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권 2화
제27장 신수소호(神獸小虎) (2)
만총이 청조(靑鳥)라는 별호로 불리게 된 건 길가에서 만난 노점상 때문이었다.
이십 년 전의 일이었다. 턱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 길가에 좌판을 벌려 놓고 자신이 깎은 나무 조각들을 팔고 있었는데, 그중에 파란색 염료로 색칠한 작은 새가 마음에 들었다.
아마 그날의 날씨가 너무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날이 그가 첫 ‘의뢰’를 마치고 유유히 떠나던 날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어린 시절부터 그를 옭아매던 빚을 한 번에 모두 갚아 버린 날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는 난생처음으로 낭만적인 마음이 되었고, 그날 좌판에 놓여 있던 모든 청조를 다 사 버렸다.
푸른색 새는 드넓은 하늘과 닮아 있었다.
자유를 찾아서 떠나는 새.
얽매는 것은 하나도 없이, 온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새.
그가 의뢰를 마치고 장난스레 청조 조각상을 내려놓고 온 순간, 그는 살수계에서 청조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모르지요. 그저 상주님이 사 오신 소금을 팔려고 내놓을 뿐이니까요.”
대산염상(大山鹽商)이라는 간판 아래에서 소금을 팔고 있던 상인은 아무리 봐도 소금을 팔 것같이 안 생긴 사내였다.
짱돌처럼 단단한 몸에 이마와 목덜미에 칼자국까지 새겨져 있었다.
누가 봐도 파락호.
그것도 한두 해 굴러먹은 느낌이 아닌 자였다.
“그 상주라는 분이 염인(鹽引:명나라에서 지급되던 소금 거래권)은 있는 거요? 불법으로 구한 소금을 돈 주고 살 수는 없는 것 아니오?”
“손님, 관청에서 나오셨나?”
사내가 눈을 가늘게 뜨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이쪽을 죽일지 살릴지 가늠하는 듯한 섬뜩한 분위기였다.
“그럴 리가. 난 그저 의심이 많은 학사(學士)일 뿐이라오. 그래도 나라 녹을 먹는 자가 조금 싸다고 해서 불법적인 일에 가담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소?”
변장술은 살수에게 있어서 기본 중의 기본.
만총은 품이 넓은 학사 옷을 입은 채 일부러 더욱 깐깐한 표정을 지었다. 뒷짐을 진 채 헛기침을 하는 모습은 영락없이 꼬장꼬장한 중년의 학사다.
소금을 팔던 사내는 그제야 의심을 내려놓은 듯 빙긋 웃으면서 호탕하게 박수를 쳤다.
“에헤이, 그 손님 의심도 많네. 걱정하실 것 하나도 없수. 거 불법이면 우리가 이렇게 장사하도록 나라에서 놔두겠소? 다― 정직하고 믿을 만하니까 우리가 이렇게 장사할 수 있게 놔두는 것이지. 안 그렇소?”
사내가 껄껄 웃으면서 말하는 동안에도 옆에서는 다른 곳보다 싸다면서 소금을 사는 사람들이 줄을 지어 있었다.
“그래서 손님, 살 거요, 말 거요?”
“사겠소.”
만총은 결국 소금을 한 줌 구매한 채 뒷짐을 지고 걸음을 옮겼다.
‘보통 놈들이 아니다. 습격에 대비하고 있어.’
만총은 상인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대산염상의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싸움꾼들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대산염상은 벌집 같은 곳이었다.
하나라도 들쑤시는 순간, 날카로운 벌침으로 무장한 자들이 떼로 몰려나올 곳이다.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될 곳이고, 저렇게 자신감이 있는 것을 보니 뒷배도 든든한 모양이라는 추측이 되었다.
‘좀 더 조사를 해 봐야겠어.’
만총은 이번엔 목인규가 빼앗겼다던 기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리야 모르죠. 그냥 어느 날 갑자기 간판을 바꾸라 하던데요? 뭐, 별 이유야 있겠어요?”
오룡기루에서 대산기루로 이름이 바뀐 이유에 대해 물어보자 입구에서 손님을 맞이하던 퇴기(退妓)는 능청스럽게 그렇게 말했다.
“길가의 돌멩이 하나에도 다 연유가 있는 법인데, 간판이 바뀌는 큰일에 이유가 없을 리가 있나. 그대처럼 눈치가 빠른 사람이면 더더욱, 뭔가 아는 게 있을 터인데?”
만총은 이번엔 능글맞은 학사를 연기하며 퇴기의 손에 은자 한 개를 쥐어 주었다.
“어머나, 통도 큰 분이시네.”
퇴기는 싱글벙글하면서 방으로 안내하여 술상을 내온 뒤에, 한 잔을 따르면서 슬쩍 기루의 입구 쪽에 걸려 있는 목판을 가리켰다.
“저게 창궁패(蒼穹牌)라고 불린대요. 보기엔 그냥 나무판에 구름 몇 개 조각해 놓은 게 다인데, 저게 그렇게 비싸다네요. 평소에는 웃돈을 얹어 준대도 잘 안 주나 봐요.”
“창궁패……?”
“네, 남궁세가를 상징한대나 뭐래나. 저게 붙어 있는 상점은 남궁세가의 이름으로 보호를 받을 수 있대요. 학사님도 들어 보셨죠? 항상 글만 파던 분이라도 워낙 유명한 곳이잖아요?”
만총은 일순간 할 말을 잃고 침묵에 빠져 버렸다.
창궁패라니.
남궁세가라니.
일이 이상하게 꼬여 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 침묵을 어떻게 느꼈는지, 퇴기는 더욱더 신이 나서 말을 이어 나갔다.
“저희 같은 것들한테는 잘된 일이에요. 예전에 오룡파 놈들이 있을 때는 어찌나 치근거리던지. 우리 기루의 어린애들이 그 잡놈들만 보면 경기를 일으켰다니까요? ……어머나, 죄송해요. 말이 너무 거칠었죠?”
퇴기는 능청스럽게 웃으면서 술을 따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오룡파보다는 남궁세가가 훨씬 낫죠. 여기서만 하는 이야기인데. 사실 오룡파는 끝났어요.”
“왜 그렇지……?”
“오룡파의 오룡이 다 죽었다고 하더라고요. 그 후로 우왕좌왕하더니, 얼마 전에…… 큰 싸움이 있었다네요. 거기서 크게 졌나 봐요. 이제는 안휘성에서 기를 못 펼 거라고 하더군요.”
대산기루의 퇴기는 의외로 아는 것이 많았다. 은자 한 냥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현재 오룡파에 대해 자세히 알려 주었다.
‘목인규는 망해 가고 있다는 거군. 물론 기반이 강서성에 있으니 돌아가면 그뿐이겠지만……. 이미 안휘성으로 오면서 그자들과 엮인 이상 순순히 돌아갈 수 없을 텐데?’
만총은 목인규가 ‘도 대인’이라고 부르는 자와 그가 이끄는 흑시군을 떠올렸다.
그들은 건드려선 안 되는 자들이다.
야조탑이 평가하는 ‘도 대인’의 위험은 무림 십대고수에 필적한다.
목인규는 그렇게 절박한 상황이었기에 야조탑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보수를 후하게 쳐 주는 것도 지금은 돈을 아낄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만, 그런데 왜 대산이지? 혹시 내가 아는 그 대산파인가? 북경에서 유명한?”
“어머나, 우리 학사님은 아시는 것도 많네. 그래도 난 그런 거 대답 못하는 거 알면서 또 물으신다. 근데 새로 온 사람들이 북경말을 쓰긴 했어요.”
퇴기는 웃으면서 술을 따라 주었고, 만총은 술을 입에 대는 순간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꼈다.
지금은 술을 마실 때가 아니다.
무간지옥에 한 발을 들이느냐 마느냐가 걸려있었다.
“어머, 학사님. 더 안 마시고 가세요?”
“안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더니 술맛이 떨어지는군. 화대는 넣어 두시게.”
“요놈의 입이 방정이지. 다음에 꼭 오세요. 잘해 드릴게.”
만총은 미안해하는 퇴기의 배웅을 받으며 기루를 빠져나갔다.
골목을 하나 꺾어 들어가자마자 뒤쪽에서 기척을 느꼈다.
미행이 붙은 모양이었다.
은밀하면서 집요한 시선이 그를 주목하고 있었다.
“카악, 퉤!”
만총은 입가에 남은 술맛조차 없애 버리기 위해 침을 뱉었다.
그러고는 한 번 더 골목을 꺾는 순간, 비조 같은 몸놀림으로 남의 집 담벼락으로 숨어들었다.
“뭐야.”
“어디 갔어?”
담벼락 너머로 수군거리는 말소리와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기척이 들려왔다.
만총은 학사 옷을 벗고 미리 준비해 두었던 허름한 승복(僧服)에 짚을 엮어 만든 삿갓을 눌러썼다.
‘길어지면 안 되겠군. 오늘 안에 배후를 밝혀내야 해.’
만총은 걸음걸이와 몸동작의 성향을 바꾸었다. 나이가 들고 무릎이 아픈 승려의 걸음걸이를 흉내 냈다. 잠시 후, 밤거리의 인파 속에 녹아든 그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
“대산파의 두목? 그런 걸 묻는 건 또 처음이군. 당연히 대산판의 두목은 대산이지. 북경에 굴을 파고 들어가 있는 그 곰 같은 사내를 모르는 사람이 있던가?”
하오문 안휘 지부의 담당자는 만총과 이미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지난 이십 년간 살수 생활을 하면서 서른 번이 넘게 마주쳤고, 그때마다 정보로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분위기가 이상했다. 평소와 달리 쓸데없는 말을 많이 끼워 넣었다.
“그런 거 말고. 안휘성에 진출한 대산파의 두목 말이다. 오룡을 죽이고, 철사자를 죽인 놈이 있을 텐데. 그게 누구지?”
하오문 담당자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는 벌떡 일어서더니, 방문을 꼼꼼히 살피면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
“당장 나가! 그에 대한 정보는 줄 수가 없어!”
쾅!
방문을 거칠게 닫은 그는 만총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목인규와 계약한 모양인데. 옛정을 생각해서 딱 한 번만 말하겠소. 오늘 당장 이곳을 뜨시오. 목인규는 돈에 미친 괴물이야. 당장 오체분시를 당해 죽더라도 일말의 동정조차 받을 자격이 없는 쓰레기지.”
“고맙군.”
“이런 똥통 같은 삶이라도 인정은 있어야지.”
“하지만 미안하군. 그 말은 못 들어주겠어.”
만총은 품 안에서 자그마한 조각상을 하나 꺼내 들었다.
이십 년간 유지해 온 그의 상징.
푸른색 염료로 색칠된 자그마한 새 모양의 조각이다.
“난 청조야. 맡은 임무는 반드시 완수한다.”
“……어리석군.”
“어리석은지 어떤지는 해 봐야 알겠지.”
“야조탑의 특급 살수라는 이름을 과신하지 않는 게 좋을 거요.”
하오문 담당자는 자리에 털썩 앉은 뒤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은자 열 냥.”
“평소보다 싼데?”
“살아남으면 더 받도록 하지. 합비 외곽에 천도장(天道莊)이라는 곳이 있을 거요. 상대는 약관을 조금 지난 것 같은 청년이오.”
“뭐……?”
만총은 황당해했지만, 곧 아무 말 않고 은자 열 냥을 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기 직전, 하오문 담당자가 그를 붙잡듯이 말했다.
“목인규가 고용한 건…… 그대 하나만이 아니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오.”
“……고맙군.”
만총은 감사의 인사만을 남긴 채 밖으로 묵묵히 걸어 나갔다.
***
하오문의 담당자는 어째서 그리 순순히 알려 주었을까?
고용된 살수가 만총 하나뿐이 아니라는 사실은 왜 말해 주었을까?
온갖 의문들이 들불처럼 일어났으나, 만총은 묵묵히 그의 작업을 준비했다.
미리 주변에 잠복하여 천도장에 실제로 젊은 청년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가 매일 아침 해뜨기 전에 일어나 태극권을 수련한다는 것과, 낮이 되면 합비의 시장으로 가서 한량처럼 사람 구경을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런 젊은 한량이 늙고 교활한 목인규를 궁지로 몰아넣고, 낭왕이라 불리던 철사자를 죽였다?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 일이었지만 마지막 조사를 하던 중 결정적인 장면을 볼 수 있었다.
목인규가 뺏긴 상점 주인들이 그 청년을 극진히 대접하고 있었다.
염상, 기방, 마방 같은 상점의 책임자들이 천도방으로 찾아와 회의를 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놈이구나.’
목인규는 확신했고, 상대방의 모든 습관을 파악하면서 몸을 낮추고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사흘 후.
마침내 목인규는 천도장의 문을 두드렸다.
“매번 오시던 분이 아니네요?”
천도장에서 나온 청년은 새하얀 비단 무복을 입고, 황금 자수가 새겨진 영웅건을 쓰고 있었다.
해사하게 웃는 얼굴에선 악의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목인규는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원래 오던 친구가 몸이 안 좋아서요. 제가 대신해서 왔습니다. 어디로 모실까요? 도련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