 바큇살부터 투두둑 터져 나갔다.

콰드드득―.

거구의 사내는 그야말로 괴물이었다.

그는 양손으로 마차를 반쯤 들어 올려 옆으로 내던졌다.

히히히힝―.

말들은 구슬픈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함께 날아갔다.

뒤집힌 마차는 두 바퀴 반을 구르며 돌다리를 헤매다가 당장이라도 강물에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몸을 걸쳤다.

“으아아악―!”

마차가 옆으로 넘어질 때, 가장 먼저 날아간 마부가 빠르게 흐르는 강물에 휩쓸려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말들은 다리가 부러져 피거품을 토해 냈다.

끼긱― 끼긱―.

박살 난 바큇살이 허무하게 제자리에서 헛돌았다.

처참한 광경.

무지막지한 괴력을 선보인 사내는 뒤집힌 마차의 문을 한 손으로 뜯어냈다.

쒜에엑―.

그 순간 안에서 번뜩인 칼날이 사내의 턱밑을 노리고 쏘아 올라왔다.

턱.

사내는 석지관의 호위병이 찌른 검을 아무렇지도 않게 맨손으로 덥석 붙잡았다.

칼날이 부러지는 것과 동시에 호위병의 오른손이 진흙처럼 우그러졌다.

“끄아아아!”

호위병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고통 속에서도 왼쪽 정권으로 몸통을 후려치며 끝까지 용맹하게 싸웠지만, 근본적인 능력의 차이가 너무나 뚜렷했다.

사내는 씩 웃더니 자신의 이마로 호위병의 안면을 후려쳤다.

뻐억―.

거센 박치기 일격에 호위병의 움직임이 뚝 끊겼다.

단박에 박살 나서 알아볼 수 없게 된 얼굴, 부러진 이빨 사이로 피거품이 흘러나왔다. 그는 양손으로 호위병의 몸을 붙잡고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그만……!”

그때, 머리는 산발이 된 채 이마에 한줄기 피를 흘리던 석지관이 마차의 밖으로 나오며 소리쳤다.

거구의 사내는 짐승 같은 안광으로 석지관을 응시하면서 자신의 양손에 힘을 줬다.

콰드드득―.

우지직―.

섬뜩한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뜯어지고, 부서지고, 박살 났다.

거구의 사내와 석지관의 사이에서 시뻘겋고 거뭇한 핏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살면서 웬만한 것들은 모두 경험했다고 자부하던 석지관이 안색이 창백해진 채 토를 하고 싶어질 정도로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그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황급히 쫓아오던 팽가의 무인들도.

거상의 행렬, 북경 고위 관료의 사람들 모두 입을 벌린 채 굳어져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석지관은 자신의 눈앞에 거대한 그림자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보통 사람의 세 배는 될 것 같은 커다란 얼굴이 코앞에서 숨을 씨근거리고 있었다.

마치 불길이 눈앞에서 타오르는 듯했다.

뜨거운 숨결이 석지관의 몸으로 뿜어질 때마다, 그는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존재가 사람인지 아니면 사람의 형상을 한 짐승인지 고민하고 있었다.

“내가 흑저요새의 도올이냐고 물었느냐?”

샛노란 눈빛이 석지관의 내면까지 꿰뚫어보는 듯했다.

“그렇다. 이 세상에 넷뿐인 짐승. 그중에서도 가장 강인하고 저돌적인 맹장(猛將). 내가 바로 도올이다.”

파괴적인 마력을 뿜으며 섬뜩한 살기를 토해 내는 도올은 인간이 아닌 듯 이질적인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막강한 힘.

쉽게 찾아보기 힘든 괴이한 성정.

거기에 인간처럼 강한 자존심과 오만함을 갖췄다.

“그렇……군…….”

석지관은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 순간 쾅― 하고 도올이 석지관의 옆으로 발을 뻗어 마차를 걷어찼다.

“컥.”

히히히힝―.

도올을 포위하기 위해 마차의 뒤로 접근하던 팽가의 도객 한 명이 마차와 함께 다리를 부수며 날아가 강물로 떨어졌다.

졸지에 휑한 다리 위에서 홀로 도올과 마주 보게 된 석지관은 미간을 좁힌 채 식은땀을 흘렸다.

주변을 둘러싼 팽가의 도객들은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왜 아니겠는가.

도검불침에 막강한 괴력을 뽐내는 짐승 같은 사내가 눈앞에 있다.

어떤 무공으로 상대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심지어 팽자겸마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이를 악물고 서 있는 모습을 보며 석지관은 자신의 최후를 예감했다.

죽이든, 살리든, 자신의 명운은 이제 이 짐승 같은 사내의 뜻에 달려 있으리라.

석지관이 모든 것을 포기하려던 바로 그때, 하늘은 또 한 번 운명의 장난을 보여 주었다.

휘리리릭―.

도올은 어딘가에서 날아온 둥그런 쇠사슬을 굳이 피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털이 숭숭 솟아난 얼굴로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쇠사슬을 한 손으로 잡아챘을 뿐이다.

“흥.”

코웃음 치며 쇠사슬을 잡아당긴 도올은 쇠사슬을 던진 상대가 자신을 향해 날아올 것을 의심치 않았다.

한쪽이 압도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면 반대쪽으로 딸려 오는 것이 당연한 진리 아니던가.

촤르륵―.

“……!”

헌데 쇠사슬의 주인은 그에게 딸려 오지 않았다.

놀란 것은 도올뿐만이 아니었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팽가의 도객들조차 갑자기 나타난 쇠사슬의 주인이 누군가 놀라서 돌아보았다.

그리고 더더욱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본 것처럼 경악하고 말았다.

그곳에는 여인이 있었다.

키가 크고,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덩치가 크긴 했지만, 분명 ‘미인’이라고 부를 만한 적색의 비단 장포를 걸친 여인이 양손으로 쇠사슬을 붙잡은 채 어설프게 미간을 좁히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

천하의 도올조차 당황하는 그 때, 사람들을 더더욱 당혹케 하는 맑고 순수한 목소리가 반대쪽에서 들려왔다.

“다리를 노려야겠어요. 아까 보니 다리를 향한 공격은 피하더라고요.”

하얀색 비단 장포와 멋들어진 영웅건을 걸친 청년이 그곳에서 빙긋 웃음을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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