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권 6화
제27장 신수소호(神獸小虎) (6)
“이제 어디로 갈 것이오?”
천무공자는 목장원의 하인들에게는 손을 대지 않았다.
아니, 손을 댈 필요가 없었다고 해도 무방했다.
일단의 싸움이 끝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수십 명의 사내들이 우르르 몰려와 목장원의 이곳저곳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들은 시신을 치우고, 집 안의 박살 난 물건들을 치웠다. 이런 일을 한두 번 해 본 게 아닌 듯, 하나같이 동작이 빠르고 손놀림이 능숙했다.
그 사내들은 목장원에서 일하던 하인들을 모아 어딘가로 끌고 가 버렸다. 아마 입단속을 시키고 이곳에 머무르게 하거나, 아니면 하인들을 아예 밖으로 내보낼 것이다.
“난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야죠.”
청년, 천무공자 장소호는 멀리 떨어진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무언가가 생각난 듯 만총을 보며 웃었다.
“아저씨는요?”
“주어진 임무는 완수하는 게 원칙이지만, 이번엔 임무를 준 자가 죽어 버렸소.”
만총은 내실 바닥에 묻어 있는 핏자국을 힐끗 쳐다봤다.
“그러니 탑(塔)으로 돌아갈까 하오.”
“야조탑이었죠?”
천무공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만총이 어디에 소속된 살수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렇……소.”
“급한 일 없으면 안휘에서 더 놀다가요. 임무로 만나지 말고, 나중에 따로 볼 일이 있으면 좋겠네요.”
햇살처럼 밝게 웃는 청년은 품속에서 피가 묻은 비단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아까 목인규의 시신이 치워지기 전에, 그의 품 안에서 꺼낸 주머니였다.
천무공자는 그곳에서 은자 열 냥을 꺼내더니 만총에게 내밀었다.
“그게 무엇이오?”
“정보값. 의뢰 완수는 못했지만, 정보비로 낭비한 건 챙겨 가야죠?”
만총은 너무 놀라서 그 순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아……!”
머릿속에서 번개가 치는 듯한 감각.
그 순간 아귀가 안 맞는다고 느꼈던 모든 일들이 다 맞아떨어졌다.
순수한 척 웃던 얼굴 뒤로 도대체 얼마나 깊은 심계(心界)가 있었단 말인가.
그랬다.
하오문.
하오문이 천무공자를 지원하고 있었다면 모든 게 아귀가 들어맞는다.
하오문 안휘 지점의 담당자를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그가 어째서 정보료로 고작 은자 열 냥만을 요구했는가?
어째서 평범한 암살 의뢰에 불과한데 만총을 말리기 위해 노력했었는가.
‘하오문이 편을 들어? 이런 일이 이제껏 있었던가?’
팔파일방이든 황실이든, 어느 쪽의 편도 들지 않고 공평하게 모두에게 정보를 파는 게 하오문의 방식이다.
그런데 이렇게 문파 차원에서 나서서 전격적으로 돕는다……?
전대미문이다.
강호 무림 역사상 없었던 일이었다.
만총은 허탈하게 웃었다.
이래 봬도 살수 일을 한 지가 벌써 이십 년이 넘었다.
하루만 사람을 살펴보면 그 성격을 다 파악할 수 있다고 자신했건만.
그게 자신이 아니라 자만이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처음부터 내 의뢰는 곁가지에 불과했다는 말이 아닌가? 놀랍다. 목인규에게 의뢰를 받을 때부터 알고 있었겠군. 마차를 타고 나타났을 때부터 내가 누군지 알고 있었어.’
단순하면서 순수해 보였던 청년에게 이렇게나 교활하고 깊은 심계가 있었을 줄이야.
이래서야 특급 살수인 그가 부처님 손바닥 위의 제천대성처럼 장난감처럼 놀아난 셈 아닌가.
“나는 탄복했소.”
만총은 포권을 취하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이번에 천무공자의 은혜를 받은 걸…… 나는 잊지 않을 것이오. 내가 도울 일이 생긴다면 합비객잔에서 만총을 찾아 주시오.”
만총은 말만으로 끝내지 않고 품 안에서 그의 상징인 청조 조각을 꺼내 천무공자에게 내밀었다.
“예쁘네요. 자유로워 보이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만총은 미련 없이 돌아섰다. 천무공자의 목소리가 그런 그를 붙잡았다.
“아저씨. 야조탑은 도움이 될까요?”
“야조탑은…… 솔직히 말하자면 세가 기울었소. 얼마 전에 도올이라는 자에게 특급 살수를 여덟이나 잃은 탓이오.”
“……”
“아마 나를 여기에 보내면서 탑주는 이미 나를 잃었다고 생각할 것이오. 나는 목인규와의 관계를 정리하기 위한 제물이었으니.”
“그래서 안휘성에 남는군요?”
“천무공자께서 안휘성에서 더 놀다 가라고 명령하셨으니.”
“하핫.”
마지막 너스레가 웃겼던 것일까.
천무공자는 소리 내어 웃었다.
“나 만총, 천무공자에게 도움이 될 날을 기대하겠소.”
청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고, 만총에게는 그거면 충분했다.
그는 목장원을 빠져나왔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이 머리 위로 펼쳐져 있었다.
자유롭다.
만약 천무공자가 청조가 된다면 얼마나 멀리 날아갈 수 있을 것인가.
“응원하겠소.”
안휘성에 똬리를 틀고 있는 도철이라는 괴물을 어찌 처리할 것인지.
만총은 목숨을 보전했음에 감사하며 천무공자의 무운을 빌었다.
***
올바른 천도를 지키기 위한 곳.
그래서 천도장(天道場)이라 이름 붙여진 장소에 십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나이가 모두 제각각이었다.
이제 막 약관을 넘은 듯한 젊은 청년부터 불혹의 나이를 훨씬 지난 듯한 장년의 사내까지 나이 대가 모두 다양했다.
그들은 모두 둥그런 원탁에 모여 앉아 오직 한 사람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따뜻한 연기가 올라오는 차를 입가에 가져가 한 모금 들이키는 청년.
소호는 선망과 열정이 가득 담긴 그들의 눈빛에 환한 웃음으로 답해 주었다.
“여러분의 노력 덕분에 일차적인 목표가 성취되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소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원탁에 앉은 사람들 한 명, 한 명에게 정중하게 포권을 취해 예를 표했다.
“아니, 이 무슨 말씀을.”
원탁에 있던 모두가 일어나 황송하다는 듯이 포권을 취해 인사를 받았다.
“모두가 천무공자의 덕분입니다.”
“우린 정말로 성공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경의를 표하는 사람들 중에는 만총이라는 이름의 살수에게 천도장의 위치를 가르쳐 준 하오문 안휘 지부 지부장이 있었고, 염상 목인규로부터 소금을 빼앗는 데 결정적인 기회를 제공했던 창고 담당자도 있었다.
한때 오룡기방이라 불렸던 대산기방의 퇴기도 있었으며, 매일 아침 소호를 태울 마차를 타고 왔던 오룡마방의 마주(馬主)도 극도의 경의를 표했다.
“저희가 그동안 어찌나 목인규에게 쥐어짜였던지……!”
“마음고생은 물론이고, 오룡방의 패악질까지……. 그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으니 천무공자님이야말로 저희들의 영웅이십니다.”
“옳소!”
“우린 지금 천무공자님 덕분에 살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소?”
“그렇습니다!”
와글와글 시끄러울 정도로 자신을 칭송하는 그들의 마음은 백번 이해하고도 남았으나, 이렇게 정면에서 본인 얼굴의 금칠하는 것에는 도저히 익숙해지기가 힘들었다.
소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차분하게 그들을 만류했다.
“모두가 도와주신 덕분이에요. 한 분이라도 도중에 마음을 바꿨다면 이번 일은 훨씬 어려워졌겠죠. 그러니 이건 우리 모두의 성공입니다.”
소호의 겸손함에 그들은 오히려 더욱 큰 감동을 느끼는 듯했다.
소호는 연신 감사의 인사를 표하는 합비의 상인들 뒤에서 묘한 눈빛으로 소호가 아닌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 사내에게 시선이 갔다.
그는 진광이라는 사람이었다.
북경 대산파의 중요한 간부이며, 이번에 합비로 수많은 호걸들을 데려와서 소호를 도와준 중요한 인물이었다.
“장 공자, 솔직하게 말하겠소. 나는 예전에……. 철공주께서 우리 대산파의 두목님과 처음 만났을 때 그 자리에 있었소.”
해골처럼 마른 몸.
눈 밑이 움푹 들어가서 더더욱 음산해 보이는 인상이었으나, 지금 그의 눈빛에는 선망하는 대상을 보는 듯한 열망이 가득하여 그 인상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철공주께서는 말씀하셨소. 흑저 요새를 없앨 거라고. 그리고 그로부터 한 달도 채 되기 전에 그 말은 현실이 되었소. 이는…… 우리에게 기적과도 같은 일이오.”
원탁에 앉아 있던 모두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진광의 감정에 공감했다.
“그래, 왕진 태감의 사나운 개였던 흑저를 쓰러뜨리기까지 했지.”
“하북 땅에 이미 소문이 퍼졌다지?”
“어느 누가 상상이나 해 봤겠어?”
“대단한 일이야. 우린 어쩌면 역사의 한 장면에 직접 서 있는 걸지도 몰라.”
사람들은 수군거렸고, 소호를 향한 선망의 시선이 더욱 강해져 갔다.
“철공주께서 말씀하셨소. 이번엔 왕진의 두 번째 개인 도철을 없애겠다고. 우린 그것도 이루어질 것이라 조금도 의심치 않소.”
진광은 소호의 곁에 서 있던 대미미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대산파는 철공주를 돕겠소. 더러운 일은 다 우리에게 맡겨 주시오.”
진광은 겉모습과 달리 호탕한 면이 있는 사내였다.
소호가 아니라 대미미를 따른 다는 표시를 명확히 한 셈이지만, 어느 쪽을 돕든 어떠한가.
소호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 대미미와 함께 포권을 취했다.
대미미는 진광의 감사가 마음에 와 닿은 듯 배시시 웃으면서 소호에게 자랑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감사를 표합니다. 대산파의 도움으로 우리는 더욱더 빨리 목표를 이룰 거예요.”
소호는 이제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몸을 돌려 벽 쪽을 바라보자,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커다란 족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 옆에는 꽤나 키가 큰 서생 한 명이 묵묵히 작은 막대기를 하나 손에 쥔 채 서 있었다.
섭주해.
소호의 지낭(智囊)이자 천도장의 책사인 그가 잔잔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는 소호가 눈으로 신호를 보내자 족자를 펼쳐서 그곳에 있는 안휘성 합비 지방의 지도를 보여 주었다.
툭.
섭주해는 손에 들고 있던 작은 나무막대기로 합비 지방 내부의 한 곳을 가리켰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지금까지 여러분의 도움 덕분에 도철과 흑시군의 자금줄을 빼앗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안휘성에서 너무나 많은 패악질을 저질렀습니다. 관청조차 눈 아래로 보는 흑시군이니, 마치 자신들이 법(法)인 양 거들먹거리고 살아왔죠. 돈을 모으고 싶었던 도철은 억지로 자리를 만들어 강서성의 염상 목인규를 불러오기까지 했습니다. 그 결과 여러분이 어떻게 되었죠?”
원탁에 모여 있던 상인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분노를 표했다.
“맞습니다.”
“그놈들 때문에 우리가 입은 피해가 어찌나 컸던지……!”
“진짜 원흉은 사실 흑시군이에요!”
소호는 그들 모두를 이해한다는 듯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맞습니다. 고생이 많으셨어요. 거기에 하소연할 만한 곳도 없었겠죠. 그나마 남궁세가가 나서 주었지만 도철과 흑시군을 상대로 무력을 쓰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호의 목소리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우리는, 도철을 쓰러뜨리고 안휘성을 본래의 모습으로 돌려놓을 것입니다.”
상인들과 대산파의 인물들이 모두 박수를 치며 감탄했다.
“좋습니다.”
“우린 뭐든지 돕겠습니다!”
“끝까지 도울 수 있게 해 주세요.”
소호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들에게 섣불리 움직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엄격한 목소리로 냉철하게 현재 상황을 분석해 주었다.
“그들은 강합니다. 규모도 크고 사람도 많죠. 작은 단서라도 흘려서 허점을 보이면……. 물어뜯기는 건 이쪽이 될 거예요.”
상인들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지만 오히려 더욱 강렬한 눈빛으로 소호에게 의지를 보여 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방법을 바꿨습니다.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은 많이 있으니까요. 원래 어떤 집단이든 돈과 식량, 그리고 무기가 없으면 싸울 수 없는 법이죠. 그렇죠?”
소호는 섭주해가 작은 막대기로 가리키고 있는 합비 내부의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제 그들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을 차례입니다.”
그렇다.
싸움이란 정면에서 박살 내는 것만이 아니다.
민심이 함께하는 자, 천의(天意)가 함께할지니.
소호의 자신감 넘치는 웃음은 모두의 마음에 반격의 불씨를 지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