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권 20화
제26장 신흉도올(新凶檮杌) (16)
“어딜 가겠다고요?”
백설지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그녀는 이태산과 태성천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처음에 출발할 때와 작전이 너무나 달라져 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태산은 차분했고, 옆을 보니 태성천도 고개를 반쯤 돌린 채 자신의 검만 닦고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같은 의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백설지는 그들과 함께 온 흑시군 전체가 당장이라도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침상으로 쓰던 자리를 정리하고, 무기를 다듬고, 언제든 떠날 수 있게 짐을 싸고 있었다.
그게 더 그녀를 화나게 만들었다.
그녀만 빼놓고 모두가 이미 같은 의견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해가 안 돼요. 흑저요새로 바로 쳐들어가면 위험하니까. 유군(遊軍) 형태로 기다리다가 그들이 요새 밖으로 나오면 공격하는 것 아니었나요?”
“원래는 그랬지.”
이태산은 품이 넉넉한 황색 무복을 펄럭이며 근육질의 팔뚝을 꺼내 보였다.
그는 손가락으로 햇볕이 쨍쨍한 하늘을 가리켰다.
“흑저요새로 가야 한다. 지금이 기회야. 하늘이 우리에게 갈 길을 보여 줬다.”
“지금이 왜 기회라는 거죠?”
“조금 전에 들은 이야기인데……. 도올이 요새를 빠져나갔다고 한다. 주마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서 지나가는 행인들을 가로막고 있다더군.”
“……!”
“좌도독이 보낸 사람을 찾는다던데……. 그놈이 할 만한 괴이한 짓이지.”
백설지는 동그랗고 파란 눈동자를 크게 떴다.
“그럼 우리도 지금 당장 그곳으로 가야 하지 않나요? 우린 그 자를 잡기 위해 온 거잖아요.”
“아니.”
이태산은 단호하게 반대의 의견을 밝혔다.
“그를 잡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긴 하지만, 지금 우리가 다리로 향하는 건 불확실한 결과를 낳을 것이다. 그가 사흉의 일원으로 불리는 것에는 이유가 있을 테지. 금강불괴라는 소문도 있고.”
“……겁먹은 건가요?”
“그럴 리가.”
이태산은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냈다.
마음에 둔 여인이 사내의 용기와 능력을 의심한다.
이런 상황에 태연할 수 있는 남자가 어디에 있을까.
그는 미간을 좁힌 채 불편한 심기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난 언제든 그와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 혼자 상대해야 한다면 혼자서라도 싸울 것이다. 다만 왕 태감께서 우리 세 명을 한꺼번에 보낸 것에는 이유가 있겠지. 그걸 무시하고 멋대로 나서는 성정이라면……. 무산학관 출신이라고 말할 자격이 없을 거다.”
단호하면서도 냉랭한 발언에 백설지는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다. 그의 말에 틀린 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군요. 의심해서 미안했어요.”
“……아니, 이쪽도 너무 흥분해서 말했군.”
이태산은 헛기침을 몇 번 한 뒤 말을 이었다.
“아까 말했듯이, 이건 하늘이 준 기회다. 우리는 도올이 없을 때 흑저요새로 가서 흑시군을 ‘포섭’할 수 있게 된 거다.”
“포섭……?”
“도올처럼 괴이한 자는 남들과 어울릴 수 있는 자가 아니다. 아마 권력과 힘으로 짓누르면서 요새를 지배하고 있겠지.”
“그렇겠죠. 아마.”
“그러니 우리의 말이 통할 것이다. 우리에겐 흑시군을 총괄하는 왕 태감의 명령서가 있지. 게다가 그 내용이 도올을 없애는 거라면……. 그들 중에서도 등을 돌리는 자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날 터.”
이태산은 냉철하면서도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말하고 있었다.
‘이 사람, 이런 면도 있구나. 다시 봤어.’
무산학관을 졸업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관문을 통과해야 하고, 그중에는 전술이라든가 대국적인 흐름을 읽는 전략 공부도 해야 했다.
하지만 배운 것을 실제로 적용시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정정당당한 것을 좋아하는 이태산이 계략을 짜서 도올의 목줄을 서서히 옭아매려 하다니. 의외의 일면을 본 기분이었다.
“즉, 그자를 제외한 모두가 그자에게 등을 돌리게 만든다는 거군요?”
“그래. 그게 내 목표다. 홀로 싸울 수 있는 자는 없어. 음식이든 돈이든, 다른 사람의 도움이 있기에 사람은 살아서 숨 쉴 수 있는 거다. 그자가 혼자뿐이라면……. 그저 힘만 센 괴한일 뿐이야.”
백설지는 묵묵히 수긍했다.
그녀는 자신의 고향을 떠올렸다. 척박한 대지, 사시사철 눈보라가 불어오는 땅에서 사냥이라는 건 목숨을 걸고 하는 신성한 행위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흑시군만 포섭한다면?
도올이라는 자를 잡는 데 힘의 강약이 중요하지 않게 된다.
사냥.
모두가 힘을 합쳐서 최선의 결과를 내야 하는 집요하고 철저한 작업이 된다.
“그렇군요. 그럼 결국, 최후에는 우리 셋이 공동으로 그자를 잡는 건가요?”
“……아마도. 하지만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지.”
이태산은 잠시 눈빛이 흔들리다가, 우선 눈앞의 일에 집중하자면서 말을 돌렸다.
“우선은 흑저요새다.”
이태산이 손을 들어 올려 신호하자, 백 명가량의 흑시군은 일제히 대열을 만들고 움직일 준비를 끝마쳤다.
“가자!”
이태산의 호령 아래 그들은 흑저요새로 향했다.
***
“이게 무슨 일이지?”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흑저요새에 있던 흑시군들은 수군대며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흑저요새는 군사적인 입장에서 봐도 꽤나 잘 만들어진 성채였다.
사람의 키의 두 배가 넘는 목책은 통나무를 겹친 뒤에 노끈으로 묶어 세워져 있었고, 목책의 사이에는 밖으로 활과 암기를 쏠 수 있는 틈도 제대로 만들어져 있었다.
흑저요새의 흑시군들은 그 틈새로 화살을 겨눈 채 밖의 인물을 겨누고 있기는 했지만, 그들이 정말로 적인지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저 친구들도 흑시군이잖아.”
“같은 편 아니야? 왜 우리가 이렇게 긴장해야 해?”
그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난번에 명군과 싸운 건 다르다.
그들은 같은 명나라 군대라고 해도 석 도독을 따르는 데다 같은 소속이라는 생각도 없으니 별생각 없이 싸울 수 있었다.
하지만 흑시군은?
그들은 모두 왕 태감의 휘하에 있는 같은 소속의 동료들이 아니었던가?
“멍청한 놈들! 방심하지 마라! 저들은 우릴 처벌하러 왔을지도 모른다!”
도올의 부관인 곽문기가 사방을 뛰어다니며 독려했지만 그 혼자만으로는 병사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기에 부족했다.
그는 평소에 도올의 기행을 잘 중재해 주긴 했지만, 딱히 부하들을 아껴 준다거나 놀랄 만큼 뛰어난 성과를 보여 준 적은 없었던 탓이다.
“처벌이라니. 왜 우릴 처벌해.”
“우리가 죄지었어? 우릴 당당하게 나랏일 하는 군사들 아니었나?”
“죄를 지었다면 우리가 아니겠지. 그분 아냐, 그분?”
흑시군 병사들은 불신과 불만이 가득한 시선으로 곽문기를 힐끔거렸다.
곽문기는 병사들의 분위기를 보고 낭패를 느꼈다.
‘이거 큰일이다. 도올 님이 빨리 돌아오지 못한다면 큰일 나겠구나.’
곽문기가 목책 밖으로 살짝 고개를 내밀자, 백 명가량의 흑시군과 그들의 선두에 서 있는 세 명의 청년들이 보였다.
특히 가장 앞에 서 있는 거구의 청년은 아직 나이가 그리 많지 않은 듯한데도 느껴지는 박력이 심상치가 않았다.
“흑저요새는 문을 열어라! 왕 태감의 전언을 가지고 왔다!”
그가 팔짱을 낀 자세로 외치자 흑저요새 안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요새를 지키던 흑시군 전원이 곽문기를 쳐다봤다.
도올이 없는 지금 이 순간, 결정권은 곽문기에게 있었다.
“크흠!”
곽문기는 얼굴이 벌게진 채 이태산을 향해 소리쳤다.
“그대가 정말로 왕 태감의 전언을 가졌는지 내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소?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으니 내일 다시 오시오!”
“내일 다시 오라?”
“그렇소!”
“그대는 누구인가? 흑저요새의 책임자인가?”
“먼저 본명도 밝히지 않은 무뢰배에게 밝힐 이름은 없소! 게다가 사전에 약속도 없이 이렇게 무작정 찾아오다니. 어찌 이리 무례한가!”
곽문기는 공격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흥분해라. 그러면 대화를 나눌 준비가 안 되어 있다고 하면서 시간을 끌어 주마.’
곽문기는 눈을 번뜩이며 상대방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런가. 실수했군. 인사하지. 나는 왕진 태감의 명으로 흑시군에 배속된 종사(從事) 이태산이오!”
양손을 모아 포권을 취하는 그에게선 당당한 대협의 기세가 흘렀다.
흑시군들이 웅성거리며 곽문기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곽문기는 이를 악물고 마음을 다질 수밖에 없었다.
‘단순한 놈이 아니구나. 큰일이다. 생각대로 안 되겠어.’
곽문기는 요새 위에서 마주 포권을 취해 예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도올 대장의 부관을 맡은 곽문기라고 하오!”
“그런가. 곽 부관. 거두절미하고 말하겠소. 당장 문을 열고 왕진 태감의 전언을 받으시오.”
“……그럴 수 없소.”
“그 이유는 역적 도올이 지금 흑저요새에 없기 때문이오?”
“……!”
곽문기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이태산은 목소리가 커서 흑저요새에서 그의 말을 듣지 못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곽문기는 당황을 감추고 차분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워낙 지닌바 그릇이 크지 않아 내뱉는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역적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나라의 명을 거역하고 하북 땅에서 독자적으로 세력을 길렀으며, 왕진 태감의 마지막 호의를 거절했고, 지금은 나라가 관리하는 주마강의 다리를 마음대로 점거한 채 행패를 부리고 있다. 이게 역적이 아니라면 누가 역적이겠는가!”
이태산은 준엄하게 외친 뒤에 품 안에서 화려한 붉은색 비단 족자를 꺼내 당당하게 펼쳤다.
“흑저요새의 흑시군은 듣거라! 나는 왕 태감의 전언을 가지고 왔다! 오늘로 도올이 가지고 있던 흑시군에서의 권한을 모두 박탈하니 이는 흑시군과 사례감을 통감하시는 왕진 태감의 명이며, 또한 이 나라를 다스리는 존엄하신 황제 폐하의 명이니라. 이를 거스르는 자, 구족을 멸하는 역모로 다스릴 것이다!”
이태산이 말을 마치고 요새 쪽으로 족자를 보여 주자, 그곳에는 왕진 태감을 상징하는 커다란 인장이 찍혀 있는 모습이 명명백백히 드러났다.
요새를 지키던 흑시군들의 술렁임이 커졌다.
그들은 각자 원하는 바가 달랐지만, 한 가지 공통적인 것은 나라의 품 안에서 출세하고 성공하고 싶어 했다. 강호 무림도 오시(傲視)하는 강인한 군대가 흑시군이라고 해서 들어왔는데 이게 무슨 꼴인가.
그들은 역모를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도올이라는 남자는 역모를 저지르면서까지 충성을 바쳐야 할 인물이 못 되지 않던가.
“이럴 수가, 역모라니.”
“안 된다. 이건 할 수 없어.”
“이런 거에 가담해선 안 된다. 우린 흑시군이야.”
흑시군들의 웅성임이 커졌다.
“에이잇! 거짓말이다! 속지 마! 인장은 진짜지만 족자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 알게 뭔가! 그래! 가짜다! 저놈들은 다 가짜야! 속지 마라! 이놈들! 요새를 계속 지키지 않으면 도올 대장이 돌아왔을 때 처벌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곽문기가 마구 소리치며 군사들을 다스리려 했지만, 이제 와서 그래 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었다.
이태산과 곽문기는 척 보기에도 가진바 그릇과 기품이 달라 보였다.
요새 안 병사들의 동요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거기에 이태산이 쐐기를 박았다. 자신이 타고 온 말에서 커다란 쇠곤을 꺼내 바닥을 쿵 내리찍었는데, 그 순간 사위를 제압하는 무시무시한 기세가 흘러나왔다.
“나 이태산! 단언컨대, 역모를 저지르는 자는 절대로 용서치 않을 것이다. 당장 문을 열어라! 너희 중에 역모를 일으키고 싶은 자는 누구인가! 아무도 나서서 문을 열지 않는다는 건 요새 안의 모두가 역모의 죄인이란 소리인가!”
이태산의 목소리는 결국 요새 안의 균형을 깨뜨리고 말았다.
“이게 무슨 짓이냐! 놔라! 놔! 너희들은 하극상이다! 이건 하극상이야! 중벌을 면치 못할 것이…… 억!”
결국 참지 못하고 나선 흑시군의 중견 병사들이 곽문기를 제압하고, 흑저요새의 정문을 연 뒤 이태산과 그 휘하의 흑시군들을 공손히 맞아 주었다.
곽문기는 온몸이 꽁꽁 묶인 뒤에 얻어맞기까지 한 처참한 몰골로 꿇어앉혀졌다.
이태산은 그 앞을 당당히 걸어서 흑저요새에 입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