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44화 (373/686)

10권 19화

제26장 신흉도올(新凶檮杌) (15)

콰드득―.

대미미가 물을 머금은 통나무의 끝단을 잡아채자 도올은 더욱 더 힘을 끌어 올렸다. 통나무가 당장이라도 부서질 듯 삐걱거렸다.

소호는 통나무 너머 반대쪽에서 사냥감을 노리는 늑대처럼 달려드는 팽자겸을 발견했다.

그는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내가 먼저 가겠다.

죽음을 각오한 결사의 심정이 눈빛만으로도 분명히 전해졌다.

그는 소호와 다르다.

절대적인 거리감을 가진 것도 아니며, 도올의 공격을 다 피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드는 것은 웬만한 용기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닐 터.

‘함께 간다.’

소호는 팽자겸과 시선을 마주치며 거의 동시에 도올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팽자겸의 건곤연환탈백도가 도올의 발목을 노리는 그 순간에, 그와 똑같은 자세, 똑같은 움직임으로 도올의 반대쪽 발목을 함께 노렸다.

“……!”

도올이 코웃음 치며 잡고 있던 통나무를 아래로 내리쳤다.

반대쪽은 대미미가 꽉 붙들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지렛대처럼 내리치는 것에 힘을 쏟아부을 수 있었다.

콰아앙!

다리의 일부분이 박살 나면서 거대한 충격파를 주변으로 뿜어냈다.

도올의 발목을 베어 내기 직전이었던 팽자겸의 칼이 통나무에 찍혀서 원형을 알 수 없을 만큼 휘어 버렸다.

‘이자, 무공에 무지한 게 아니었어. 가장 완벽한 순간에 통나무를 내리쳤어.’

소호는 속으로 솔직히 놀랐다.

강한 육체와 막강한 힘이 있으니 대부분의 공격을 무시하고 힘으로 짓누를 뿐, 도올이 무공에 무지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우웅―.

도올이 집중해서 막은 것은 소호였다.

그는 호신기로 뒤덮인 왼손으로 소호의 칼을 막아 냈다.

터엉!

“합!”

피하고, 피하고, 피하고.

칼을 붙잡으려는 도올과 그를 피해 안쪽에 타격을 입히려는 소호의 수 싸움이 순식간에 십여 번이나 교차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감을 완전히 되찾은 도올이 소호의 공격을 대충 몸으로 받으려는 그 순간, 소호의 몸에서 다시 한 번 황금색 기운이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

도올의 반응보다 소호의 일격이 더욱 빨랐다.

어째서일까.

팽자겸의 건곤연환탈백도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범천 스님의 도법은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뤄 냈다.

내리치는 일격.

도올의 상체에 처음과는 반대로 비스듬하게 교차되는 자상이 깊게 새겨졌다.

촤아아악―!

열십(十)자 형태의 상처에서 붉은색 피가 동시에 뿜어졌다.

그 순간 도올의 표정은 말로 형용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분노, 불신, 경악.

온갖 감정들이 뒤섞인 얼굴을 하던 도올에게로 소호의 추가타가 이어졌다.

쒜에엑!

소호가 다시 한 번 발을 내딛으며 도올의 명치 부근을 칼끝으로 강하게 내찌른 것이다.

쩌어엉!

“……!”

황금색 기운으로 옅게 둘러싼 칼이 도올의 가슴을 찌르는 순간, 뭔가 단단하고 매끈한 무언가가 깨지는 것 같은 파공음이 터져 나왔다.

도올은 경악했고 소호는 냉정했다.

사실 지금까지의 싸움은 소호가 노리고 있던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소호의 두 눈은 도올이 가슴에 차고 있을 ‘집혼기’를 정확하게 겨누고 있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찌르기로 그는 집혼기를 절반으로 쪼개 버린 것이다.

고오오오―.

그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도올의 명치 부근에서 붉은빛이 눈이 부실 만큼 폭발적으로 뿜어져 흘러넘쳤다.

“이게 무슨!”

도올은 버럭 소리치더니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그아아아아아!”

가슴과 허벅지에 상처를 입을 때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던 처절한 비명이 주마강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우우우웅―――.

기이이이이이잉―――!

대기가 떨렸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붉은색 빛 무리가 넘실거릴수록 소름 끼치는 음파가 사람들의 귓속으로 파고들어 그들의 심혼을 뒤흔들었다.

개중에 심약한 자는 안색이 하얗게 변한 채 털썩 주저앉기도 했다.

아비규한.

신비하면서도 섬뜩한 불빛은 널리널리 퍼져 나가다가 한순간에 어느 한 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저수지의 제방에 구멍을 냈을 때처럼, 한 곳으로 몰려서 들어가는 빛의 기세가 무시무시했다.

“오라버니……?”

지켜보던 대미미가 통나무를 손에서 놓고 재빨리 그에게로 달려갔다.

비명을 지르는 건 도올만이 아니었다.

소호도 벼락을 맞은 듯이 한 차례 경직되더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자세로 전신을 바들바들 떨었다.

“으윽.”

억눌린 신음이 폐부에서부터 기어 나왔다.

소호는 전신의 감각이 크게 확장된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었다.

시야가 번쩍번쩍 빛나면서 점멸을 반복했다.

코에서는 이제껏 맡아 보지 못했던 온갖 향이 뒤섞여서 머릿속까지 번개가 치는 듯했고, 입에서는 달콤한 꿀을 마시는 것처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계속해서 목을 적셔 주었다.

온통 곤두선 솜털 위로 선선한 바람이 지나가는 느낌이 세세하게 다 느껴졌다.

기묘한 감각이었다.

온 세상과 합일되어 내가 나 자신이 아니게 되어 버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니!”

소호는 졸린 소처럼 눈을 끔뻑거리다가 어느 순간, 눈앞에 붉은색 비단 장포를 입은 미미가 서 있는 것을 알아챘다.

“오라버니!”

귀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입모양과 분위기로 그녀가 자신을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미미?’

소호는 미미에게 대답해 주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그제야 알아챘다.

소호는 양팔을 벌린 채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허공에 모여든 붉은색 빛 무리가 소호의 입과 코를 통해서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

경악도 잠시.

소호와 거의 동시에 정신을 차린 도올에 의해 그 기묘한 상태는 단박에 끊어졌다.

도올은 자신이 목걸이처럼 걸고 있던 집혼기를 들어서 더 이상 힘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입안에 넣고 삼켜 버렸다.

“크으……!”

단단한 쇳덩이를 삼키는 건데도 도올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가 집혼기를 꿀꺽 삼키고 나자, 검붉은 피부 밖으로 핏줄이 우툴두툴 튀어나오며 이상한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는 절박함과 분노로 이성을 잃고 왼손 주먹으로 거칠게 바닥을 내리쳤다.

쾅! 쾅! 쾅!

파편들이 튀어 올랐다. 소호에게로 튀는 파편들은 대미미가 몸으로 막아 주었다.

소호는 칠공으로 들어오는 붉은빛이 끊기는 순간 조금씩 제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몸이 이상했다.

소호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균형을 잡고 싶어도 균형이 잡아지지 않았다.

손가락을 하나 까딱거리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처음 느껴 보는 기묘한 기운들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온몸의 혈도를 미친 듯이 질주하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강도질을 당하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는 무력한 집주인이 된 것만 같았다.

소호는 이를 악물었다.

그가 가진 기운.

역근경 진기를 끌어 올려야 하는데, 조금 전에 너무나 많은 내공을 사용해 버렸다.

“쿨럭!”

소호가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쓴물을 뱉어 내자, 검붉은 핏덩이와 함께 악취가 나는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소호의 눈빛이 흔들렸다.

조금은 개운해졌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은 감각에 휩싸였다.

‘이건 예상 밖인데…….’

집혼기를 부수는 것까지가 오늘의 목표였는데.

거기서 흘러나온 붉은색 기운이 갑자기 소호에게로 흘러들어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이건 문제가 크다.

이럴 생각은 없었다.

당장 섭주해와 상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집혼기를 가진 자가 사흉을 잡을 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라면?

그 사실을 알고 왕진이 사람을 운용하고 있다면?

쿠구궁―.

“크아아아아!”

그때, 도올이 커다란 통나무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려 소호를 향해 정면으로 내리치려 하고 있었다.

저 힘, 저 높이.

도올이 전력으로 내리치면 아무리 미미라도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해……!”

소호의 말을 들은 탓일까.

양팔을 열십자로 겹치면서 내려치는 통나무를 막으려 하던 미미가 소호를 뒤돌아보면서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녀는 소호의 허리를 붙잡고 곧바로 몸을 날렸다.

‘저 사람도 잘 피하네.’

소호는 입을 벌릴 힘도 없는 와중에 팽자겸이 도망치는 모습을 분명히 확인했다.

도올은 소호가 몸을 빼는 것과 거의 동시에 머리 위로 치켜들었던 거대한 통나무를 전력을 다해 아래로 내리쳤다.

콰아아앙!

우르릉―.

무시무시한 굉음과 함께 주마강을 가로지르던 다리가 막강한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박살 나 버렸다.

그동안 싸우면서 입힌 피해가 겹친 탓도 있을 것이다.

미미가 피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올이 전력을 다한 힘은 상상을 초월한 피해를 입히며 다리를 무너뜨렸다.

파편이 튀고, 기둥이 무너졌다.

다리를 지탱하던 목조 기둥과 석판이 일격에 박살 났다. 한낱 사람들과는 상관없이 도도하게 흘러가는 주마강 속으로 다리를 구성하던 모든 것들이 떨어져 잠들었다.

“그아아아아!”

도올도 마찬가지다.

그는 정신이 나가 버린 듯 기묘한 괴성을 내지르면서 통나무를 휘둘렀다.

통나무가 날개라도 된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는 어둡고 깊은 주마강 강물에 빠지는 그 순간까지도 두 손에서 통나무를 놓지 않았다.

“저자는……!”

무너지는 다리의 입구로 돌아와, 대미미에게 몸을 기댄 소호는 흘러가는 강물을 묵묵히 지켜봤다.

모든 사람들이 말을 잃고 강물만 바라보고 있었다.

흑저요새의 괴물.

도올의 존재감은 엄청났다.

당장이라도 강물에서 기어 나와 광기 어린 모습으로 그들을 덮칠 것만 같은 공포감이 들었다.

그렇지만 강물에서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석판도, 통나무 기둥도.

도올의 모습도 한참 동안이나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라버니, 쉬어야 해.”

대미미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절을 불허하는 눈빛으로 소호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맞아. 조금만 쉬어야겠네.”

소호는 대미미를 바라보며 애써 웃었다.

“네가 더 고생했어, 미미야.”

“나야 뭐…….”

“머리는 괜찮아?”

대미미는 그제야 자신이 피를 흘렸던 사실을 깨닫고 손으로 이마를 만져 보았다.

피는 이미 딱지가 굳어져서 흐르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쑥스러운 듯이 웃었다.

“이제 피 안 나.”

“다행이네.”

소호는 대미미의 어깨 너머로 살아남은 팽가의 사람들이 두 사람을 힐끗거리며 다가오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욱신―.

소호는 가슴을 붙잡았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평소엔 자신의 심장이 얼마나 빨리 뛰는지도 파악하고 있는 소호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가 차고 있는 철 요대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심장이 뛰는 속도는 평소의 두 배에 육박했다.

“미미야…….”

“응?”

“지금, 가야 해.”

“어딜?”

소호는 눈을 깜빡거렸다.

동그랗고 새카만 눈동자 주변으로 붉은색 기운과 황금색 기운이 번갈아 가며 일렁거리고 있었다.

“서남쪽…….”

“서남쪽?”

“가자.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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