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권 23화
제26장 신흉도올(新凶檮杌) (19)
소호는 성큼성큼 다시 걸음을 옮겼다.
흑저요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안쪽으로 몰려 있었다.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비명이 들리고, 당황스러운 목소리도 들렸으며. 그 이후에는 쥐 죽은 듯이 조용해져서 사람들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소호는 바로 그때 도올의 앞으로 나아갔다.
절망에 빠진 것일까.
무언가에 압도된 듯한 모습의 흑시군들이 멍하니 선 채로 얼이 빠져 있었다.
“이태산 방장.”
소호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무인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왼쪽 어깨와 오른쪽 발목이 부러진 처참한 모습이지만, 저만큼 무골(武骨)을 타고난 사람은 흔치 않다.
“태성천 방장.”
무산학관의 수많은 검객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예기(銳氣)를 뽐내던 천생 무인.
심검일체(心劍一體)를 이룬다던 그의 오른손이 진정 검과 한 몸이 되어 뭉개져 있는 것은 똑바로 보기 힘들 정도로 참혹한 광경이다.
여기까지 보고 나니 다른 한 사람의 안위가 궁금해졌다.
이태산, 태성천과 함께 왕진의 명을 받고 파견 온 한 명의 여인.
꾸욱―.
소호는 잠잠해지기 시작한 가슴을 꽉 붙잡았다.
미친 듯이 뛰던 심장박동이 가라앉았다.
시끄러운 풍악 소리를 벗어나 고요한 숲속으로 들어온 듯한 평온함이 느껴졌다.
온몸이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아니, 정상이라고 말하면 어폐가 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해진 것 같은 전능함 속에서 소호는 냉철하게 몸의 감각들을 제어하고 있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수록, 몸 안에서 한 마리의 용처럼 거칠게 꿈틀대던 기운이 점점 역근경의 진기와 합일되어 간다.
그럴수록 몸속의 진기가 소호에게 말하는 듯했다.
―나머지를 잡아먹어라. 그리고 하나로 완전해져라!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욕구가 들불처럼 일어났다. 소호는 그 욕망을 거절할 생각이 없었다.
강해진다.
무인에게 있어서 이 이상 중요한 일이 어디에 있을까.
쿵. 쿵.
소호는 전각에서 걸어 나오는 도올을 마주했다.
구 척 장신의 거대한 육체는 여전히 위압적이었다. 거기에 기이한 판금 흉갑과 초승달을 뿔처럼 돌려놓은 듯한 투구를 쓰고 있으니 그야말로 금강명왕. 아무도 상처 입힐 수 없는 신화 속의 인물처럼 보였다.
“왔군.”
차분해진 것은 도올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기이한 투구 사이로 보이는 샛노란 짐승의 눈에선 이성의 빛이 번뜩였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다. 손바닥으로 쳐 죽일 수 있는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를 이렇게나 몰아세우다니.”
소호는 도올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양옆에 쓰러져 있는 이태산과 태성천을 가리켰다.
“이 사람들이 조금만 자존심을 굽혔더라면 당신이라고 해도 그렇게 여유 있지 못했을 겁니다. 함께 온 흑시군들에게 먼저 덤비라고 한다든가, 아니면 다 함께 덤볐다면 어땠을까요?”
“다 함께?”
도올은 의아한 듯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잔뜩 얼어붙은 채 굳어 있는 흑시군들을 둘러본 뒤 웃음을 터뜨렸다.
“크큿, 저런 벌레들로 나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을 것 같은가?”
흑시군을 무시하는 발언이었다.
안타깝게도 그 말은 진실에 가까웠지만, 그렇다 해도 흑시군들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얼굴이 붉어진 자도 있고, 분통을 참지 못하고 신음하는 자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그들은 추상적이고 신화적인 공포심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났다.
“그렇게 생각하겠죠.”
소호는 그에 대해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소호의 목적은 이뤘다.
도올에게 동조해 소호를 적대시 할 흑시군은 줄어들었다.
그 때, 사람들의 공포심을 환기시킬 사람이 한 명 더 등장했다.
“아아……!”
도올이 빠져나온 전각에서 한 명의 여인이 창백한 안색으로 비틀거리며 걸어 나온 것이다.
“소호……!”
소호를 알아보는 여인.
백설지였다.
소호는 그녀를 보며 안심했다.
양팔이 부러진 데다 내면이 불안정해 보이기는 하지만, 분명 멀쩡히 숨을 쉬며 살아 있었다.
“갑옷을 입은 것은, 겁을 먹었다는 증거죠?”
소호는 빙긋 웃었다.
태양처럼 환하게 웃는 모습에서 상대방을 도발하는 자신감이 흘러나왔다.
“이번엔 막을 수 있겠어요?”
스릉―.
소호는 박도를 뽑아 들고 전면으로 겨누었다.
영민한 두 눈에서 황금색과 붉은색의 빛이 번갈아서 번뜩였다.
“우습군.”
도올은 쿵― 거칠게 발을 굴렀다.
“나는 도올이다.”
도올이 양손을 마주쳐 손뼉을 치자, 판금 갑옷이 덜그럭거리며 쇳소리를 냈다.
쩌엉―.
그 소리가 육중했다.
마치 싸움을 알리는 경연의 종소리처럼, 도올의 갑옷 소리를 시작으로 두 사람의 두 번째 싸움이 시작되었다.
***
만부부당(萬夫不當)이라는 말이 있다.
만 명의 사내도 당해 낼 수 없다는 뜻으로 무인으로서 그 이상의 칭찬이 없는 극찬을 의미한다.
장판파에서 장비가 그러했듯, 단 한 사람의 존재만으로 전황을 바꿔 버릴 절세고수.
그러한 만부부당의 사내는 그야말로 난세의 한가운데에 가끔 나타나는 영웅이며, 평화로운 시대에 쉽게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어느 시대건 권력을 가진 자들은 자신들을 지켜 줄 강한 힘을 원했고, 만부부당의 장수가 자신을 지켜 주길 바랐다.
그런 장수를 기다리다 지친 그들은 한 가지 계획을 세웠다. 하늘이 영웅을 내려 주지 않는다면 만들어 보자.
난세처럼 만 명의 혼백을 하나로 모아, 만부부당의 장수를 직접 만들어 내자.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신수 계획이며, 이는 과거에 영락제 시절에 한 번 실패하여 폐기되었다가 정통제의 치세에 이르러 왕진 태감에 의해 되살아났다.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의 몸에 ‘만(萬)’의 혼백을 모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 번의 고련.
만 번의 연금.
만 번의 담금질.
만(萬)이라는 숫자는 종류를 막론하고 모든 변화의 중요한 기준점이며, 불가(佛家)와 도가(道家), 주술의 영역에서도 완성을 뜻하는 중요한 상징이다.
새롭게 만들어진 두 번째 집혼기에는 그러한 만 명의 혼백을 전부 모았다는 전제하에 초인적인 힘을 얻을 수 있도록 주술이 새겨져 있었다.
도올은 이미 만 명의 혼백을 모은 자.
남방 전선에서 왜구를 상대로 전쟁에 참가했던 그는 온갖 살육으로 그만한 양의 혼백을 모았다.
집혼기는 주변의 목숨을 잃은 혼백들을 가둬 버리는 거대한 항아리나 다름없었다.
그의 집혼기는 ‘선’을 넘어간 도올에게 초인적인 힘을 주었고, 그는 명왕호신공이라는 변방의 일개 호신 무공을 절세 신공에 버금가는 막강한 무공으로 재탄생시켰다.
이는 분명 집혼기의 힘이었다. 한번 넘어가면 다시 되돌아갈 수는 없는 일방적인 주술이었다.
그런데 도올에게 변수가 생겼다.
소호가 그의 집혼기를 부쉈고, 공교롭게 소호도 집혼기라는 ‘자격’을 지닌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깨진 항아리에서 빠져나간 혼백들의 절반이 소호에게로 향했다.
도올이 기지를 발휘해 집혼기를 삼키지 않았다면 더 많은 양의 혼백이 소호의 집혼기에 빨려들어 갔으리라.
도올에게 있어서 소호는 지금껏 겪어 보지 못했던 전에 없는 위협.
전력을 다해 죽여 없애야 할 천적이었다.
소호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하늘과 땅.
천하를 잇는 커다란 선에 올라선 단 한 명의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주변에서 흑시군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태산과 태성천.
백설지와 대미미의 모습도 시야 밖으로 멀어져 흐려졌다.
하북에 흉흉한 악명을 떨친 흑저요새도,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천혜의 요건들도 다 사라졌다.
세상천지, 오로지 두 사람 만이 남아 있었다.
소호와 도올은 서로에게로 빨려 들어가듯이 다가가 거세게 부딪쳤다.
쿠우우웅―!
도올의 명왕호신공은 외기가 침탈할 수 없는 천혜의 요새와도 같다.
잡다한 공방은 부질없는 사족(蛇足)이나 마찬가지였다.
우우우웅―――.
모든 기운을 다 끌어 올리자 순식간에 온몸이 역근경 진기의 자애로운 황금 법광(法光)으로 휩싸였다.
쩌어엉!
도올은 소호의 황금 법광이 담긴 도격을 더 이상 맨몸으로 받는 우둔한 선택을 하지 않았다.
사람의 머리통만 한 커다란 철퇴를 가볍게 휘둘러 소호의 도격을 후려쳐 왔다.
서걱―.
콰드드드득!
무엇이든 베어 버릴 것 같던 소호의 도격이 갈 곳을 잃고 흩어져 주변을 베어 버렸다.
도올의 철퇴는 도올을 닮아 있었다.
자신의 몸에 닿는 모든 것을 부수고 분쇄한다.
소호는 도올의 도격을 쳐 내자마자 이번엔 머리를 직접 노려 오는 철퇴를 피해 내며, 간결할 동작으로 이격을 내리쳤다.
스아아아악―.
공기가 사납게 갈라졌다. 소호의 내리치는 도격에 도올은 철퇴를 짧게 휘둘러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소호의 동작이 한 치 더 빨랐다.
쩌어엉!
“……!”
도올의 판금 흉갑에 길게 상처가 생겨났다.
쇠조차 갈라 버리는 막강한 도격이다.
아무리 두꺼운 판금 갑옷이라도 충격을 흡수하지 못한 채 안으로 움푹 패면서 빈틈을 만들어 냈다.
“크아아아!”
도올은 괴성을 내지르며 발을 굴렀다.
진흙처럼 변해서 치솟은 흙덩어리가 소호의 발목을 붙잡았다.
발목뿐이 아니다.
지진이라도 일으킬 듯 휘청거린 지반이 소호의 균형을 빼앗으려 했다.
후우우웅!
도올의 철퇴는 바로 그 순간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세 치 반. 땅바닥까지.’
소호는 정확히 세 치 반의 거리를 뒤로 물러섰다.
도올의 철퇴가 소호의 코끝을 스치듯 지나가며 땅바닥을 후려쳤다. 소호는 바로 그 순간 몸을 튕겨 올렸다.
콰아아아아아앙!
거대한 충격파가 지반을 뒤흔들었지만, 소호는 이미 공중에서 자세를 잡고 있었다.
정확한 시점에 떠오른 육신.
구름처럼 가벼운 동작으로 자신의 박도를 수평으로 긋는 소호.
좌수로 붙잡고 있던 박도의 칼등(刀背)을 놓는 순간, 소호의 몸에만 머물던 황금색 법광이 박도의 끝에서 날카롭게 솟구쳐 올랐다.
“단(斷)!”
스릉!
황급히 고개를 숙여 피한 도올의 투구에서, 초승달 모양의 뿔 중의 한쪽이 종이처럼 쉽게 잘려 나갔다.
위협적인 공격은 그다음이었다.
도강(刀罡)이 여의봉처럼 길게 뻗어 나온 것이다. 하지만 도올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빠른 동작으로 그 도강을 피해 냈다. 그럼에도 소호의 도강은 도올의 등 뒤 전각을 삼 장(丈)가량이나 길게 베어 내 버렸다.
쿠구궁―.
먼지가 피어오르고, 벽으로 세워진 목재의 윗부분이 비스듬히 잘려 미끄러져 내렸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 기우뚱 꺾인 전각이 그 충격적인 위력을 증명했다.
도올이 철퇴로 내리친 땅이 포탄이라도 맞은 듯 짓눌리고 부서진 모습도 압권이었지만, 소호의 도격에 베어진 전각 또한 사람들을 경악시키기 충분했다.
소호의 두 눈에서 붉은빛이 번뜩였다.
화악― 치솟는 기파가 사방을 짓누른다.
소호는 입으로는 웃고 있었다.
즐거워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 얼굴로 드러났다. 온 천하를 아우를 듯 크게 그려진 원안에서, 박도를 양손으로 잡은 소호가 도올의 머리끝부터 사타구니 아래까지를 전력으로 내리쳤다.
“참(斬)!”
쩌어어엉!
철퇴를 들어 올려 막아 내는 도올.
박도와 철퇴가 마주쳤는데, 화약이라도 터진 듯 거센 폭음이 터져 나갔다.
공기가 폭발하고, 불꽃이 튀어 오른다.
도올의 발밑이 깨져 나가며 땅바닥에 커다란 자국을 남겼다.
투둑.
“……!”
도올이 입고 있던 판금 갑옷이 이번엔 수직으로 갈라질 듯 깊은 선이 새겨졌다.
분명히 칼을 막았는데도, 그 안에 실린 기파가 도올의 갑옷을 베어 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