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권 9화
제27장 신수소호(神獸小虎) (9)
“상점들은 어떻게 하셨어요? 다 파악했나요?”
“그렇소. 원래 오룡파가 관리하던 상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파악했고, 상점들의 수익도 확인했소. 목인규라는 자……. 그동안 어마어마하게 벌고 있었더군.”
대산이 피로해 보이는 건 그가 직접 각지의 상점들을 돌아다니면서 수익을 관리했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이 그렇게 많이 벌었어요?”
“그야말로 천금을 지닌 부자요. 강서성 제일 염상이라더니.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소. 수완이 대단하더군. 이대로 유지만 해도 나날이 재산이 불어날 것이오.”
대산은 숫제 질린 얼굴이었다.
그는 심지어 안휘성의 가치만 따졌을 때 그 정도지, 강서성의 염상을 생각하면 상상을 초월한다고 말했다.
“그런 자가 안휘성까지 와서 욕심을 부리다가 이런 개죽음을 당하다니……. 재물은 독(毒)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소.”
“좋은 교훈을 얻으셨네요.”
“대의를 위해 일한다는 건 보람찬 일이로군.”
대산은 조금 쑥스러워했다.
북경의 파락호에 불과했던 대산은 자신이 이렇게 무림 정세에 영향을 줄 만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는 듯했다.
대미미의 소개로 처음 봤을 때와는 인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대산은 스무 살 청년으로 돌아간 듯 열정적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럼 이제 칼을 뽑아 들 때가 되어 가네요. 준비는 다 되었죠?”
“그렇소. 이미 모든 준비는 끝마쳤소.”
“좋아요.”
소호는 양손을 모아 포권을 취했다.
“때가 되면 신호를 보내도록 할게요. 다음에 뵐 때는……. 안휘성에서 도철이 사라진 뒤입니다.”
“무운을 빌겠소.”
소호와 서로 포권을 취한 대산은 열정적인 발걸음으로 돌아갔다.
소호는 섭주해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먹 향을 한껏 머금은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주해야, 승산은 어때?”
“충분해요. 저쪽에는 책사가 없나 봐요. 계책에 대한 대비는 전무하네요.”
“본인의 힘에 자신감이 있어서 그럴 거야. 이 힘은…… 강력하거든. 자만하는 것도 이해는 가.”
소호는 허리에 차고 있는 철 요대를 만지작거렸다.
“소호 형.”
섭주해는 평소답지 않게 말을 머뭇거렸다.
“형은 변했어요. 알고 있죠?”
“……응.”
“단순히 사람의 목숨을 빼앗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생각이 조금씩 바뀌고 있어요. 형은…… 과감해지고 있습니다.”
소호는 섭주해가 무엇을 지적하는지 알 수 있었다.
스스로도 느끼던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거?”
“네.”
“당연한 거잖아. 이 세상에 완벽하게, 아무도 피해를 입지 않고 해결되는 일 따위는 없어. 은위군의 죽음에서……. 나는 그걸 배운 거야.”
“그렇죠.”
섭주해는 그 누구보다 소호를 가족으로서 아끼지만, 그렇다고 아부를 하며 감언이설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냉철하고 이성적이었다.
“그 사실에는 이의가 없어요. 저는 오히려 무인(武人)으로서 과감한 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요.”
“그래……?”
“다만.”
섭주해는 들고 있던 붓을 내려놓고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정중앙을 쿡 찔렀다.
“여기, 소호 형이 마음속에 갖고 있는 기둥만은 쓰러뜨리지 마세요.”
“기둥……?”
“저희 아버지께서 해 주신 말씀이에요. 사람은 누구든 지탱할 게 필요하잖아요? 마음속에 강하게 세워진 하나의 기둥. 그것만 남아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든 버틸 수 있는 겁니다.”
소호는 섭주해가 말하는 ‘기둥’이란 것이 무엇인지 알 듯 말 듯 했다. 그래도 느낌은 어떤 건지 알 수 있었다.
마음속 기둥.
즉, 소호가 소호로서 남아 있을 수 있는 하나의 조건.
섭주해는 고민하는 소호를 지그시 응시하다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형, 집혼기는 어때요? 목소리가 들리죠? 괜찮아요? 힘들지는 않아요?”
“아냐. 괜찮아. 멀쩡해. 처음엔 조금 당황했는데 이젠 완전히 익숙해졌어. 내가 얼마나 마음을 강하게 먹느냐가 중요한 것 같더라고.”
“도올을 베고 수많은 혼백을 흡수했으니……. 사실은 이렇게 활동할 때가 아니에요. 형은 사실 심산 깊은 곳에 가서 마음을 다스리고 수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냐.”
소호는 고개를 저었다.
“사흉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잖아? 난 그들을 막아야 해.”
“그걸 꼭 형이 할 필요는 없어요.”
“어차피 날 가만히 두진 않을걸? 당장 유준이 나한테 신년에 보자고 했잖아?”
섭주해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항상 말하는 거지만, 소호 형은 혼자가 아니에요. 혼자서 해결하기 힘들다면 도움을 받는 것도 좋죠. 형이 위험하다고 하면…… 달려와 줄 사람이 한둘이 아니잖아요?”
“도움? 어디에? 아버지나 삼촌들한테 도와달라고 하자고?”
“…….”
“싫어. 나 혼자 해결할 수 있어. 어른들에게 손을 벌리고 도와달라고 해서야 어찌 다 큰 사내대장부라고 하겠는가!”
소호가 양손을 펼치면서 마치 경극에 나오는 영웅처럼 너스레를 떨자, 그제야 섭주해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주제를 다른 것으로 바꿨다.
“계획은 문제없어요. 아무리 절세 고수라고 해도 혼자서는 절대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 있죠. 저는 도철을 철저하게 혼자 남도록 만들 겁니다.”
“그다음엔 내가 나서는 거고?”
“최후에는 소호 형의 무력이 필요해지겠죠. 사흉은…… 집혼기를 지닌 사람이 상대해야 하는 것 같으니까요.”
섭주해는 뭔가 좀 더 할 말이 있는 듯했으나 결국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때가 되면 말해 주겠지.’
소호는 이제 모든 게 준비되었음을 확인했다.
남은 건 곧 다가올 큰 싸움을 준비하는 것뿐이다.
“그럼 나는 연무실에서 싸움을 준비할게. 때가 되면 알려 줄래?”
“네. 쉬세요, 형.”
소호는 닫히는 문 사이로 섭주해가 다시 붓을 들고 무언가를 정신없이 써 내려가는 걸 확인했다.
최근 들어 섭주해가 쉬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관가(官家)든 무가(武家)든, 어딜 가도 극진히 대우받을 문일지십(聞一知十)의 문재(文才)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고 있었다. 소호를 위해. 곧 닥쳐올 싸움의 승률을 높이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는 것이다.
“힘든 건 나만이 아니야.”
소호는 마음을 강하게 다졌다.
도철과의 싸움이야말로 소호의 운명을 바꿀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
평온했던 안휘성은 마치 새벽녘에 해안가를 덮은 해무처럼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불안한 땅으로 변해 버렸다.
일의 시작은 도철을 따르는 흑시군들이 갑자기 주변 민가에서 하루에 일 인분씩 식사를 빼앗아 가기 시작하면서였다.
사실 식사를 일 인분 나눠 준다는 것은 그리 큰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실질적으로 징발되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커졌다.
“나리, 그걸 다 가져가시면 저희는 먹을 게 없습니다. 아이를 가진 저희 며느리가 죽이라도 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난 모르는 일이야. 우리가 무뢰배들로부터 안휘성을 지켜 주는데 지금 나 한 사람 먹을 만큼의 쌀도 못 주겠다는 거야?”
각 집마다 한 명씩 보내진 흑시군들은 처음에는 조금 미안해하는 듯 보였으나 날이 갈수록 뻔뻔해졌다.
매일 가서 한 끼씩 얻어먹는 것은 귀찮으니, 한 달치 식량을 가져가려는 자들이 생겼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흑시군들이 각각 민가로부터 음식을 징발해서 가져와 보니, 부유한 집에 배정된 병사와 가난한 농가에 배정된 병사가 징발한 식량의 차이가 생각보다 너무 컸던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간사했다.
처음엔 민가로부터 쌀을 뺏는 것이 미안했으나, 이제는 내가 동료보다 뭐가 못나서 이것밖에 못 먹나 싶은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민가에 배정된 병사들은 점점 냉혹해졌고, 마침내 경쟁하듯 민가의 음식들을 빼앗아 들고 왔다.
안휘성의 북부는 일촉즉발의 냉엄함이 감돌기 시작했다.
굶주리던 민중들 중에 결국 참지 못하고 나서는 자들이 나왔다.
“이 개자식들아! 누가 우리가 지켜 달라고 한 적이 있었냐! 늙은 노모나 아이를 가진 어미가 밥도 못 먹게 다 뺏어 가다니! 다들 나오십쇼! 관가로 갑시다! 이대로는 못 살겠습니다. 관가로 가서 제대로 시시비비를 가려 보자고!”
“옳소!”
“이대로는 못 살겠다!”
“나라에서 시킨 일인지 물어보자고!”
우르르 뛰쳐나온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관청을 향해 행진하기 시작했다.
당황한 흑시군 병사들은 최악의 선택을 했다.
가장 앞서서 소리치던 사내를 들고 있던 쇠 방패로 후려친 것이다.
“으악!”
한 번 손을 대기가 어렵지, 이왕 손속을 독하게 쓰기 시작하자 거칠 것이 없었다. 그들은 민중들을 잔인할 정도로 짓밟아 버렸다. 병사들은 세 명이나 달려들어서 한 사내를 가차 없이 두들겨 팼다.
그들은 피를 흘리며 꿈틀거리는 사내를 앞에 두고 살기를 담아 외쳤다.
“또 누가 감히 도철의 흑시군에 대들 것이냐!”
숫자는 민초들이 많았으나, 상대는 방패와 무기를 착용하고 매일같이 무공을 단련하는 흑시군이었다.
사람들은 그 이상 대들지 않고, 다친 사내를 데리고 흩어져서 숨었다.
거칠어질 뻔했던 소동은 그렇게 마무리되는 듯했다.
사건의 이야기를 들은 흑시군의 부장 담이경은 불같이 화를 냈다.
“왜 그런 짓을 한 것이냐! 대체 왜!”
담이경은 자신이 안이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그는 분을 주체할 수 없어서 보고를 올리는 조장의 뺨을 후려치기까지 했다.
“왜 그러십니까? 흑시군의 처사에 반기를 든 자들입니다. 일벌백계하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닙니까?”
“어리석긴!”
담이경은 살기를 담아 소리쳤다.
“너희는 한 명을 본보기로 삼아 천 명의 반역자를 낳았다.”
담이경은 그 일을 저지른 병사 세 명을 데리고 가서 직접 사죄를 시키고 보상금으로 은자도 쥐어 주었지만, 이미 떠나간 민심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흑시군이 명나라 백성들을 수탈하고 괴롭힌다는 소문은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안휘성 북부의 담벼락에 벽보가 붙기 시작한 건 바로 그 때부터였다.
천하를 어지럽히는 흑시군을 당장 안휘성에서 몰아내자!
벽보는 아무리 떼어내도 다시 붙었고, 벽보를 붙이는 흉수를 잡기엔 일천 명이라는 흑시군의 인원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도철이 있는 곳으로 한 자루 검을 찬 무림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천하를 어지럽히는 난적(亂賊) 도철을 응징하러 왔다.”
종심검(從心劍) 운준 진인은 본래 합비 쪽에서 유명한 무인이었다.
특별히 소속된 문파는 없으며, 태산(泰山) 깊은 곳에 위치한 작은 도관에서 무공을 닦았다. 그곳에서 그는 종심삼검(從心三劍)을 얻었는데, 작은 보폭으로 끊임없이 움직이며 상대방이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엮어지는 연환검은 일절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작은 키에 허리까지 오는 수염을 길렀다.
그야말로 노도사처럼 보이는 외관에, 늘 강호의 정의를 좇아 힘을 보태는 것으로 명성이 높은 인물이다.
“영감, 죽고 싶은가!”
정문을 지키던 병사들이 소리쳤으나 종심검 운준 진인을 쫓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는 그저 뒷짐을 지고 서 있을 뿐인데도 흑시군의 병사들에게 위압감을 주었다.
심지어 운준 진인은 홀로 온 게 아니었다. 그의 뒤에는 결연한 표정을 지은 검객들이 십여 명이나 함께하고 있었다.
모두가 목숨을 초개처럼 버릴 각오를 한 무림의 협사들이다.
“싸움이다!”
“종심검 운준 진인이 도철에게 싸움을 걸었다!”
안휘성에 있던 무림인들은 물론이고, 인근에 사는 평범한 마을 사람들도 어느새 소문을 듣고 망설임 없이 뛰쳐나왔다. 어느새 종심검의 싸움을 지켜보기 위해 몰려든 숫자가 수백이 넘어갔다.
“부장님께 알려라……! 사태가 심상치 않다.”
부대의 입구를 지키던 조장들은 해쓱해진 얼굴로 다급하게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잠시 후, 어떤 논의가 있었는지 몰라도 병사들은 순순히 문을 개방하고 사람들을 받아들였다.
운준 진인을 선두로 수백 명의 사람들이 흑시군의 부대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병사들이 살고 있는 건물이 깨끗하고 음식이 감당할 수 없이 쌓여 있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한참을 걸어 들어갔다.
흑시군 일천 명이 일렬로 서도 충분히 들어갈 법한 연무장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화려한 황금의자에 방만하게 앉아 있는 나이 서른 즈음의 사내를 만나게 되었다.
“날 응징하러 왔다고?”
기녀의 품에 안겨서 포도를 받아 먹고 있던 사내.
도철이 똬리를 튼 뱀처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