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권 3화
제27장 신수소호(神獸小虎) (3)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는 만총은 누가 봐도 평생을 굴종하며 살아온 마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허름한 옷에 낡은 신발, 상대방의 눈치를 살피는 표정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러셨구나. 원래 오던 장 아저씨는 몸이 많이 안 좋으세요? 어제까지만 해도 괜찮아 보였는데?”
“열이 좀 심해서 며칠은 누워 있어야 할 것 같답니다. 원래 저희 같은 놈들이 그렇지요. 가진 게 몸뿐이라. 아프면 바로바로 쉬어 줘야 다음 일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대신 와 준다고 했지요.”
청년은 진심으로 걱정하며 안타까운 눈빛을 보냈다.
“저런, 보양식이라도 하나 사서 보내야겠어요.”
“아이고, 말씀만으로도 감사해할 겁니다. 이런 분을 모시고 있었다니, 그 친구는 복 받았네요.”
청년은 빙긋 웃으면서 마차에 올라탔고, 만총은 잡고 있던 고삐를 살살 풀어 주면서 앞으로 이동시켰다.
“오늘도 늘 가던 곳으로 갈게요. 합비 시장으로 가 주세요.”
“네. 그쪽으로 모시겠습니다.”
경쾌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마차는 합비의 중심가를 향해 나아갔다.
“잘생긴 나리! 여기 좀 봐주세요. 제가 직접 수확한 무화과랍니다. 얼마나 달고 맛있는데요? 하나만 잡숴 보세요.”
길이 크게 휘어져서 마차가 속도를 낮춰야 하는 구간이었다.
거기에 좌판을 벌리고 장사를 하는 건 영리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선선한 날씨에 햇볕도 기분 좋을 정도로만 내리쬐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인자한 인상의 중년 여인이 선뜻 무화과부터 내미는 광경은 누가 보더라도 웃음 지을 수밖에 없는 풍요로운 광경이다.
마차에 타고 있던 청년은 빙긋 웃으면서 그녀의 호의를 사양하지 않았다.
“대인, 시간이 아까우니 어서 가시는 게 어떨까요?”
만총은 넌지시 경고하면서 왼쪽 다리에 숨긴 단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주변에는 다른 마차가 단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대도시인 합비로 가는 길목에 인적이 없다니.
이럴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이곳에서 사람을 의심하는 건 만총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청년의 목소리는 어디까지나 태연했다.
“괜찮아요. 이렇게 갑자기 과일을 받게 되는 것도 인연이겠죠.”
청년은 선뜻 마차 밖으로 손을 내밀어 중년 여인에게서 무화과를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아예 마차에서 내릴 것처럼 문까지 열었다.
히히힝―.
만총이 다급하게 고삐를 잡아당기자 마차가 움직임을 멈췄다.
“아주머니,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저요? 호호, 잘생긴 도련님께서 이름을 물어봐 주시니 마음이 떨리네요. 수(需)라고 해요, 도련님.”
“수…… 수. 그렇구나.”
청년은 잘 익은 무화과를 손으로 쪼개면서 담담하게 물었다.
“이런 무화과는 얼마씩 해요?”
“그거요?”
중년의 여인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면서 웃었다.
“은자 오천 냥이랍니다. 아주 비싼 물건이에요.”
여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관도 좌측에서 반짝거리는 화살이 수십 개나 쏟아졌다.
“위험……!”
만총은 다급하게 외치면서 굴러 떨어지듯 마부석을 빠져나왔다.
히히힝―.
고삐를 끊어서 말들을 도망가게 만든 것은 덤이다.
만총은 재빨리 몸을 낮춰 마차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쒜에에엑―.
파파파파팍!
튼튼한 마차 외벽에 화살이 박히는 소리는 폭죽이 터지는 소리와 비슷했다.
만총은 충실한 마부에서 특급 살수 청조의 눈빛으로 변했다.
이 상황은 그가 의도한 것은 아니다.
그는 관도에서 다수로 습격하는 이런 대담한 짓은 하지 않는다.
그건 은밀하게 다가가 고통 없이 상대를 죽여 주는 살수의 도(道)에도 어긋나고, 그가 생각할 때 멋있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마 따로 목인규의 청탁을 받은 살수들이 행하는 짓일 것이다.
‘하지만 좋은 기회라는 건 변하지 않지.’
청년과 중년 여인은 여전히 마차의 오른편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만총은 왼손에 단검을 거머쥔 채 고민했다.
이참에 목표를 처리할 것인가?
인자한 과일 상인으로 변장해 있던 중년 여인에게 목표를 빼앗길지도 모른다. 특급 살수 청조가 그래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그 찰나의 고민이 만총을 살렸다.
“커컥……!”
마차의 밑에서 바라본 두 사람의 발 사이로 찐득하고 거뭇한 액체가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자신을 수라고 불러 달라던 중년 여인의 발이 부들부들 떨리다가 털썩 무릎을 꿇는다.
만총은 온몸이 얼어붙어 숨소리도 낼 수 없었다.
마차의 옆에서 순간적으로 뿜어진 살기.
집채만 한 호랑이가 눈앞에서 노란 안광을 빛내며 보고 있는 듯한 엄청난 살기가 사방을 잠식했다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이게 무슨……?’
만총이 느낀 것을 화살을 쏜 살수들은 느끼지 못한 모양이었다.
“끼요오옷―!”
“챠하앗!”
각자 기묘한 기합성을 내지르는 살수 십여 명이 바람 같은 몸놀림으로 달려와 마차를 뛰어넘어 청년에게로 덤벼들었다.
푸화악―――!
쩌정!
깡!
푹!
“키아아악!”
쩌억!
마차의 아래에 엎드려 있던 만총은 온갖 소리들을 실감나게 들을 수 있었다.
비명, 괴성, 격타음, 피부가 갈라지는 소리.
그리고, 피가 흘러내려 땅을 적시는 소리.
“후우, 후우.”
만총은 자신의 숨소리가 너무 거칠다는 걸 인지했다. 귀에서 이명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어린 시절의 무력했던 꼬맹이로 돌아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마차 밑에 숨죽이고 엎드려 있는 것 말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북 제일 살문.
야조탑의 특급 살수, 청조.
무림 십대고수라도 돈만 제대로 주면 죽일 수 있다고 자부하던 자존심이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어느 분야든 전문가만이 알아챌 수 있는 것이 있다.
일평생 소만 잡던 백정은 이 소가 건강한 소인지 아닌지 한눈에 알 수 있고, 일평생 생선만 봐 오던 생선 장수는 생선 눈만 봐도 상한 건지 싱싱한 건지 구분할 수 있지 않던가.
살수(殺手)도 마찬가지.
만총은 지금 이 순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 청년은 암습으로 죽일 수 없다.
강호 무림 어디를 가도 통할 만한 이름이 지금은 길가의 돌멩이만도 못할 만큼 쓸모없게 느껴졌다.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특급 살수까지 올라가는 동안 단 한 번의 의뢰도 실패한 적이 없는 그이기에.
생존에 있어서 예민하고 뛰어난 촉을 지닌 그이기에 느낄 수 있는 것이 있다.
지금 살기를 내뿜는 자와는 싸워서는 안 된다.
감히 적대할 마음조차 품을 수 없다.
절대적인 존재.
감히 살기를 품고 넘봐서는 안 될 인물이었다.
“아저씨는 이름이 뭐죠?”
담담한 청년의 목소리가 한 번 들리고.
“관……재…….”
“관재. 관재라. 그렇군요.”
촤아악!
홀린 듯 이름을 답하는 살수 한 명이 피를 뿜으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마차의 바큇살 사이로 보이는 시신의 눈에서 붉은빛이 살짝 감돌았다가 사라지는 듯이 보였다.
만총은 얼어붙어 있었다.
관재라는 살수가 죽은 뒤에는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그 순간, 바큇살 사이로 맑게 빛나는 청년의 두 눈이 불쑥 나타났다.
“흡.”
너무 놀라서 숨만 크게 들이키는 만총을 보며, 청년은 아침에 만날 때 지었던 것과 똑같은 모습의 미소를 지어 주었다.
“시간이 지체되었네요. 이제 다시 가 볼까요?”
만총은 왼손에 쥐고 있던 단검을 숨길 생각도 못한 채, 홀린 듯이 고개만 끄덕였다.
휘이익―.
만총이 휘파람을 불자 돌아와 준 말들을 다시 마차에 묶는 동안 만총과 청년은 서로 단 한 마디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불어오는 바람이 서늘했다. 만총은 두려운 감정에 한마디도 할 수 없었고, 청년도 굳이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만총은 무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십여 명의 살수들을 옷에 피 한 방울 튀지 않고 웃으며 죽여 버린 그는 사람인가 귀신인가.
평생을 사람을 죽이면서 살아온 그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이질적인 살기라니. 그런 자가 바로 손만 뻗으면 닿는 곳에 앉아 있다는 것에 지금 이 순간도 입이 바짝 마를 지경이다.
‘내가 살수라는 걸 알고 있을 것인가? 이상하다는 건 알고 있겠지.’
싸움을 두려워한 마부가 마차 밑에 숨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살수의 습격을 능숙하게 피한 것은 의심하기에 마땅한 일.
‘내가 살수라는 걸 알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만총은 몸속에 숨겨 둔 단검에 자연스레 손이 가려는 것을 이를 악물며 꾹 눌러 참았다.
그 후 합비 시장까지 가는 동안 그들은 총 아홉 번의 습격을 받았다.
암습의 방법도 다양했다.
허리가 잔뜩 굽어 한 걸음 떼기도 힘들어 보이던 노인이 갑자기 옆에서 칼질을 하기도 했고, 건장한 사내놈들 다섯 명이 일제히 창을 들고 뛰쳐나와 마차의 옆벽에 창을 박아 넣기도 했다.
하지만 단 한 사람도 청년의 몸에 닿는 자가 없었다.
모두가 죽었다.
하나같이 일격.
가슴이 수평이나 수직으로 갈라진 채 심맥이 박살 나 피를 토해 내며 바닥에 쓰러지고, 그 후론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
살수들이 실패하여 쓰러질 때마다, 어디선가 파락호의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들이 나타나 상황을 정리해 주었다.
그들이 치워 준 시신만 해도 일백구에 가깝다. 또한 마차에 박힌 화살이나 창은 곧바로 뽑아서 치워 주었다.
어찌 된 일인가.
몰래 따라다니면서 뒤처리를 해 주는 것은 누구인가?
만총은 궁금했으나 정작 그 대상자인 청년은 태연했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편안하게 앉아서 주변의 풍광만 지그시 바라봤다.
“합비 시장에…… 거의 다 왔습니다.”
청년은 만총을 힐끗 쳐다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손님이 너무 많네요. 다른 곳으로 가죠.”
“어디로……?”
“목장원(木莊園).”
만총이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렸다.
“거긴…….”
“가기 힘든가요?”
“아뇨, 그리로 가겠습니다.”
만총은 위가 쪼그라든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절실히 느꼈다.
목장원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그는 초조함을 감추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합비의 중심가, 부유한 고관대작들이 몰려 사는 동네에서도 유독 눈에 띌 만큼 크고 화려한 대문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어두운 빛깔의 목장원이라는 현판이 내걸려 있었다.
“누구십니까?”
목장원의 입구를 지키던 하인들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만총과 만총이 끌고 있는 마차를 힐끗거렸다.
만총은 그들의 태도를 탓할 수 없었다.
지금 두 사람이 타고 있는 마차는 온갖 암습을 겪은 탓에 만신창이가 되어 옆벽이 너덜너덜한 마차였던 것이다.
누가 봐도 수상한 모습.
오히려 하인들이 거친 태도를 보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지경이었다.
청년은 마차에서 내려 당당하게 걸음을 옮겼다.
화려한 복색에 잘생긴 얼굴, 거기에 태도까지 당당하니 하인들은 즉시 당황하며 자세를 낮췄다.
“염상 목인규를 보러 왔어요.”
청년은 빙긋 웃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