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권 22화
제26장 신흉도올(新凶檮杌) (18)
“태성천! 함께 싸워라!”
그때 일갈을 내지르며 튀어나온 이태산은 휘어졌던 철곤을 아예 반으로 부러뜨려 버린 뒤 쌍곤처럼 휘두르며 도올에게 달려들었다.
태성천도 망설이지 않았다.
날카로운 검을 휘두르는 모습은 그야말로 검객의 표본이다. 그는 좌측에서 달려드는 이태산의 반대쪽에서 미리 연습해 둔 것처럼 능숙하게 합격술을 사용했다.
날렵하게 후려치는 쌍곤과 그 사이를 파고드는 냉철한 검술이 합을 맞춰 도올을 몰아넣었다.
두 사람은 각자 무인으로서의 자존심을 세우지 않았다.
개인의 힘으로 상대를 제압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아챈 것이다. 그들은 비할 바 없는 강적을 만나, 모든 힘을 쏟아부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버러지들.”
도올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두 사람의 분전이 그에게 준 감흥은 그 정도에 불과했다.
양 주먹을 움켜쥔 채 얼굴과 목덜미를 막은 그는 돌진하기 직전의 성난 수소 같았다.
이마와 목덜미에서 혈관이 불끈거린다. 그는 전신에서 뜨거운 열기를 뿜어냈다. 마치 용암처럼 이글거리는 붉은색의 살기 가득한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버러지들아. 잘 들어라.”
쿵!
도올은 발을 구르며 앞으로 튀어나갔다.
“나는! 도올이다!”
그가 맨발로 진각을 내딛고 포효하는 순간 천지가 진동했다.
다섯 개의 발가락으로 움켜쥔 땅이 쩍― 하니 갈라지고, 그가 손으로 붙잡은 칼날은 유리처럼 깨져 나갔다.
헝클어진 머리를 사자의 갈기처럼 휘날리며, 도올은 이태산과 태성천의 공격을 정면으로 맞아 주었다.
***
“쿨럭!”
백설지는 양팔과 늑골 세 개가 모두 부러진 상태로 피가 섞인 기침을 토해 냈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몸속의 진기를 다스리려 노력했다.
자유자재로 움직여야 할 몸속의 빙백신기가 조금도 움직여 주지 않았다. 단전이 깨진 것만 같았다. 그녀의 몸속은 엉망으로 망가져 있었다.
‘말도 안 돼…….’
그녀는 눈앞이 흐릿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태산과 태성천이 전각 근처에 아무렇게나 처박혀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무산학관이 자랑하던 인재들.
찬란하게 빛나던 현무방과 청룡방의 방장들은 이곳에 없다.
그들은 처참한 몰골로 쓰러져 있었다.
이태산이 자랑하던 철곤은 각각 비스듬하게 구부러진 채 묘비처럼 그의 앞에 꽂혀 있었다.
이태산은 한쪽 다리가 부서지고, 왼쪽 어깨가 박살 난 채 고개가 뒤로 젖혀져 있었다.
도올이 이태산의 발을 잡고 장난감처럼 돌바닥에 내리친 탓이다.
그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피를 토한 뒤 일어서지 못했다.
태성천은 더 심했다.
그는 오른손이 뭉개졌다.
수십 번의 검격을 도올의 몸에 격중시킨 뒤, 단 한 번의 실수로 검을 붙잡혀 버렸다.
승부는 그걸로 끝이었다.
검을 들고 있던 손이 검과 함께 으스러졌다.
피와 살점이 검 손잡이를 뼈대 삼아 뭉쳐져 있는 몰골은 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모습이었다.
그때 태성천이 내지르던 비명을 백설지는 귓가에서 떨칠 수가 없었다.
원한이 가득한 귀신의 외침처럼 태성천의 비명은 그 정도로 처절했다.
“맛있겠군. 먹고 싶어……. 하지만 너는 참아야겠지.”
도올은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눈으로 백설지를 바라봤다.
하지만 백설지는 모욕감이 아니라 공포심을 느꼈다.
도올의 욕망은 성욕이 아니라 식욕으로 보였다. 번들거리는 그의 시선도 백설지의 가슴이나 둔부가 아니라 부러져서 힘없이 늘어진 하얀 팔목에 집중되어 있었다. 당장이라도 씹어 먹힐 것 같다는 공포감이 백설지를 잠식했다.
도올은 백설지의 멱살을 잡고 전각안으로 질질 끌고 갔다.
그녀는 반항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자랑하는 내공은 이미 다 써 버려서 단전이 텅 비어 버렸고, 양팔이 다 부러진 데다, 그녀가 아무리 전력으로 후려쳐도 ‘명왕호신공’이라 불리는 호신기를 뚫을 수가 없었다.
그 괴물 같은 육체를 절대로 상처 입힐 수 없다는 것을 그녀도 이미 충분히 깨달았다.
이태산이 약했던가?
태성천은 또 어땠나?
그들은 백설지가 알고 있던 그들의 무위보다 훨씬 더 높은 경지를 보여 주었다.
정기신이 잘 조화된 무인은 절대로 빈틈을 보이지 않는 법이다.
이태산과 태성천은 뛰어난 무인이었고, 자신만의 절기(絶技)도 가지고 있었다.
이태산이 펼치던 아미파의 복마곤법은 웅혼하면서 강력했다.
태성천의 사일검법 또한 태양을 꿰어 버렸다는 전설처럼 빠르고 강맹했다.
하지만 그러면 무엇하는가?
도올에게는 생채기조차 입히지 못했다.
단순히 상대가 안 좋았다고 말하기엔 부족한, 특별한 무언가가 도올에게는 있었다.
머리가 나쁘고 몸만 튼튼한 무뢰한이다?
아니다.
그런 단순한 표현으로는 도올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는 무자비했지만 멍청하지 않았다. 단순히 몸만 튼튼한 파락호 따위는 백 년을 덤벼도 이태산이나 태성천 같은 무인을 상대로는 옷자락도 건드릴 수 없다.
하지만 도올은 달랐다.
그는 느리지만 항상 상대 무공의 핵심을 볼 줄 알았다.
철저하게 이태산과 태성천의 약점을 파고들었고, 자신의 명왕호신공을 믿고 백 대를 맞아 주면서도 단 한 번의 약점을 잡아 그들을 박살 내 버렸다.
‘무서운 자. 타고난 싸움꾼이야. 이런 자에게 어찌하여 그런 절세 무공이 들어간 거지?’
명왕호신공.
지금까진 들어 보지도 못했던 무공이지만, 오늘을 기점으로 천하 무림에는 절세 무공으로 이름을 떨치리라.
백설지는 공포를 느꼈다.
피식자가 포식자에게 느끼는 절대적인 공포심이다.
도올에게 붙잡힌 채, 언제 먹혀 버릴지 모르는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도대체 뭘 원하는……?”
백설지는 탁하게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도올은 그녀에게 대답하지 않은 채 침상 근처에 그녀를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백설지는 둔탁한 고통과 코를 찌르는 악취를 동시에 느꼈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시신 두 구에서 악취가 나고 파리가 날아다녔다.
처참한 공간.
그녀에게 선택권이 있다면 단 한 시도 있고 싶지 않은 공간이었다.
“크응. 칵! 퉤!”
도올은 아무렇게나 코를 풀고 침을 뱉더니 자신의 손으로 대충 얼굴을 쓱쓱 닦았다.
그는 침상 옆에 있는 무릎 높이의 단상으로 다가갔다.
온통 지저분한 것들뿐인 전각 안에서 유일하게 청결을 유지하고 있던 새카만 갑주였다.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팡!
손뼉을 한 번 친 뒤, 하얀색의 두꺼운 밧줄 같은 것을 허리에 묶고, 천천히, 마치 신성한 종교적 제례를 올리듯 갑옷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튼튼해 보이는 다리의 각반부터 철판을 통째로 두드려서 만든 듯한 흉갑과 초승달처럼 생긴 기묘한 철 장식이 달린 투구까지.
‘어느 나라의 갑옷이지? 두정식 갑옷이 아닌데……?’
백설지는 부러진 팔을 최대한 회복시키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으면서도 도올이 입은 갑옷이 특이하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도올은 일반적으로 명나라에서 볼 수 없는 형태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천이나 가죽을 덧대지 않은 채 순수한 철을 판금 형태로 만들어 낸 갑옷이라니.
게다가 도올의 덩치가 덩치이니 만큼, 그가 갑옷까지 갖춰 입자 그야말로 불가에서 말하는 금강명왕상이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왔군.”
도올은 툭 던지듯이 말을 내뱉었다.
그는 육중한 몸을 일으켜 쿵쿵거리는 소리를 내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침상 근처에서 사람의 머리통만 한 철퇴를 집어 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쿵. 쿵. 쿵.
도올이 한 걸음을 뗄 때마다 땅바닥이 울렸다.
그는 백설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어딜……?’
그 순간, 백설지는 자기도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본능이 시키는 대로 침상에서 몸을 굴려 조금씩 도올의 뒤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윽!”
백설지는 몇 번이나 시도한 끝에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다시 일어나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한 걸음을 걸을 때마다 생명이 깎여 나가는 듯 고통스러웠다.
그녀는 전사다.
눈보라 속에서 길러진 강인한 전사.
백설지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걸음을 옮겨 결국 전각 밖의 햇살을 온몸에 맞을 수 있었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이 온통 새카맣게 보일 정도로 둘러싼 흑시군들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갑자기 전각 안에서 죽은 줄 알았던 이국의 여인이 나타났으니 놀랄 만도 한 일이다. 그런데 그들은 생각보다 더욱 크게 당황하며 그녀와 도올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도올은 그녀를 신경 쓰지 않았다.
묵묵히 제자리에 버티고 서서 누군가와 마주 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흑시군이 놀라는 이유는 바로 그곳에 있었다.
“어……?”
그녀는 여전히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이태산과 태성천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들의 사이에, 한 사람의 청년이 당당하게 서 있었다.
“소호……?”
하얀색 비단 무복을 입은 청년.
비록 멀끔한 모습은 아니지만, 언제나처럼 당당하게 버티고 선 그는 분명 무산학관이 자랑하는 최고의 학생. 천무공자였다.
***
“하아, 하아.”
소호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뛰는 심장을 도저히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은 물론이고, 온몸의 혈관이 심장이 맥동하는 속도에 맞춰서 불끈거리는 것이 눈으로 보일 정도였다.
소호는 평소에 자신의 몸을 일 촌(寸), 일 푼 단위로 자각하여 움직일 수 있었다. 일 푼만큼 턱을 앞으로 빼거나, 한 치만큼만 상체를 뒤로 빼는 동작도 능숙하게 하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정밀한 동작을 취할 자신이 없었다.
한 치를 움직이려 하면 두 치 반을 움직이게 됐다. 걷는 데에 삼 할 정도의 힘만 사용하려 했는데 평소의 오 할을 사용한 것보다 더 큰 힘으로 몸이 쭉쭉 나아갔다.
‘힘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거기에 단전 부근에선 기묘하고 짜증 나는 붉은색 기운이 자기 맘대로 움직이며 그의 속 안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었다.
“오라버니, 의원에게 가자.”
대미미는 당장이라도 돌아가고 싶은 눈치였지만 소호는 그럴 수 없었다.
아니, 그럴 여유가 없다고 표현하는 게 더 맞았다.
소호의 몸으로 들어온 그 ‘힘’은 그가 지금 가야 할 곳을 명확하게 알려 주고 있었다.
마치 힘 자체에 자신의 의지가 있는 듯했다.
어서 쪼개진 힘을 본래대로 합쳐 놓으라고 누군가가 귓가에 대고 소리치는 기분이다.
방향에서 멀어지면 심장이 더욱 거세게 두근거렸고, 올바른 방향으로 다가가면 갈수록 몸속의 기운이 점점 안정되었다.
“후우. 후우.”
걸으면 걸을수록 소호의 안색이 차분해지자 대미미도 한시름 놓은 듯이 보였다.
마침내 그들은 흑저요새라고 부르는 곳에 도착했다.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분위기가 술렁거리고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흑저다……! 흑저가 돌아왔어……!”
“이제 어떻게 되는 거냐? 우린 어떻게 해!”
“어찌되긴 사태를 지켜봐야지. 괴물의 말을 안 들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역적이 될 수도 없고……. 우리가 뭘 어떻게 할 힘이 있어?”
입구를 지키던 흑시군 두 사람은 성큼성큼 다가오는 소호를 보며 창을 들이댔다.
“그대는 무슨 일로 왔소?”
“지금은 상황이 안 좋으니 돌아가시오.”
소호는 고개를 저었다.
“중요한 일이 있어요. 안에 흑저…… 아니, 도올이 있죠?”
흑저요새의 수문장 두 사람은 당황하면서 서로를 힐끗 쳐다봤다.
“무슨 일로 찾아온 거요. 공자?”
“보아하니 흑시군들도 도올에게서 등을 돌린 듯한데. 왕진 태감도 그를 버렸나요?”
“……이름을 밝히시오. 그대는 누구요?”
소호는 점점 그들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들은 소호의 태도가 너무나 당당하기에 차마 내치지는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그 망설임이 두 사람의 운명을 좌우했다.
퍼벅!
소호가 가볍게 쥔 정권이 빠른 단타로 두 사람의 턱을 거의 동시에 후려쳤다.
“어, 저기…… 오라버니?”
대미미가 당황하는 것도 당연했다.
평소와 달리 무자비한 손길.
조금이라도 힘이 더 들어갔다면 죽어 버렸을 정도로 두 사람의 턱이 거칠게 돌아갔다. 목이 꺾이지 않은 게 천운이었다.
“으음.”
소호는 자신의 주먹을 내려다봤다.
“슬슬 알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