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46화 (375/686)

10권 21화

제26장 신흉도올(新凶檮杌) (17)

“이놈들! 너희는 도올 님이 돌아오시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후회할 거야! 후회할 거라고오오!”

곽문기의 절규는 공허했다.

실제로 이태산은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았으며, 흑저요새에서 신병들의 교육을 책임지던 등종무라는 자를 대표로 인정하고 그와 대화했다.

“그대들은 죄가 없소. 잘못된 지휘관을 만났을 뿐이니 지금부터 제대로 흑시군으로서 정명(正明)하게 활약하면 될 것이오.”

이태산은 흑저요새의 안이 생각보다 잘 정비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길은 깨끗했고, 숙소로 쓰이는 듯한 건물들도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창고로 보이는 곳에는 쌀 포대가 가득했고 상자 안에는 먹거리로 보이는 야채도 보였다.

어디로 보나 부족함이 없는 모습이다.

주변에 도열해 있는 흑저요새의 흑시군들이 다들 죄지은 강아지처럼 우물쭈물하면서 서 있는 것을 확인했다.

“운용비는 충분했나 보군. 다들 먹거나 입는 건 부족함이 없어 보여.”

등종무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태산이 말로는 용서한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들도 죄가 있다는 것은 하늘도 알고 땅도 아는 일이었다.

백성들의 세금을 수탈한 게 누구던가?

도올이 시킨 일이긴 했지만, 그로 인한 이득을 함께 보는 동안 그를 거부한 자가 있었던가?

등종무는 그래도 교육을 담당하던 자로서 흑시군의 자부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무릎을 꿇으며 결연하게 외쳤다.

“우리 또한 죄가 큽니다. 하지만 종사께서 허락하신다면 전공(戰功)으로 죄를 갚겠습니다.”

“알겠소. 일어나시오.”

이태산은 등종무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를 일으켜 세워 주었다.

“죄를 짓기는 쉬우나 반성을 하는 것은 그보다 열 배는 더 어려운 일이지. 고맙소. 앞으로 흑시군에서 함께 잘해 봅시다.”

“예!”

등종무는 그를 포용해 주는 이태산에게 감격했고, 도올에게서는 느끼지 못했던 큰 그릇을 느낄 수 있었다.

“도올이 지내던 곳은 어디요?”

“이쪽입니다.”

등종무의 안내를 받아 찾아간 곳은 흑저요새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커다란 전각이었다.

움막처럼 생겨서 전혀 화려하진 않았지만 대단히 컸다.

전각이라고는 해도 그저 통나무로 벽과 지붕을 세워 놓은 것이 다인 건물이었다.

“이곳이란 말이오?”

“예.”

이태산은 전각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코끝을 자극하는 불쾌한 냄새를 맡았다.

속을 뒤집어 놓는 듯한 비릿하면서도 불쾌한 냄새.

당장 멀리 떨어지고 싶은 악취가 자신의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시체가 있군.”

이태산의 나직한 말에 등종무는 당황하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이태산의 뒤에서 묵묵히 따라 걷던 두 사람이 입을 열었다.

“시체……. 그것도 한둘이 아니군. 묘한 귀기(鬼氣)가 흐른다. 불결하기도 하고, 안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 곳이야.”

“청소나 관리가 안 되어 있어요. 벌레들이 요동치고 있네요.”

태성천은 전각의 입구에서부터 느껴지는 불결함을 지적했고, 백설지는 전각 주변에서 꿈틀거리며 떼를 지어 움직이는 파리와 개미 같은 온갖 벌레들을 가리켰다.

“이곳엔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 거요?”

“예, 부관이었던 곽문기를 제외하곤 누구도 출입하지 않습니다. 도올 대장…… 아니, 도올의 심기에 거슬리면 상대가 흑시군이라도 가차 없이 죽이기 때문에.”

등종무는 진심으로 공포에 질려 있었다.

지금도 몸서리치게 싫은 듯 눈을 질끈 감고 대답하고 있었다.

“부하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곧바로 죽이다니.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이태산이 혀를 차며 전각 안에 들어가려 하던 그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커다란 물고기가 강물 위로 뛰어오르는 듯한 첨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의 움직임이 굳어졌다.

처음엔 멀리서 들려왔지만, 점점 더 가까워지는 듯했고 첨벙거리는 소리도 더욱 크게 들렸다.

“등 무관, 혹시나 해서 묻겠는데 이곳에 식수는 어떻게 해결하고 있었소?”

“식수는…… 요새 안으로 주마강의 지류가 흐르고 있어서 따로 걱정할 일이 없었습니다.”

“저기 보이는 풀숲 너머에 있소?”

“예. 그렇습니다.”

“그런가. 주마강의 지류인가.”

이태산은 굳은 얼굴로 두꺼운 철곤을 붙잡았다.

스릉―.

태성천이 검을 뽑아 들었고, 백설지는 팔목에 차고 있던 비갑(臂甲)을 좀 더 강하게 조여 맸다.

어느 순간 첨벙거리는 소리가 끝이 났다.

쿵. 쿵.

철퍽. 철퍽.

거대한 무언가가 풀숲을 헤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흡!”

사람이 너무나 놀라면 비명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헛숨을 들이켜며 멍하니 굳어지는 법이다.

폐부부터 싸늘하게 식어 가는 느낌.

그들은 모두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버렸다. 온몸의 털이 곤두선 채 위기의 신호만 거세게 울려 대는 듯한 감각 속에서 세 사람은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최고의 수비 태세를 갖추었다.

몸을 낮추고 병기를 앞으로 겨누었다. 내공을 모조리 끌어 올리는 것은 기본이다. 궁지에 몰린 야생동물처럼 상대방을 극도로 경계하며 주춤주춤 물러섰다.

“이건…… 뭐냐.”

이태산은 생전 처음으로 공포심을 느꼈다.

백설지에게 혼자라도 싸우겠다면서 호언장담을 한 것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풀숲을 헤치고 나온 ‘그것’은 괴물이었다.

이태산과 비슷한 키를 가진 줄 알았는데, 그보다 사람의 머리 하나는 더 큰 거구가 아닌가.

괴물은 피부가 검었고, 옷인지 넝마인지 모를 천 쪼가리로 허리춤과 그 아래만을 아슬아슬하게 가린 채 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꽤나 살이 찐 체격이지만, 뚱뚱하진 않았고 그 속에 감춰진 근육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크게 부풀어 오르며 꿈틀거렸다.

상체의 십자 모양 상처와 허벅지에 몇 개나 새겨진 자잘한 자상들에선 아직도 선홍색 핏물이 조금씩 배어 나오고 있었다.

듣지 않아도 도올이란 자라고 확신했다.

“후우…… 후우…….”

도올의 거친 숨소리가 귓가에 꽂히듯이 파고들었다.

그는 사투(死鬪)를 벌이고 왔다는 것을 온몸으로 내보였다.

쿵.

한 발, 한 발을 내딛는 몸놀림에서 피로가 엿보였다.

“으으음.”

중간중간에 기묘한 신음을 흘리며 몸을 비틀기까지 했다.

그때마다 도올의 전신에서는 혈관이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왔다가, 다시 가라앉으면서 붉은색 기운을 주변에 은은하게 흩뿌리곤 했다.

“지랄같이…… 속이…….”

도올은 피를 토할 듯이 기침을 했다.

“너희는…… 뭐냐.”

그는 털이 수북하게 난 커다란 얼굴로 이태산과 그 뒤의 태성천, 백설지를 번갈아 쳐다봤다.

“저건…… 아는 얼굴인데……. 아니, 됐다…….”

도올은 이성(理性)이 생겼다 사라졌다 반복하는 듯, 눈의 초점이 흐려졌다 맑아지기를 반복했다.

그는 삼인방과 그 곁에 서 있는 등종무를 무시한 채 자신의 전각 안으로 비틀거리며 들어가려했다.

“잠깐! 멈춰라!”

이태산은 처음으로 한 걸음을 크게 옆으로 내디뎌, 도올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도올. 맞나?”

“…….”

“도올이 맞냐고 물었…….”

쩌어어엉!

“컥!”

도올이 귀찮다는 듯이 내지른 정권에 이태산의 철곤은 무력하게 갈지자로 휘어 버렸다.

단순한 주먹질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어마어마한 힘.

막강한 파괴력이 이태산의 몸을 삼 장 밖으로 날려 버렸다.

“괜찮……군…….”

도올은 자신의 주먹을 한 번 들여다본 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태성천과 백설지가 도올을 향해 달려들었다.

치르르릉―.

태성천은 허공에서 다리를 교차하며 온몸의 탄력을 한 곳으로 집중시켰다.

종남파의 대표 검공인 천성쾌검(天星快劍)이었다.

빛살 같은 검격이 정확하게 도올의 목젖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터엉!

“……!”

도올은 자신의 명왕호신공을 뚫지 못한 검을 맨손으로 붙잡았다.

아니, 붙잡으려 했지만 태성천은 황급히 물러서서 검을 빼냈다.

도올은 전각의 처마를 뚝 부러뜨려서 태성천을 향해 던졌다.

태성천은 재빠른 검공으로 날아오는 목재들을 각각 절반으로 자르고 옆으로 피했다.

“괴물인가……!”

태성천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자신이 검으로 찔렀던 도올의 신체 부위를 노려보았다.

도올의 목에는 생채기도 나지 않았다. 전설로만 듣던 금강불괴가 눈앞에 있는 것인가.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우우웅―.

휘리릭!

그사이, 백설지가 도올의 등 뒤로 파고들었다.

답설무흔의 경지에 오른 신법도 뛰어났지만, 그보다는 눈 더미 속에 몸을 숨기듯 은밀하게 기척을 숨기는 실력이 백미(白眉)였다.

“합!”

낭랑한 기합성과 함께 백설지는 양손을 모아 손목과 손목을 교차시켰다.

힘차게 내딛는 오른쪽 진각.

그 후에 내뻗는 우수 장타에서 빙백신기가 새하얀 빛을 번뜩였다.

터엉―!

쩌저적!

“……!”

도올은 얻어맞은 등에서 서리가 끼고 얼어붙기 시작하자 처음으로 놀란 기색을 보였다.

그는 붉은색 기운으로 뒤덮인 주먹으로 얼어붙은 자신의 허리를 쾅쾅 두드렸다.

그러자 겉에만 얼어붙었던 서리가 깨져서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빙백신기가 그거밖에……?”

백설지는 인상을 찌푸리며 양손을 다시 한 번 교차시켰다.

“스읍―.”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이번엔 양손을 모아 한꺼번에 장타를 날렸다.

무산학관에서도 최고라 칭송받던 일 갑자의 내공을 모조리 끌어 올렸다.

―정한중래(貞寒中來) 빙혼결백(氷魂結魄)!

백설지의 금발이 더더욱 밝게 빛나고, 그녀의 두 눈에서 시퍼런 한기가 섬광처럼 빛났다.

북해빙궁의 소공녀.

혈맥을 타고 이어진 극한의 신기(神氣)가 강호 무림에 명성을 떨친 신공의 이름으로 이 순간 다시 현세에 모습을 드러냈다.

터어엉―!

백설지가 전력을 다해 내지른 빙백신장(氷魄神掌)이 순식간에 도올의 커다란 전신을 서리로 뒤덮이게 만들었다.

안 그래도 강물에서 막 빠져나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젖어 있던 도올이다.

순식간에 얼어붙어 얼음 조각상처럼 변해 버린 모습은 사위를 압도하고 충격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대단……!”

지켜보던 등종무가 감탄을 끝까지 내뱉기도 전에, 도올의 몸을 덮어 버린 단단한 얼음이 쩍!하는 소리와 함께 깨져 나갔다.

투두두둑.

“……!”

가장 먼저 깨져 나간 곳은 얼굴, 목, 그 뒤에는 상체를 중심으로 얼음이 터져 나갔다.

스하아아―.

커다란 육신에서 내뿜는 뜨거운 숨이 한겨울에 입김을 불 때처럼 하얀 잔상을 남겼다.

도올의 전신에서 혈관이 불끈 튀어나오는 순간, 붉은색 기운이 넘실거리더니 마침내 그의 육신에선 더 이상 얼어붙은 곳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이자는……!”

백설지는 경악을 감출 수 없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 소호가 해 주었던 경고를 떠올렸다.

“그자는 가면철왕에 버금가는 괴물입니다. 이미 명 제국의 군대와 싸워 지휘관을 죽이기도 했어요. 부디 섣불리 나서지 말고…… 목숨을 보중하길 바랄게요.”

백설지는 소호의 말에 절실히 공감했다.

이자는 괴물이다.

무림 십대고수 중에서도 수위로 꼽히는, 가면철왕에 버금가는 강자가 확실했다.

“명왕호신공이 위험했군……. 넌 뭐냐. 궁기와 무슨 관계냐.”

도올은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맑은 눈으로 백설지를 보더니, 한순간에 몸을 튕겨 그녀에게 돌진했다.

“윽!”

백설지는 최선의 대응을 선보였다.

물러서면서 태극권과 빙백신기를 사용해 도올의 공격을 막으려 한 것이다.

하지만 도올의 힘은 그녀가 흘려서 비껴 내기엔 너무나 막강했고, 왜구를 상대로 쌓은 그의 풍부한 전투 경험은 그녀에게 반격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다.

뻐어억!

파리를 잡아채는 듯한 단순한 일격에 그녀가 팔목에 차고 있던 비구가 박살 나 흩어지고, 새하얀 손목이 부러진 듯 덜렁거렸다.

그녀는 땅바닥을 세 바퀴나 구른 뒤에 벌떡 일어나 방어 자세를 갖췄다.

아득한 고통 속에서 목 뒤에 식은땀이 흘렀지만 우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그녀는 전사.

싸움터에선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것쯤은 세 살 때부터 배워 온 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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