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권 18화
제26장 신흉도올(新凶檮杌) (14)
소호는 과거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풍운객잔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어린 시절.
아버지의 옷자락을 잡아채면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었던 사소한 ‘내기’가 있었다.
열 살의 꼬마 소호는 또래 중에 몸놀림이 제일 빨랐지만, 안타깝게도 소호의 아버지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당연히 하늘 같은 아버지를 붙잡는 건 불가능했고, 소호는 특별한 동작으로 아버지를 붙잡기 위해 갖은 고심을 할 때의 일이다.
열흘간이나 준비한 필살의 일격을 날린 뒤, 실패해서 바닥에 널브러진 소호를 향해 아버지는 이렇게 말해 주었다.
“큰 칼은 큰 허점을 만드는 법이다.”
그때 아버지가 해 준 담담한 한 마디는, 소호가 나이가 들수록 계속해서 곱씹어 보게 되는 마음속의 화두(話頭)가 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소호는 이야기 속 괴물처럼 막강한 대적을 눈앞에 두고, 아버지의 격언을 떠올리며 행동 방침을 정했다.
‘큰 칼은 안 돼. 작게. 나답게. 나다운 움직임을 해야 해.’
소호가 ‘나다운’ 일을 하겠다고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재밌게도 아버지가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얼마 전에 만난 범천 스님의 무공이 떠올랐다.
그때 소호가 어떻게 칼을 빼앗겼던가?
내리치려던 칼을 갑자기 부드럽게 반전시켜 위로 쳐올리던 그 일격 때문 아니던가.
“챠핫!”
소호는 낭랑한 기합성을 내지르며 허공에서 몸을 비틀었다. 올려치던 칼이 다시 반대로 아래를 향해 떨어진다.
“……!”
당연히 황금색의 기운을 끌어올려 공격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도올은 갑자기 변해 버린 공격에 반응하지 못했다.
아래에서 솟구치는 칼을 막기 위해 손바닥을 내민 자세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소호의 칼은 강력한 호신기에 덮여 있는 도올의 양팔을 스치듯이 지나치며 아래로 내려갔다.
그 동작은 부드러운 태극권 같기도 했고, 나무를 타고 오르는 뱀처럼 섬뜩한 사파의 사혈검법(蛇血劍法) 같기도 했다.
투툭―.
촤아악―!
왼쪽 다리를 쭉 펴고, 오른쪽 다리를 최대한 굽혀 몸을 낮춘 채, 소호의 칼날이 도올의 좌측 허벅지를 베어 냈다.
넝마 같은 옷자락이 예리하게 잘려 나가고, 갈라진 피부에서 피가 솟구쳐 올랐다.
깊은 상처는 아니었다.
피륙만 갈라졌을 뿐이지만, 그래도 도올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그는 금강불괴(金剛不壞)의 철인(鐵人)이 아니다.
호신기가 보호해 주지 않는 하체는 일반 사람보다 조금 더 크고 살 거죽이 질긴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놈……?”
도올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단순하고 과격하게 행동하길 좋아하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거기에 자신의 싸움과 관련된 일이라면 눈치도 빠른 편이었다.
도올은 자그마한 눈을 데구루루 굴려 소호를 계속 바라봤다.
소호의 신묘한 움직임은 재빠르고 유연하여 도올을 화나게 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왜 비기를 사용하지 않는가?
대체 왜 황금색 기운을 써서 팔을 자르려 들지 않는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호신기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무공이 있는데 굳이 사용을 하지 않는다?
도올을 우습게 봐서 일부러 힘을 봉인하고 싸우는 게 아니라면,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그 무공, 함부로 쓸 수 없는 거군.”
도올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커다란 얼굴, 털이 수북한 짐승 같은 얼굴 위로 야생동물 같은 송곳니가 살짝 드러났다.
“크크크큭!”
도올은 웃음을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크카카카캇!”
도올은 박수까지 치면서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그는 가슴과 허벅지에 새겨진 자상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소호는 빈틈을 놓치지 않고 달려들어 계속해서 공격을 이어 나갔다.
발목 언저리와 좌측 허벅지를 집요하게 노리는 소호의 공격은 상대하기 까다로울 수밖에 없을 터다.
후웅―.
도올은 크게 뒤로 뛰어서 물러났다. 소호가 비조처럼 날아올라 칼을 내리쳤지만 이번엔 도올이 겁내지 않고 팔을 뻗어 한 손으로 후려쳤다.
까앙―!
소호의 몸이 휘청 흔들렸다.
도올이 후려친 힘이 너무 강해서 박도가 부러질 뻔했다.
“흐하핫!”
도올은 크게 웃으며 강하게 발을 굴렀다.
소호의 발밑이 울렁거렸다.
비가 온 다음 날의 진창처럼, 물컹거리며 튀어 오른 흙덩어리들이 소호를 노리는 땅속의 망자(亡者)들처럼 손을 뻗어 왔다.
“어딜!”
파라락―.
소호가 가볍게 몸을 날려 피하는 순간, 도올은 기다렸다는 듯이 육탄 돌격을 강행했다.
양팔을 쭉 뻗은 채 코끼리처럼 달려드는 거구의 육신은 그 자체로 자연재해 같은 위압감을 뿜어냈다.
발밑에서 질척거리는 흙은 도올의 걸음에는 전혀 방해를 하지 않았다.
반면에 소호는 흙에 닿으면 붙잡혀 버리니 불리하기 그지없는 싸움이다.
“흠!”
소호는 옆으로 피하려다가, 어떤 생각에서인지 오히려 도올을 향해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도올이 이빨을 드러냈다.
소호도 웃었다.
도올의 손바닥이 소호의 머리에 닿기 직전, 그는 옆에서 달려든 붉은색 잔상에 치여 버렸다.
쾅!
거세게 달려와 힘차게 진각을 내딛는 대미미에게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몸을 반 바퀴 돌려 어깨의 일부와 등으로 상대방을 타격하는 첩산고(貼山靠)가 도올의 좌측 허리를 강타한다.
꾸우웅!
“……!”
대미미가 내딛은 오른발 밑의 석판이 쩍! 하고 갈라지고, 대미미의 고법에 타격당한 도올의 몸이 허공에 붕 떠오르며 옆으로 튕겨졌다.
돌가루에 눈을 당했던 대미미는 오른쪽 눈의 혈관이 다 터져서 벌겋게 변해 있었지만, 그래도 당찬 얼굴로 도올을 응시하며 공격을 가한 것이다.
“오라버니!”
소호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미미와 합류했다.
대미미가 진각을 내딛은 다리를 밟고 뛰어올라 도올을 향해 몸을 날렸다.
허공에서도 소호의 몸은 무공을 사용하기 위해 필요한 정확한 자세를 유지했다.
허리를 낮췄다가 일격에 휘두르는 칼끝에서 바람이 갈라졌다.
쭉 뻗은 칼날이 도올의 몸에 살며시 닿는다.
까가가강!
촤악!
도올의 좌측 허벅지에 또 하나의 자상이 생겨났다.
이번엔 꽤나 깊었다.
동맥을 건드리기라도 한 것일까.
뿜어지는 피의 양이 심상치가 않다.
도올은 그 와중에도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면서도 집요하게 손을 뻗었다.
소호가 몸을 피하려 했지만, 이번만큼은 도올의 손놀림이 더 빨랐다.
새끼손가락 끝에 소호의 넓은 소맷자락이 살짝 걸려 버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저 소맷자락을 붙잡힌 걸로 끝날 일이지만, 도올의 왼손은 달랐다.
그저 새끼손가락 하나 걸렸을 뿐이라도 치명적인 상세로 이어질 방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새끼!”
거구의 괴물이 몸을 뒤틀었다.
소호는 낚싯대에 붙잡힌 잉어처럼 허공으로 끌려간 뒤에 바닥의 석판 위로 거세게 처박혔다.
콰앙!
소호가 처박힌 석판이 갈라지고, 도올은 그대로 삼 장(丈) 가까이 튕겨 나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오라버니!”
대미미는 놀라서 소호를 부르긴 했지만, 달려가진 않았다.
소호를 믿었기 때문이다.
낙법을 취해 충격을 경감시킨 소호는 바닥을 한 바퀴 굴러서 다시 두 발로 일어섰다.
충격을 경감시켰음에도 소호의 꼴은 처참했다.
머리가 산발이 되고, 얼굴과 팔에 생채기가 생겼다. 손가락이 부러졌는지 왼손의 검지가 말을 잘 듣지 않았다.
코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소호는 부끄러운 듯, 조용히 아무렇지도 않게 코피를 닦아 냈다.
“감히!”
도올은 괴성을 지르며 바닥에서 다시 일어섰다.
대미미에게 밀려서 넘어진 게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그는 분기탱천하여 쿵쿵거리는 걸음으로 점점 소호와 대미미를 향해 다가오려 했다.
“크합!”
그때 마침 주변에 있던 팽가의 맹호도객이 도올의 하체를 노리고 칼을 휘둘렀다.
도올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손바닥을 휘둘러 맹호도객의 칼을 부러뜨렸다.
콰창! 하고 자신의 칼이 부러지는 것을 목격한 맹호도객은 충격에서 빠져나오질 못했다.
어째서 안 되는가?
소호와 대미미는 어린 나이에도 저렇게 잘 싸워 도올의 몸에 상처를 남기는데 그는 어째서 한 낱 피륙에도 상처를 입히지 못하는가.
그와 함께 있던 다른 맹호도객 두 사람도 합류해 그를 도와주려했다.
날카롭고 거세며, 물러설 줄 모르는 팽가의 무공이 펼쳐졌다.
그들은 수많은 실전 경험을 토대로 도올의 발을 묶으려 했지만 도올은 땅을 흔드는 진각과 몇 번의 정권(正拳)만으로도 그들을 속수무책으로 쓰러뜨려 버렸다.
상처를 입긴 했으나 도올은 여전히 거대한 괴물이었다.
팽자겸도 앞으로 나섰다.
다른 맹호도객들보다 한 수 높은 무공으로 도올을 압박했지만, 도올은 여전히 그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가 노려보는 것은 오로지 소호, 그리고 대미미였다.
“벌레 같은 것들!”
도올은 자꾸만 자신을 방해하는 팽가의 도객들에 분노하며 발을 구르고 몸을 낮춰서 돌다리의 석판을 뽑아 들었다.
“피, 피해!”
“날아온다!”
후우우웅―.
쾅!
거세게 날아든 석판이 아슬아슬하게 팽가의 도객들을 스치고 지나간 뒤 다리의 한쪽 손잡이를 박살 내며 강바닥에 처박혔다.
“우오오오―!”
도올은 짐승 같은 괴성을 질렀다.
그는 달려드는 맹호도객의 옷자락을 잡아챘다.
한 손으로 건장한 무인을 들어 올린 뒤, 옆에서 달려드는 다른 도객에게 집어 던졌다.
쾅!
맹호도객들은 몸과 몸이 부딪치면서 팔다리가 꺾이는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
도올은 이번엔 석판이 사라진 바닥에 양손을 푹― 하고 박아 넣었다.
단단하게 흙을 굳혀 만든 다리였지만, 도올이 손을 대면 마치 진흙처럼 물컹하게 변해 버렸다.
그 안에서 무언가를 붙잡은 도올은 처음으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도록 힘을 썼다.
굽혀진 허리.
한껏 부풀어 오른 허벅지의 근육이 강력한 힘을 뽑아냈다.
구구구구―.
다리가 흔들리면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도올은 자신의 키보다 더 큰 커다란 나무 기둥을 바닥에서 뽑아내고 있었다.
다리를 떠받치던 기둥 중의 하나를, 다리 위에서 맨손으로 뽑아낸 것이다.
모두가 경악에 휩싸인 채 중얼거렸다.
“저럴 수가 있나!”
“믿기지가 않는다……!”
“저게 정말로 인간인가.”
도올은 짐승처럼 포효했다.
“어딜 기어오르나! 내가! 이 몸이! 사흉의 도올이다아아!”
강물 속의 수초들과 자잘한 조개들, 물때의 흔적이 선명한 통나무 기둥이 마치 손오공의 거대한 곤봉처럼 도객들을 휩쓸었다.
“피해라!”
“뒤로 물러나!”
팽가의 도객들은 속수무책으로 물러섰다.
압도적인 힘.
거기엔 어떠한 무공도 소용이 없었다.
도올의 괴력을 막을 수 있는 건 단 한 사람뿐이다.
반사적으로 달려든 것은 당연하지만 대미미뿐이었다.
“계집. 까불지 마라!”
천하의 대미미가 발이 질질 끌리면서 밀려나고 있었다.
도올은 붉은색 패기를 뿜어냈다.
짙은 아지랑이처럼 뿜어지는 살기가 세상을 덮을 듯이 충천하고 있었다.
‘합격술은 어려운데.’
지금껏 어떠한 무공도 어렵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소호였지만, 그런 그에게도 약점이 하나 있으니.
그게 바로 다른 사람들과 호흡을 맞추는 합격술이다.
그렇기에 아까부터 대미미와 효율적으로 연계하지 못하고 망설였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로 망설일 여유가 없었다.
소호는 대미미가 통나무를 붙잡은 사이에, 그 틈새로 용맹하게 달려드는 팽자겸을 진지한 눈빛으로 뚫어져라 응시했다.
소호는 ‘팽가의 도법’을 진지하게 분석했다.
팽자겸은 어기신풍(御氣神風)을 이용한 움직임과 건곤연환탈백도(乾坤連環奪魄刀)를 응용한 공격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있었다.
소호는 팽자겸의 움직임.
호흡.
발을 내딛는 흐름을 유심히 주목했다.
“미미야, 간다!”
대미미는 왜 그러냐거나, 어떤 계획을 지니고 있냐는 흔한 질문도 던지지 않았다.
그저 한없는 신뢰의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여 줄 뿐이다.
소호는 달려 나갔다.
도올이 기다렸다는 듯이 이를 드러냈다.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내면서 허리에 낀 채 휘두르던 통나무를 소호를 향해 휘두르려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