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50화 (379/686)

10권 25화

제26장 신흉도올(新凶檮杌) (21)

스하아아아―.

내쉬는 숨결은 불꽃과 같고, 몸속에 흐르는 피는 용암과 같다.

소호는 자신이 독한 감기에 걸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머릿속은 멍했고, 굳이 이마를 만져 보지 않아도 될 만큼 온몸에서 뜨겁게 열이 나고 있었다.

머리가 잘 굴러가질 않았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었나?

이제부터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소호가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자 인근에서 싸움을 지켜보던 흑시군들이 모두 화들짝 놀라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소호는 의아했다.

저들이 어째서 그리 자신을 두려워하는지 알 수 없었다. 도올의 싸움이 그리도 충격적이었던 것일까?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뿐이다.

“하핫.”

소호는 웃었다.

그래도 이겼다.

소호는 승리했고, 모든 걸 쟁취했다.

“오라버니……!”

그런 소호에게 가장 먼저 다가온 것은 놀라면서도 안타까워 보이는 표정을 한 대미미였다.

그녀는 다급하게 달려와 소호의 손을 붙잡았다.

“가자. 많이 다쳤어.”

“내가?”

소호는 의아해하며 싸움 중에 얻어맞았던 어깨를 손으로 만져보았다.

“어……?”

상처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손상되었던 근육들이 급격하게 낫고 있었다.

어깨뿐만이 아니라 싸움 중에 생긴 자잘한 상처들도 회복되는 과정이 눈으로 보일 만큼 빠른 속도로 낫고 있었다.

‘몸이 뜨거워…….’

몸속에 있는 무언가가 자꾸만 밖으로 비집고 빠져나오려고 하고 있었다.

“으음…….”

소호는 이 이상 몸 상태가 나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온몸에 힘을 주면서 한 걸음을 성큼 내딛었다.

“……!”

흑시군들이 깜짝 놀라면서 좌우로 비켜서서 길을 만들어 주는 모습이 보였다.

대미미가 소호의 손을 더욱 강하게 붙잡는 게 느껴졌다.

“어서 가자, 오라버니.”

“잠깐!”

대미미가 소호를 부축하며 곧바로 걸어 나가려는 것을 백설지가 다가와 황급히 가로막았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 줘.”

그녀는 창백한 안색으로 잠시 호흡을 가다듬더니, 흑시군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소리쳤다.

“역적 도올은 죽었다! 왕진 태감의 명에 의해 방금 처형당했다! 흑시군은 길을 열어라!”

백설지는 그 말을 끝으로 대미미와 함께 소호에게 어깨를 빌려주었다.

그녀가 누구와 함께 왔는지를 아는 흑시군들은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멍하니 부축을 받으며 걸어가려던 소호는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머릿속의 생각들이 온통 뒤엉키고 있었다.

“잠깐, 저 선배들도…… 같이 가야지.”

소호는 이태산과 태성천을 가리켰고, 대미미는 그 말에 크게 공감하며 그들을 양손에 한 명씩 보따리처럼 집어 들고 소호의 곁으로 돌아왔다.

어깨와 무릎이 박살 난 이태산, 검을 쓰는 오른손이 뭉개진 태성천.

두 사람의 몰골은 여전히 처참했으나 미미가 안정적으로 들어주자 호흡이 조금 편안해진 듯 보였다.

중년의 흑시군 한 명이 눈치 빠르게 마차를 가지고 다가와 주었다.

소호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서 마차 안에 탑승했다.

흑저요새를 빠져나온 뒤, 사람들의 시선이 사라지자마자 소호는 제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눈앞이 까맣게 흐려지는 정적.

소호의 체력이 한계에 도달하는 순간이었다.

***

“우리가 뭘 본 거지?”

“괴물이야. 흑저가 죽고 나니 더한 괴물이 나타났어.”

흑시군들은 서로를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특히 이태산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등종무의 충격은 더욱 컸다.

그는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 말문이 막혀 있을 지경이다.

그렇게 충격받은 상태로도 마차를 가져다줄 수 있었던 것은 이제 그가 흑저요새를 이끌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이었다.

그는 큰 충격을 받아 지금부터 뭘 해야 할지 고민했다.

“저걸 좀 봐.”

“처참하다…… 저게 정말 흑저인가.”

흑시군들은 박살 나서 무너져 내린 전각을 가리켰다.

“전각을 무너뜨리는 싸움이라니. 나는 이런 건 처음 봤네. 거기다가 그 젊은 청년…… 목숨을 걸고 싸우는 와중에 웃지를 않나. 다 끝나고 난 뒤에는 살기를 내뿜는데…….”

“소름이 끼쳐. 난 도저히 쳐다볼 엄두가 안 나서 먼 산만 봤다네.”

“당연한 일일세. 어떻게 인간이 그런 기세를……!”

“사람을 반으로 쪼개 놓고 웃는 것부터가 잘못된 거야. 크게 잘못된 거라고.”

공포스러웠던 경험들을 성토하는 흑시군들 사이에서, 오직 등종무만이 그들을 책임지는 입장에서 이성적인 판단을 내렸다.

“보고…… 보고를 해야 해.”

등종무는 비틀거리면서 먹과 종이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흑저요새에서 흑저가 죽었다.

그는 좋든 싫든 왕진 태감의 명을 따르던 네 명의 절대 강자 중의 한 명이었으며. 그런 그가, 다름 아닌 왕진 태감의 명으로 죽었다는 것은 하북의……. 아니, 어쩌면 무림 강호 전역의 거대한 지각 변동을 예고하는 큰 사건의 시초가 될지도 몰랐다.

‘그만한 인물이 무명일 리가 없다. 분명 유명한 사람일 것이야.’

등종무는 발이 빠르고 귀가 밝은 흑시군들을 몇 명 선별하여 사방으로 보냈다. 그는 오래지 않아 주마강 일대에서 ‘묶여 있던’ 오십여 명의 흑시군들을 발견하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주마강에서 앞서 벌어졌던 일전에서 흑저 도올과 천무공자 장소호가 싸웠다는 소식이었다.

도올과 막상막하로 힘겨루기를 하던 여인이 있다는 것도 충격적이었지만, 놀라운 것은 격렬한 싸움 끝에 주마강을 건너는 다리가 무너졌고 도올은 그 강에 빠져서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었다.

흑저 도올이 싸움에서 밀리다니.

그런 괴물을 몰아넣을 수 있는 실력자가 있다니. 그 절대적인 힘을 아는 자들 중에 어느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방금 전의 그 일전을 보지 못했다면 도저히 믿지 못할 소식이었다.

앞으로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이 싸움으로 인해 어떠한 일들이 벌어질지.

등종무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워져서 몸을 떨었다.

그가 정성 들여 작성한 보고문이 파발을 타고 북경으로 향했다.

이윽고 천무공자가 흑저 도올을 쓰러뜨렸다는 소식이 하북 전역에 퍼져 나갔다.

***

남경(南京)의 심처, 황사(皇師) 왕진에게 주어진 구중궁궐 같은 곳에서 한 사내가 무릎을 꿇고 앉아 조용히 검을 닦고 있었다.

그가 검을 닦는 손길은 정성이 가득했고, 장인의 손길처럼 섬세하며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칼날에 붙은 작은 먼지나 얼룩조차 용납하지 않고 닦고 또 닦으며 칼날의 예리함을 유지시키고 있었다.

그는 윤기가 흐르는 값비싼 담비의 가죽으로 칼날을 닦고 있었다.

청년은 부(副)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런 것에 관심을 쏟는다면 무공과 검에 전념하지 못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잠도 살풍경한 방 안에서 쪽잠을 자는 것으로 만족하고, 옷도 어떠한 장식도 들어가 있지 않은 백의만 입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사치를 부리는 분야가 있다면 바로 검에 대한 것들이다.

그에게 있어서 검이란 자기 자신의 몸과도 같다.

검신일체.

심검일체가 이미 일상에 스며든 탓이다.

윤기가 흐르는 길고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청년의 창백하리만큼 하얀 피부가 돋보였다.

그는 호흡조차 멈춘 채 검을 닦다가 일순간 고개를 들었다.

휘이잉―.

창틈으로 새어 들어온 한 줄기의 바람이 자그마한 소식을 전해 주고 있었다.

방 안을 밝히던 등불이 좌우로 은은하게 흔들렸다.

청년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바람의 흐름을 느꼈다. 그의 몸속을 힘차게 유영하는 강대한 내력이 그에게 새로운 사실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런가. 넷이 셋이 되었나.”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지만, 청년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천하의 반대편에서 일이 벌어지더라도 알 수 있을 거라 자부했다.

사흉(四凶)의 인연.

주술로 이어진 인과가 당장이라도 사라져 버릴 것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은은하게 빛나는 자신의 집혼기를 손에 쥐자, 심장처럼 맥동하는 진동이 느껴졌다.

가만히 감각을 더듬어 보니 예상은 확신으로 굳어졌다.

아무리 세어 봐도 셋.

이 땅에서 숨 쉬고 살아가는 사흉은 세 명밖에 남지 않았다.

“왔나.”

또 한 가지.

이 또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다.

청년은 사흉 중 한 명의 죽음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그가 그동안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한 사람이 그가 올라온 경지에 발을 디뎠음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청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소호, 네가 왔구나.”

그가 검을 검집에 집어넣자 그건 더 이상 검이 아니라 지팡이가 되어 버렸다.

순백의 옷을 입고 지팡이를 든 장발의 청년.

유준은 천천히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셨습니까.”

문밖을 지키고 있던 흑시군의 정예가 허리를 굽히며 길을 터주었다.

유준은 그를 일별하지 않은 채 묵묵히 걸음을 옮겨 햇빛을 직접 느낄 수 있는 마당까지 나섰다.

“챠핫!”

“합!”

암기를 투척하는 연습과, 방패와 칼을 동시에 사용하는 합격술이 주로 펼쳐지고 있었다.

그들은 유준이 나타나자 일제히 움직임을 멈추고 그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혼돈님.”

유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때는 백귀라 불리며 살수들의 천적으로 소문났던 왕진 태감의 호위무장.

아는 사람은 잘 알고 있는 왕진의 숨겨진 칼.

이젠 사흉의 일원이자, ‘혼돈(混沌)’이라는 별호를 얻은 유준은 그를 향해 공경을 표하는 흑시군들에게 손을 들어올렸다.

“갑시다. 갈 곳이 생겼어요.”

유준은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의 감각이 이끄는 곳.

새로 태어난 ‘신수(神獸)’가 있는 곳으로.

***

하남 삼산현에는 흔히 화전촌이라 말하는 산속의 숨겨진 마을이 하나 존재했다.

농사를 짓고, 가게에서 물건을 팔면서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에게 있어 그 ‘화전촌’은 여러 가지 소문이 뒤섞인 신비롭고 두려운 공간이었다.

산을 넘어 오던 행상들이 말하길, 그곳은 천하일미(天下一味)의 요리를 만들 줄 아는 대단한 숙수가 살고 있다고 했다.

도적질을 일삼던 자는, 그곳에는 더덕을 캐는 노인 같은 몰골을 한 요괴가 있어 수십 명의 장한들이 덤벼도 순식간에 때려눕힌다고 했다.

인근에 근무하는 관리들은 삼산현의 화전촌이라는 말을 꺼내자마자 경기를 일으키며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도망쳤다.

그 어느 것도 범상치 않다.

커다란 장창을 등 뒤에 비스듬히 매고 허리에는 철 요대를 차고 있는 청년.

조서인은 삼산현 아랫마을에서 종합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곱씹으며 순박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는 타고 있던 우마차의 뒤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덜컹거리는 우마차 위에는 허름한 거적때기를 이불처럼 덮은 두 개의 인영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조서인은 가장 친한 친우의 부탁을 받고 저 두 사람을 데려다주는 중이었다.

허름하면서도 수풀이 우거진 샛길을 지나자, 마침내 이야기로만 듣던 화전촌의 입구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객잔……!”

이런 깡촌 산기슭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깨끗한 객잔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커다란 대죽을 반으로 쪼개서 벽처럼 세워 놓은 벽면 위로, 용사비등한 글씨체로 범상치 않게 휘갈긴 네 개의 글자가 조서인의 눈에 강하게 틀어박혔다.

“풍운객잔……!”

조서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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