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58화 (387/686)

11권 8화

제27장 신수소호(神獸小虎) (8)

은자 일천 냥.

단순히 계산해도 일천 명의 사람이 한 달간 먹고 마실 수 있는 큰돈이었다.

도철은 돈 상자로부터 시선을 떼기가 힘들었다. 휘황찬란한 은광(銀光)이 도철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도 공, 저 대산은 앞으로도 도 공을 모시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습니다.”

“으음.”

도철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그렇게 해.”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허락해 주신 것으로 알고 목인규의 사업을 이어받아 계속 운영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고개를 깊이 숙인 대산이 공손히 물러났다.

대산이 건물 밖으로 완전히 나간 후에, 도철은 담이경을 불러 조용히 말했다.

“대산이 북경에서 운영한다는 방파에 대해 알아봐야겠어.”

도철은 상자의 뚜껑을 닫아 버렸다.

휘황찬란한 은자들이 보이지 않으니 훨씬 더 머리가 민활하게 돌아갔다.

“동창에 도움을 요청하면 되겠습니까?”

“그래. 거기도 물어보고, 그리고…… 하오문에도 물어봐 봐.”

“어째서 하오문입니까?”

“비교해 봐야지.”

도철은 그 누구도 믿지 않는다.

설령 돈을 주고 정보를 파는 하오문이라 하더라도, 절대로 믿지 않는다.

“시간은 얼마나 걸려?”

“하오문의 경우는 미리 갖고 있는 정보라면 사흘 안에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동창 쪽은…… 아마 열흘 이상은 잡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군.”

도철은 수염 없이 매끈한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면서 위험한 눈빛을 빛냈다.

“뭔가 찜찜하단 말이지.”

***

도철의 흑시군은 이틀간 평온했다. 대산이 약속을 지킨 덕분이다. 그는 목인규가 안휘성에서 벌이던 사업들을 모래가 물을 빨아먹듯 조용히 흡수했다.

염상, 기방, 마방, 투계에 투견까지.

잡음은 일절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상인들로부터 이전보다 좋은 대우를 받는 사람들의 찬사만이 이어졌다. 심지어 대산이 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 남궁세가와 첨예하게 대립하던 분야도 상대방 쪽에서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

갑작스레 평화가 온 것 같았다.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었다.

안휘성 사람들은 안도했고, 목인규와 오룡파의 시대가 끝나고 대산파의 시대가 온 것에 진심으로 환호했다. 흑시군도 사람인지라 주변의 분위기가 편해지자 마음을 놓았다.

문제는 사흘째에 벌어졌다.

도철의 흑시군으로 들어오던 쌀과 음식, 그리고 각종 물품들이 갑자기 뚝 끊겨 버린 것이다.

“물품들이 안 온다고?”

도철은 푹신한 의자에 반쯤 드러누운 채 신경질적으로 되물었다. 그의 왼손에는 오늘 잡은 송아지의 갈비뼈가 살점이 붙은 채 들려 있었다.

“예. 대붕상회가 창고에 쌀이 없다고…… 보내 주고 싶어도 보내 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뭐?”

도철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터뜨렸다.

“쌀이 없을 리가 있나. 쌀이 없으면? 안휘성 사람들은 다 굶어 죽으라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게, 저도 확인하고 왔지만 그게 사실인지라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허?”

도철은 담이경 부장의 반응이 영 신통치 않다는 것이 신기했다.

“무슨 일인데?”

“대붕상회로 넘어오던 화물들이 도적 떼에게 습격당해서 다 빼앗겼답니다. 지금 안휘성 북부는 난리가 났습니다. 그나마 창고에 쟁여 놨던 걸 풀어서 그동안 버텨 온 건데 그나마도 이제 다 떨어졌답니다.”

“뭐? 그럼 이 사태가 일어날 줄 알면서 버티다가 이제 와서 터뜨린 거야?”

“그게……. 관군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도적 떼를 토벌해야 한다고, 저희한테 힘을 보태 달라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만.”

“웃기지도 않는 소리.”

도철은 가당치도 않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딴 건 평소에 놀고먹는 관군들이 가서 하라 그래. 우린 대(對) 무림인 전용인 걸 알면서 그딴 소리를 해?”

담이경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약속을 못 지켰으면 지들이 알아서 물건을 구해 오고 사죄를 해야지, 거기다 대고 뭐? 도적을 토벌해 달라고?”

도철은 코웃음 쳤다.

“개소리 지껄이지 말라 그래. 오늘 대붕상회 현판 박살 나고 다 뒤지기 싫으면 약속한 대로 쌀이랑 음식이랑 다 가져다 놓으라고 하란 말이야!”

으르렁거리는 듯한 위협적인 목소리, 거기에 음습하게 움푹 들어간 눈 위로 섬뜩한 살기가 감돌았다.

“가만있자. 이거 이상한데, 갑자기 왜 이런 일이 벌어졌지?”

도철은 음습한 눈빛으로 담이경을 쏘아봤다.

“대산은? 목이경이 죽이고 새로 암흑가를 날름 처먹은 그놈은? 지금 뭐하고 있어?”

“안 그래도 살펴보고 왔는데……. 평소대로입니다. 그저 지금 안휘성에 퍼져 있는 상점들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습니다.”

“마음에 안 들어. 여러모로 의심스럽다고.”

지금 도철은 말이 통할 것 같지 않았다.

기분이 나쁜 내색을 역력히 드러내고 있었다.

담이경은 움찔 몸을 떨었지만, 그래도 솔직하게 직언을 던졌다.

“대장, 대붕상회는 제가 직접 보고 왔습니다. 창고가 텅 비었습니다. 더 이상 저희에게 줄 곡식이 없습니다.”

“……정말로 텅 비었다고?”

“예. 그리고 대붕상회에서 막무가내로 나오는 건 아니고, 저희에게 죄송하다면서 쌀 구매 대금은 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도철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걸로 끝이야?”

“물론 대장에 대한 보상금은 별도로 전달하겠다고 했습니다.”

“…….”

“어찌할까요?”

도철은 지금의 상황이 심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오리의 배를 갈라서 더 이상 알을 얻지 못하게 되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도철은 송아지 갈비뼈에 남은 고기를 우악스럽게 물어뜯었다. 질겅질겅 씹히는 촉감이 유난히 질기게 느껴졌다.

기분이 나쁠 때의 습관이었다.

식욕이 치솟는다.

도철은 그게 무엇이든 간에 물어뜯고 싶었다. 이미 다 식어서 따뜻함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고기를 뜯으니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알았다. 어쩔 수 없지.”

담이경이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면 일단 다른 상회에 쌀과 식량을 주기적으로 공급해줄 수 있는지 수배해 보겠습니다. 돈은 좀 들겠지만 인근의 상회들을 돌다보면 적절한 곳을 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잠깐, 잠깐만.”

도철은 의자에 비스듬히 앉은 채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부족한 건 식량이다.

대붕상회가 가져오던 물품을 도적질 당했다고 한들, 안휘성이 산골 화전촌도 아니고, 그 큰 지역을 돌면서 수금하면 식량은 얼마든지 모이는 것 아니겠는가.

“아!”

도철은 그 순간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왕 태감이 민심을 자극하는 짓은 하지 말랬지만……. 지금은 예외가 적용될 만한 상황 아닌가? 군에 식량을 공급할 수 없다니, 이거야말로 위기 아니냔 말이야.’

도철은 스스로 납득할 만한 변명을 떠올린 뒤 마음을 정했다.

“이봐.”

“예, 대장.”

“식량 말인데. 굳이 우리가 돈을 주고 살 필요가 있어?”

“예?”

담이경은 무슨 말인지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한 듯 보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우리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말해 봐. 흑시군의 일원인 우리가 팔파일방만 견제하기도 바쁜데 굳이 안휘성 북부에 터를 잡고 이렇게 이곳에 있는 이유가 뭐냔 말이야.”

“우리는…….”

담이경은 잠시 말을 고르듯 생각을 정리한 뒤에 대답했다.

“왕진 태감에게 원한이 있는 남궁세가를 견제하고, 무공을 익힌 사파의 악당들을 처단하며, 새로 들어오는 흑시군의 무공을 기르는…… 후진 양성의 목표도 갖고 있습니다.”

“그렇지. 좋아, 다 좋아.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두 번째잖아.”

도철은 생각을 할수록 자기 자신이 뿌듯했다.

“우리가 여기에 있는 건 다 안휘성 사람들을 위해서인데, 그 사람들이 밥 한 끼 안 챙겨 줘서야 되겠냔 말이야?”

“……예?”

“안휘성은 커. 우리 주변에 있는 마을만 해도 수십 개지. 범위를 조금만 넓히면 근처의 마을만 해도 수백 개라고. 그러면 한 집당 한 명의 병사만 먹여 살려도 우리들이 밥걱정은 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니냐는 거지.”

“……!”

담이경은 그제야 도철의 의도를 이해한 듯 보였다.

한데 표정이 이상했다.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듯한 표정.

충격으로 떨리던 동공이 차츰 제자리를 찾는 데까지는 무려 속으로 열을 셀만큼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이해한 거야?”

“……예. 이해했습니다.”

“난 천재인 것 같아. 어때? 그렇지? 그러면 우리 흑시군의 밥 문제는 해결되잖아.”

도철은 기분이 좋은 표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담이경은 어째서인지 한참 동안이나 고민을 하더니 조심스럽게 다시 말을 꺼냈다.

“대장. 그러면 밥을 얻어먹는 민가에 대한 보상은……? 금액은 얼마 정도로 하면 되겠습니까?”

“뭐?”

도철은 답답했다.

그렇게나 설명해 주었는데 아직도 이해를 하지 못한단 말인가.

“무슨 소리야? 민가에 보상을 왜 해 줘?”

“……그들도 넉넉한 살림은 아닐 텐데. 저희가 밥을 얻어먹으면서 아무런 보상도 해 주지 않는 것은…….”

“그게 왜 얻어먹는 거야? 당당하게 우리가 지켜 주는 값을 받아 오는 거지.”

도철은 혀를 찼다.

“융통성이 그리도 없어서야, 원. 생각해 봐. 여기서 절약하는 만큼 그만큼 본대에서 보내 주는 지원금도 남을 거고. 이렇게 절약이 되다니! 하핫, 이거야말로 일석이조(一石二鳥)지.”

“대장…….”

담이경은 낯빛이 하얗게 질린 채 머뭇거리다가 큰 결심을 한 듯 이를 악물었다.

“민가 하나마다 병사 한 명의 밥을 먹이도록 돈을 내게 하는 것…… 집마다 쌀을 쓰게 만드는 것……. 그런 걸 ‘납세(納稅)’라고 합니다. 그게 곧 세금을 걷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희가 함부로 세를 걷으면 대명률에 어긋납니다.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철은 따분해졌다.

좋은 생각을 떠올린 것 같았는데 별것도 아닌 이유로 반대를 하다니.

고리타분하기 이를 데 없는 뻔한 말을 하는 담이경에게 짜증이 좀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대명률을 좀 어기기로소니. 누가 우리한테 뭐라고 하는데?”

스릉―.

어느새 도철의 손에는 철조가 착용되어 있었다.

닿기만 해도 사람의 피부 따위는 종이처럼 찢겨져 나가는 귀물(鬼物)이다.

담이경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알잖아? 안휘성주도 우리한테 한마디도 못하는 거.”

“…….”

“고지식하긴. 됐으니 그대로 시행해. 왕 태감한테 사태가 심각하니 돈도 좀 더 달라고 이참에 전서 좀 보내고. 나 참, 생각할수록 돈도 아끼고, 우리 창고에 돈도 쌓이고. 최고의 생각이구만, 뭘.”

도철은 불쾌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냈고, 담이경은 겁에 질린 채 조용히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도철은 웃었다.

바닥에 깔린 것들을 잘 이용하기만 해도 위기는 별 탈 없이 헤쳐 나갈 수 있는 법이다.

도철은 앞날에 대한 불안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

“공자, 공자의 뜻대로 되었소.”

먼 북경에서 내려와 직접 도철이라는 괴물을 상대하기까지 했던 대산이 만면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소호에게 포권을 취했다.

그는 최근에 이어진 격무로 피곤해 보였으나, 두 눈만큼은 열정으로 가득차서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도철, 그 무뢰배가 인근 민가들을 돌면서 쌀을 뺏고 밥을 짓게 만들면서 민초들을 수탈하고 있다고 하오. 이 어찌나 후안무치한 자인지. 그런 무도한 자의 행동을 예측한 공자의 혜안에 감탄할 뿐이오.”

“아뇨, 아니에요. 그 혜안은 제가 가진 게 아니죠.”

소호는 남의 공을 빼앗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몸을 돌려서 당당하게 한 사람을 가리켰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안휘성의 지도와 들려오는 정보들을 종합하여 계획을 세우고 있는 섭주해가 있었기에 지금 같은 일이 가능했다.

“제 동생인 주해가 계획한 일이에요. 역시 대단하죠, 우리 동생?”

“그랬소?”

대산은 박장대소를 하며 감탄했다.

“정말 대단하오. 한 치도 틀리지 않고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소.”

“맞아요. 제 동생의 말은 항상 맞거든요.”

소호는 말을 하면서 본인도 기분이 좋아져서 자랑스럽게 웃었다.

내 동생이 능력이 있다는데 기분 나쁠 일이 무에 있을까.

목소리가 조금 컸는지, 먹물에 코를 박고 있는 것처럼 종이만 들여다보던 섭주해가 힐끗 이쪽을 보면서 쑥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대산 아저씨. 수탈을 당하는 사람들은…… 피해를 많이 입었나요?”

“으음, 난폭한 병사들이 일부 있어서 사건이 있기는 했지만 다행히 사상자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소. 남궁세가 쪽에서 자신들이 최대한 살펴보고 지원해 주겠다고 하였소.”

“다행이네요. 역시 남궁 삼촌이랑 둘째 숙모는 행동이 빠르다니까.”

소호는 남궁휴와 남궁연을 떠올리면서 기분 좋게 웃었다.

서찰만 보냈음에도 이렇게나 열정적으로 도와주다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이 일이 끝나면 우선적으로 찾아뵙고 인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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