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권 16화
제26장 신흉도올(新凶檮杌) (12)
단순한 검기(劍氣)라고 하기엔 좀 더 신비롭고 은은하며, 촘촘하고 강인한 기운이었다.
소호는 호흡을 가라앉혔다.
고요한 호수.
깊은 동굴 속 호수에서 느끼는 지극한 적막감.
소호의 마음속은 그와 같은 명경지수(明鏡止水)의 차분함을 유지했다. 주변의 모든 것을 관조하듯 멀리서 ‘느끼지만’, 한편으론 눈앞의 도올을 솜털 하나의 움직임까지 면밀하게 관찰했다.
그는 어디로 갈 것인가?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
지금 도올의 팔은 길이가 얼마고, 다리를 뻗으면 어디까지 올 것인가?
그 모든 것들이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얽히다가 한순간에 커다란 폭발을 일으키듯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그러자 평화가 찾아왔다.
고오오오―.
소호는 자신의 몸에서 은은한 후광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지금 자신의 몸이, 그 어느 때보다도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만 인지할 뿐이다.
불문(佛門)의 비기.
역근경의 조화였다.
단전에서 솟구친 반 갑자의 내공이 소호의 온몸으로 퍼져 옅은 피막을 형성했다. 육체의 힘과 내공의 조화가 절묘했다. 마치 잔에서 흘러넘치기 직전의 물처럼 완벽한 균형을 이뤄 낸 것이다.
‘도올은 실전을 많이 겪었어. 강해. 육체적으로도 압도적이야. 그런데…… 허점은 있어. 무공은 완숙하지 못해.’
소호는 두 눈에서도 황금빛 서기를 흘려내기 시작했다.
그는 냉철하게 도올의 능력을 꿰뚫어 보았다.
“그아아아아아―!”
도올은 성난 멧돼지처럼 포효했다.
난폭하고 강맹하여, 그 누구도 정면으로 상대할 수 없을 것 같은 기세다.
파캉!
결국 쇠사슬이 터져 나가며 도올이라는 짐승은 족쇄가 풀려 버렸다.
어둡고 육중한 그림자가 소호를 무자비하게 덮쳐 왔다.
‘벤다.’
대명률을 어긴 범법자.
민초들을 괴롭히는 무소불위의 악당.
왕 태감의 수족으로서 수많은 무인들을 죽인 자.
베어야 할 이유는 무수히 많다.
하지만 지금 소호는 그 모든 것을 잊었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텐챠이.
범천 스님의 일격만을 떠올렸다.
칼끝으로 하늘 위를 가리키며 천단(天壇)을 쌓고.
대지에 굳건히 박아 넣은 양발로 지당(地堂)을 세운다.
바람에 흔들리는 드넓은 초원을 상상하며 그 안에 몸을 맡긴다.
투로(鬪路)는 그저 천단과 지당을 이을 뿐.
한순간에 떨어지는 일도양단(一刀兩斷).
전뇌 같은 일격!
“……!”
서걱―.
섬뜩한 소리와 함께 도올의 몸이 움찔― 흔들렸다.
찰나의 순간 두 사람이 교차했다.
육중한 거체(巨體)가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다가 공연히 석조다리의 주춧돌 중 하나를 들이받았다.
소호의 안면을 잡아 비틀려던 용조수(龍爪手)는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한 치의 오차.
소호의 머리 위 한 치를 스쳐 지나갔을 뿐인데도, 머리를 묶고 있던 영웅건이 터지듯이 폭발했다.
겨우 멈춰선 도올의 가슴에서, 왼쪽 쇄골에서 우측 골반까지 이어지는 비스듬한 선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대체 뭐냐……?”
푸화악!
피륙이 갈라지고, 커다란 자상에서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도올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가슴의 상처를 오른손으로 틀어막았다.
“어째서 호신기(護身氣)가 뚫렸지?”
마치 상처 입은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했다.
“이유가 뭐냐! 대체 왜! 그 황금 기운은 뭐지? 어떻게 호신기를 뚫었냐는 말이다!”
심맥을 다칠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었지만, 도올은 피를 토하면서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는 평정을 잃고 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일인전승의 무공인 명왕호신공(冥王護身功)을 익힌 이후로, 그는 지금껏 단 한 번도 호신기가 보호하는 곳에 상처를 입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뚫렸다.
그것도 한참 어린 애송이 청년 한 명에게.
“후우우…….”
소호는 그저 호흡을 가다듬는 데 최선을 다했다.
도올의 말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영웅건이 터져 버리는 바람에 흘러내린 머리가 거추장스러울 지경이다.
‘무슨 놈의 무공이, 내공 소모가 이렇게나……?’
소호는 숨을 헐떡이려는 것을 참기 위해 사력을 다해야만 했다. 목 뒤는 이미 식은땀으로 젖어서 축축해져 있었다.
방금 전의 일격은 그가 생각해도 완벽하게 따라했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그에 따른 내공 소모가 너무나 컸다.
원래 자신의 경지 이상의 무공을 사용하면 그 대가는 훨씬 큰 법.
하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내공 소모가 커도 너무 컸다.
평생을 단련해서 만들어 둔 역근경 반 갑자 내공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껍데기만 남았다.
찰랑찰랑하게 가득 차 있던 내공이 물 잔의 바닥만 살짝 적실 정도로 말라붙어 버린 것이다.
‘큰일인데. 진짜 위험해졌어.’
긴장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서 소호는 최대한 평온한 모습으로 호흡을 반복했다.
상처 입은 짐승과 내공을 다 써 버린 천재.
두 존재가 서로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대단하군……!”
“도검불침의 괴물이 저렇게 큰 상처를 입다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팽가의 사람들은 속수무책 아니었던가?”
“쉿! 이 사람 말조심하게. 그들이 문제가 아니라 저자가 너무 강한 거야. 천무공자가 많이 뛰어난 것이고.”
“그렇군. 대단해. 저게 천무공자의 무공이란 말인가?”
“소문이 틀리지 않았군.”
“오히려 모자라. 저렇게나 강했다니.”
상인들과 관리들은 세간에 퍼진 무산학관 천무공자에 대한 소문이 전혀 과장되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 머릿속에 새기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이럴 수가……!”
충격을 받은 것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싸움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 중에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건 누가 뭐래도 팽자겸과 팽가의 도객들일 것이다.
하북팽가라 하면 도.
도(刀)라고 하면 하북팽가.
이는 무림 강호에서 이미 진리처럼 굳어져 있지 않던가.
그런데 오늘 그들은 그들의 인지를 벗어나는 천외천(天外天)의 도법을 보고 말았다.
그 일격.
눈에 새겨 넣어서 평생 따라하고 싶어지는 그 도법은, 도객들에게 있어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을 맞은 것만큼이나 큰 충격이었다.
간결하면서 강력.
단순한 듯하면서도 그 안에 세상의 이치를 다 담은 듯한 현묘한 자연경의 무공.
“이런 충격……. 태사부이신 도신(刀神) 팽원 님의 오호단문도 이후로 처음 겪는다. 천무공자여. 저건 도대체 무슨 무공인가. 대체 어떤 도법이기에 저렇게나 높은 경지에 올랐는가?”
책상머리에서 글만 쓰는 자들이 현실을 모르듯.
피비린내 나는 싸움터를 전전하며 도(刀)의 극의를 이루지 못하면 저런 도법은 나올 수가 없는 법이다.
소호가 그저 누군가의 도법을 따라했을 뿐이라는 것을 모르는 팽자겸은, 대체 천무공자가 저렇게 어린 나이에 어디서 저런 수준 높은 도법을 익혔는지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팽자겸은 다른 걸 다 제쳐 두고라도 지금 당장 천무공자를 데려다가 도법에 대해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일단은…… 이 싸움이 우선이다.”
팽자겸은 자신의 욕망을 가라앉혔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설레발도 정도가 있지.
아직 도올이라는 막강한 적은 쓰러지지 않았다.
쓰러지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가슴의 상처 따위는 그저 생채기에 불과하다는 듯 더더욱 위험천만한 기세를 뿜어내는 중이다.
심지어 팽자겸에게는 지금 이대로 뒀다가는 평생 자괴감에 휩싸일 만한 실책도 하나 있다.
조금 전, 팽가의 도객들이 얻어맞고, 강물로 튕겨져 나가며 목숨을 걸고 싸우는 동안 단 한 번도 도올에게 검을 휘둘러 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연환패왕진을 지휘해야 한다는 변명거리가 있긴 하다.
함부로 나서다가 당하느니, 최후에 나설 시점을 기다렸다는 이유도 있다.
하지만 어찌됐든 같은 팽가의 형제이자 동료들이 당하는 동안 그는 손 놓고 있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던 못난 무인이었다.
도저히 이길 수 있는 방도가 보이지 않기에.
대국적인 판단이라는 변명하에 싸움을 피해 온 수치심이 가슴에 진하게 남았다.
“이것만은 해낸다.”
팽자겸은 의지를 더욱 강하게 다지며 형제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석 대인을 안쪽으로 모셔라! 언제든 천무공자를 도울 준비를 해 둬. 저 괴물 놈을 절대 도망치게 둬선 안 된다. 천무공자 덕분에 아까 보지 않았나? 하체다. 틈이 보이면 하체를 노려라.”
훌륭한 도법을 보고, 싸움의 자세에 있어서도 자존심이 상한 것은 팽자겸만이 아닌 바.
팽가의 맹호도객들은 제각각 강인한 의지를 마음속에 세우며 맹수처럼 이를 드러냈다.
“야, 야. 저거 위험한 거 아냐?”
“도올 대장 몸에 상처 나는 건 처음 봤는데, 도우러 가야 하나?”
“아서라. 예전에 괜히 도와줘서 잘 보이려다가 반죽음 당했던 놈 기억 안 나? 그냥 놔둬. 저 사람은…… 괴물이야.”
주마강의 다리가 선명하게 보이는 숲속에서 대기하고 있던 오십 명의 흑시군은 자기들끼리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처음에는 도올 대장이 얼마나 빨리 호위들을 죽이고 석지관을 잡아올지 내기를 하는 게 대부분이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두 사람 때문에 어느새 분위기가 바뀌어 도올을 걱정해야 하는 순간까지 온 것이다.
“그래도 대장이 가슴까지 베인 건 처음인 것 같은데?”
“그래. 웬만한 공격은 맨손으로 쳐 내 버리는 사람이 저렇게나 피를 뿜다니…….”
“강호는 넓구나. 기인이사들이 모래알처럼 널려 있다는 게 허언이 아니었어. 아까 봤냐? 대장의 붉은색 호신기가 황금색 기운을 만나니 사그라지면서 뚫려 버리는 거?”
“그래. 봤다. 저 화려하게 입은 놈 대단한 놈 같아.”
“이러다가 도올 대장이 당하면 우리 큰일 나는 거 아니냐?”
“만약에 그러면 우린 본대(本隊)로 소환되겠지. 도철 대장이 있는 거기로…….”
강호 무림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아귀(餓鬼)들처럼 소문이 낫지만, 흑시군도 엄연히 사람이었다.
그들도 힘들고 어렵고 두려운 일은 싫어한다.
마침내 그들의 불안이 점점 강해져서 이대로 두고 봐선 안 된다는 이야기가 나올 때쯤이었다.
“가자. 일단 포위만이라도 하자고.”
“그래. 싸움에 방해만 안 하면 되겠지.”
“가자. 일단 가 보…….”
피슈슈슉―.
“적습! 적습이다!”
갑자기 허공에서 뚝 떨어진 단검이 흑시군의 발밑에 일자로 주르륵 박혔다.
그 수는 무려 스무 개.
스무 개의 단검이 기척도 없이 나타나 견제하듯 그들을 가로막은 것이다.
“대형을 갖춰!”
“방패를 들어라! 암습이다!”
그들은 방패를 들고 이어질 공격에 대비했으나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침묵을 참지 못한 한 명이 앞으로 나가 보려고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십여 개의 단검이 위협적으로 날아들었다.
까가강!
단검은 방패에 맞고 튕겨졌으나 이걸로 인해 그들을 노리는 자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건 확실해져 버렸다.
흑시군은 방패를 든 채 지극히 방어적으로 변해 조심스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적이 몇 명이나 되는지. 열 명인지 스무 명인지 서로 토론을 할 뿐 흑시군은 제자리에서 발이 묶여 버렸다.
그들은 몰랐다.
섭주해라는 한 청년이, 검령과 소통하여 어검(御劍)의 비술을 쓸 수 있다는 것을.
그걸 응용하여 홀로 그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다.
***
소호는 다시 한 번 명경지수의 마음을 유지하며 칼끝으로 도올의 명치를 겨누었다.
내공이 바닥나 아까와 똑같은 도격을 내리칠 수는 없었지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도올에겐 견제의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도올은 자그마한 눈을 더욱 가늘게 뜨면서 소호의 저력을 가늠했다.
그러다 한순간.
분위기가 변했다.
전신에 힘을 줘서 출혈을 막아 버리는 도올.
그가 다시 한 번 달려드는 그 순간.
“이얍!”
귀여운 기합성과 함께 다리를 지탱하던 주춧돌 중의 하나가 위로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