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권 24화
제26장 신흉도올(新凶檮杌) (20)
“하핫!”
소호의 웃음소리가 낭랑하게 퍼져 나갔다.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즐거운 마음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소호가 누구던가.
전국에서 고르고 고른 인재들만 들어오는 무산학관에서도 군계일학의 재능을 뽐내던 자다.
하늘이 내린 무(武)의 재능을 이어받았다.
그렇기에 천무(天武).
무산제전을 지켜보던 호사가들은 늘 말하곤 했다.
천무공자는 무인(武人)으로서 모든 것을 갖췄으나 오로지 하나 제약이 있으니, 그건 아직 나이가 어려 내공이 부족하다는 점뿐이라고.
그런데 집혼기의 공능이 그 제약을 떨쳐 주었다.
오천 명가량의 혼백은 소호의 내공을 비약적으로 늘렸다.
그야말로 위호첨익(爲虎添翼).
범이 날개를 단 격이다.
태극혜검.
태극권.
복마권.
나한권.
태청검법.
소청검법.
소호의 머릿속에서 온갖 문파의 대표 무공을 사용한 대응책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생각을 거듭해 최후에 남은 무공이 가장 좋은 대응책이다.
이 세상에 약한 무공이 어디에 있겠는가.
적절한 장소에서 탁월한 무공을 사용할 수 있는 지능이야말로 진정한 재능이다.
‘정권에는 옆으로 돌아서면서 난피풍검법.’
까가가강!
도올의 오른손에서 나선형의 불꽃이 튀었다. 오른손의 비갑이 박살 나며 떨어졌다.
‘장타를 날릴 때는 거리를 두면서 창궁무애……. 아니지, 삼재검법이면 충분하겠다.’
서걱!
쩌쩌정!
역근경 진기가 맥동하고, 집혼기가 모은 혼백의 능력이 힘을 고조시켰다.
이어지는 십여 합의 격돌 만에 도올이 입고 있던 갑옷은 너덜너덜한 폐품이 되어 버렸다.
“크아아아아!”
쿵!
더 이상 갑옷의 보호를 받지 못할 지경이 된 도올이 발을 굴렀다.
강하게 내딛는 진각.
땅바닥의 흙이 살아 있는 것처럼 솟구친다.
‘예상했어. 이대로 뛰어오르면…….’
소호는 곧바로 뛰어오르며 다시 한 번 단(斷)을 사용할 준비를 했다.
그 순간 도올의 눈빛이 번뜩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바닥에 손을 갖다 대는 도올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캬아앗!”
도올은 거세게 소리치며 바닥에서 ‘땅’을 들어 올렸다.
건장한 황소처럼 굵은 허벅지는 물론이요, 온몸의 근력을 모조리 살려 ‘땅’을 위로 날려 버리는 그 모습은 그야말로 인간을 벗어난 초인의 모습이었다.
돌덩이는 가로 일 장(丈), 세로 일 장의 크기로 육중한 무게를 자랑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던 땅바닥이, 단단하고 각진 흉기로 변해 바닥에서 위로 솟구쳐 오른 것이다.
후우우웅―.
거센 바람이 불어 나갔다.
도올의 힘을 받은 돌덩이는 순식간에 소호의 몸을 박살 낼 것 같았다.
“흡!”
소호는 단(斷)으로 쪼개려던 수평베기에서 참(斬)으로 바꿔 수직으로 칼을 내리쳤다.
동시에 오른쪽 발로 왼쪽 발등을 걷어차서 그 반발력으로 공중에서 몸을 한 바퀴 회전시켰다.
칼끝이 돌덩이와 닿는 순간, 칼날이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휘청거렸다.
소호는 힘의 흐름을 거역하지 않고 몸을 회전시켰다.
파라라락―.
도올이 만들어 낸 흙덩어리는 너무나 단단하여 쇳덩이 같았다.
게다가 베어 내더라도 흙에 불과하니, 힘의 손실에 비하면 얻는 것도 없는 셈이다.
소호는 칼날의 면을 비스듬히 눕히면서 바람개비처럼 빙글빙글 돌았다.
까가가가가가강―!
작은 힘으로 큰 힘을 제압하는 것이야말로 무공의 존재 이유 아니던가.
유능제강(柔能制剛)이며 사량발천근(四兩撥千斤)이다.
작은 힘으로 천 근의 힘을 발하니, 그것이야말로 태극(太極)의 묘리다.
칼날이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회전한 끝에 돌덩이가 옆으로 두 치가량 밀려 나갔다.
그 정도면 몸을 피하기에는 충분했다. 소호의 몸은 자연스럽게 반대쪽으로 튕겨 나갔다.
후우웅―.
비스듬히 치솟은 돌덩이가 흑저요새 안의 어떤 목조 건물 위로 떨어져서 건물을 박살 내 버렸다.
직접 정면으로 맞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만으로도 끔찍할 만큼 막강한 위력이다.
위험을 하나 회피하자 또다시 커다란 위협이 밀어닥쳤다.
도올의 오른손이 거대해졌다.
아니, 거대해졌다는 것은 착각일 뿐.
도올의 오른손에 달라붙은 흙덩어리가 거인의 손처럼 만들어 주고 있었다.
후우우웅―!
마치 사람의 주먹에 얻어맞은 파리처럼, 갑자기 작디작은 존재가 되어 버린 소호는 항거할 틈도 없이 강력한 힘에 얻어맞고 뒤로 튕겨져 나갔다.
뻐어억!
쿠구궁! 콰드득!
이미 반쯤 베어 놨던 전각에 부딪친 게 그나마 천운이라면 천운일까.
소호는 전각의 벽을 뚫고 안으로 날아가, 도올이 쓰던 푹신한 침상에 거칠게 처박혔다.
소호는 온몸의 뼈마디가 욱신거린다는 표현을 이럴 때 쓰는 것이라고 깨달았다.
돌덩이를 막 피한 뒤라서 조금 방심한 모양이었다.
단 한 대를 얻어맞았을 뿐인데, 그 충격이 마차에 치인 것만큼이나 강렬했다.
전신의 근육은 물론이고 튼튼한 뼈 사이의 관절들이 일제히 비명을 질러 대는 것 같았다.
“냄새가…….”
코를 찌르는 도올의 체취와 전각 안에 널브러진 시신 두 구가 그에게 불쾌감을 선사한 것은 덤이다.
“으음.”
여러모로 불쾌한 곳이지만, 멍하니 누워 있을 틈은 없었다.
소호는 신음을 흘리면서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화아악―.
정신을 가다듬자 다시금 온몸에서 뿜어진 황금색 법광이 주변을 밝혀 주었다.
소호는 칼로 정면을 겨누면서 다시 한 번 호흡을 가다듬었다.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도올이 들소처럼 달려드는 모습이 보였다.
언뜻 모습이 보였다 싶었는데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덩치에 걸맞지 않은 속도가 놀라울 지경이다.
쾅! 콰직!
쿠구구궁!
도올의 발밑에서 부서지고 깨진 파편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는 모습은 화산이 폭발하는 천재지변처럼 압도적인 면이 있었다.
“그래. 이 정도는 해 줘야지.”
소호는 빙긋 웃으면서 칼끝으로 도올을 겨누었다.
푸른 하늘과 광활한 초원을 떠올리게 만드는 움직임이 매끈한 궤적을 그려냈다.
쩌어어엉!
도올의 양팔을 감싸고 있던 단단한 흙덩어리들이 일격에 쪼개져서 파편을 흩날렸다.
너덜너덜하게 상해 있던 도올의 판금 흉갑이 반으로 쪼개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도올은 가슴에서 피를 뿜어내면서도 돌진을 멈추지 않았다.
소호는 결국 옆으로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피하는 와중에 바닥을 후려친 도올의 힘에 휩쓸려 전각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전각이 무너져 내리는 뿌연 연기와 나무 파편들 속에서 도올이 맹수처럼 울부짖었다.
“그오오오오!”
황금 법광 때문에 더 이상 호신기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 도올.
넓은 범위의 공격이 날아와서 자꾸만 거리감에 혼란을 겪는 소호.
두 사람이 각자 가지고 있는 초인적인 힘이 봉인된 셈이다.
그제야 인간 도올과 인간 소호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기이이이잉―.
칼이 울고, 도올의 철퇴도 진동했다.
낮은 자세에서 휘두른 태극혜검이 삼 격째에서 막혔다.
도올은 팔에서 피를 뿜어내면서도 압도적인 질량의 권법으로 소호를 덮쳐 왔다.
사람의 머리통만 한 철퇴로 땅을 부수고, 닿는 족족 뼈를 부숴 버릴 것 같은 장타는 그 자체로도 가공할 위협이다.
그래도 그 와중에 실낱같은 틈을 놓치지 않고 소호의 칼이 부드럽게 요동쳤다.
촤아아악―.
도올의 몸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뻐어어억!
어깨를 얻어맞은 소호가 내부가 진탕된 채 입가에서 피를 흘리며 뒤로 튕겨져 나간다.
쩌저정! 쿵! 쩌엉…….
소리가 사라지고 색이 명멸했다.
허공을 떠도는 한낱 먼지, 바닥에서 튀어 오르는 파편들이 느리게 보였다.
파스스―.
강대한 힘을 이기지 못한 옷자락이 바스라져서 가루가 되었다.
상승의 경지.
일격필살의 공격을 한시도 쉬지 않고 서로 주고받는다.
두 사람은 웃고 있었다.
“크하하핫!”
괴성을 지르며 웃는 도올도.
“하하핫!”
정신없이 몸을 움직이면서도 밝게 웃는 소호도.
단 한 순간이라도 한눈을 팔면 머리가 날아가 버릴 상황에서, 두 사람은 마치 대화를 나누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한 수, 한 수.
싸움의 습관을 이야기하고, 그간의 삶을 느꼈다. 그간 어떻게 단련을 해 왔는가. 어떠한 방식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무인(武人)의 삶을 살았는가.
서로를 배운다.
상대가 나를 익히고, 내가 상대를 익히니, 이것이 곧 배움이다.
하루 종일도 이어질 것 같던 두 사람의 대화는 어느 순간 끝을 향해 갔다.
쿠웅!
신화 속 거인처럼 막강한 힘을 뽐내던 도올이 흙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손으로 소호를 붙잡으려 한다.
소호는 그걸 피하지 않은 채 제자리에서 칼을 내리쳤다.
참(斬).
푸른 하늘과 드넓은 초원을 연상시키는 자유롭고 광활한 일격.
몽골 대초원의 장수이자, 북천맹의 주인이었던 텐챠이의 창천도가 이 자리에 재림했다.
촤아아아아악―!
이마부터 사타구니까지, 수직으로 갈라진 피부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뼈와 살, 어디까지 갈라졌는가.
아무도 알 수 없다.
도올은 움찔 몸을 떨었지만 그걸로 멈추지 않았다.
꿈틀거리는 흙덩어리가 소호의 목을 점점 조여 왔다.
양손, 양발에 달라붙은 뒤 이제는 머리마저 덮을 기세다.
거기에 돌진하는 도올.
대미미가 보여 줬던 첩산고의 일격으로 소호의 몸을 날려 버리려는 그 순간이었다.
화아악―.
황금색 법광이 도올의 명치 위, 심장이 있는 가슴의 한가운데를 찔렀다.
도올이 덜컥 멈추었다.
한 발만 더 내디디면 소호의 몸을 박살 낼 수 있는 위치였으나, 그 한 발자국은 천 리 길만큼이나 멀었다.
“네놈…….”
울컥.
도올의 입에서 피가 솟구쳤다.
“나는 죽지 않는다……!”
씹어뱉듯이 말하는 도올의 두 눈은 광기에 휩싸여 있었다.
천천히 조금씩 내딛는 발걸음.
하지만 소호의 몸을 옥죄던 흙덩어리들이 힘을 잃고 가루가 되어 부스러졌다.
부스러지는 흙먼지 사이로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색 법광은 천무공자라는 별호가 잘 어울리는 성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두 눈에서도 황금색 기운을 끌어 올린 소호가 도올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의 두 눈은 도올의 피륙과 내장을 넘어 내부에 숨은 집혼기의 실체마저 잡아냈다.
성큼.
도올이 아니라 소호가 한 걸음 더 다가간다.
도올의 심장을 꿰뚫었던 칼이 더더욱 깊이 박히고, 그가 삼켰던 집혼기의 중심을 갈라 버렸다.
스아아아아――.
“쿨럭.”
기침을 토해 내는 도올의 입에서 피와 함께 붉은색 혼령이 연기처럼 새어 나왔다.
처음에는 조금이었으나, 이내 걷잡을 수 없게 쏟아져 나온 집혼기의 힘이 소호에게로 흡수된다.
붉은색 기운이 소호의 눈, 코, 입을 통해 거침없이 몸속으로 들어왔다.
“크큭, 카카카칵!”
도올의 피를 토하는 듯한 웃음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거구의 육신이 쪼그라든다.
내공과 근력으로 억지로 붙잡고 있었던 몸이 한순간에 반으로 쪼개지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피는 별로 튀지 않았다.
동충하초에 지배당한 누에고치처럼, 도올의 육신은 빈껍데기만 남은 듯했다.
막강한 기의 탁류 속에 몸을 맡겼던 소호.
그가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을 뜨자, 붉은빛이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