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권 10화
제27장 신수소호(神獸小虎) (10)
가늘고 길게 찢어진 눈이 무심하면서도 장난스럽고, 한편으론 잔인하게 상대방을 내려다본다.
볼이 움푹 패어 그림자가 드리워진 얼굴은 음습하여 늑대 같은 인상을 준다.
당장이라도 눈앞의 모든 것을 물어뜯을 것 같은 위험천만한 분위기가 흘렀다.
도철은 비스듬히 일어나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수백의 사람들을 침묵시켰다.
“아…….”
기묘한 침묵이 흘렀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일순간 압도되어 숨 쉬는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네놈이 도철인가?”
그 순간 앞으로 성큼 나아간 운준 진인은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에 충분했다.
무공을 깊게 익힌 고수일수록 강자의 가치를 아는 법.
그는 도철이 천하에 적수가 열도 안 될 절세고수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봤으나, 그럼에도 그는 당당하게 앞으로 나섰다.
두려움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운준 진인의 정의감이 두려움보다 컸을 뿐이었다.
“나는 태산의 소용관에서 무공을 익혔으며, 도호는 운준이라고 한다. 네가 이 땅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제는 그 정도가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러 이렇게 찾아왔다.”
“호오?”
“묻겠다. 도철. 네놈은 황실에 용인된 흑시군을 이끌면서, 어째서 황실의 백성들을 괴롭히는가?”
가진 바 무력보다 더욱 값진 것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정의와 명분이다.
운준 진인은 당당했다.
그가 당당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자신이 천하의 도리에 어긋남이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며, 이는 이곳에 있는 모두의 공감을 얻었다.
도철은 흥미롭다는 듯이 샐쭉 웃었다.
“내가 백성들을 괴롭혔다고?”
“그렇다. 어째서 사람들을 괴롭히는가? 너의 행동을 왕진 태감은 알고 있는가?”
“늙은이, 왕 태감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으르렁거리듯이 낮은 목소리였다.
운준 진인은 반사적으로 허리춤의 검에 손을 가져다 댔다.
“흥.”
도철은 운준 진인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땅딸막한 노도인은 그의 시선을 조금도 피하지 않았다.
“늙은이. 여기까지 와서 말은 필요 없잖아?”
“그건 그렇군.”
“내가 ‘네! 알겠습니다! 앞으로는 조심하겠습니다!’ 하면 순순히 돌아가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어차피 죽으러 왔으면서 생색은.”
도철은 빠드득―거리는 소리를 내며 포도 씨를 씹다가 바닥에 퉤! 하고 뱉어 냈다.
그는 귀찮은 듯이 어기적거리며 일어섰다. 좌우로 목을 비틀자 우두둑거리는 뼈 소리가 났다.
“죽고 싶다면 죽여 주마. 왕진 태감의 사흉(四凶)이 어떤 존재인지 다시금 머릿속에 새겨 줄게.”
운준 진인은 설핏 굳어진 얼굴로 검을 뽑아 들었다.
“구제할 길 없는 악종이로다. 사람이 어찌 그리 사악한 기색을 발하느냐?”
“사람?”
도철은 비웃었다.
도를 닦았다면서 어찌 이리도 어리석은 소리를 한단 말인가.
“난 사흉의 짐승이다. 너희는 내 먹잇감에 불과해.”
입술을 말아 올려 이빨을 드러내자 정말로 짐승처럼 흉포한 기세가 음습한 안개처럼 연무장을 뒤덮었다.
“어찌…….”
“이런 자가……?”
가장 앞서 있던 운준 진인과 그 뒤 수십의 무인들이 한겨울에 찬물에 내던져진 듯한 한기에 휩싸였다.
“하아아앗!”
운준 진인은 낭랑한 기합성과 함께 그가 지닌 모든 기세를 끌어 올렸다.
수십 년간 익히고 단련해 온 종심검이 바람처럼 흘러나왔다.
그 어떠한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검격.
절정에 오른 검도(劍道)가 운준 진인의 손끝에서 화려한 꽃처럼 피어올랐다.
파라라락―.
치르릉!
서로 간에 대화는 더 이상 필요 없었다.
어느새 양손에 철조를 착용한 도철은 네 발로 기듯이 땅에 납작 엎드리더니, 무시무시한 속도로 운준 진인을 향해 짓쳐들었다.
쩡!
쇠로 된 발톱에 스쳤을 뿐인데 운준 진인의 검은 부러질 듯이 흔들렸다.
운준 진인은 짧은 보폭으로 재빠르게 옆으로 돌아 나왔다.
그에 맞서는 도철.
짐승이 펄쩍 뛰어오르듯 거친 동작이지만, 그 안에 엄연히 법도가 있는 남만의 신법이다.
호표일신(虎豹一身).
예상치 못한 공격, 임기응변의 절정이다.
촤차차창―.
콩 볶는 소리처럼 터져 나온 수십 번의 격철음에 운준 진인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쒜에에에엑―.
터엉!
도철은 한 마리의 맹수처럼 철조를 낀 양손을 휘둘렀다.
운준 진인은 정교한 검술로 철조의 손바닥 부분만을 격타하여 피해 내고 있으나, 그걸로는 오래 버티기가 힘들었다.
그는 입술에서 피가 나도록 이를 악물더니, 이내 결심한 듯 양손으로 검을 거머쥐었다.
힘은 부족했으나, 운준 진인이 평생을 익혀 온 무공의 깊이는 분명 도철을 상회하고 있었다.
그럼 답은 하나뿐이었다.
힘이 부족하다면, 더욱 강한 힘을 내야만 한다.
우우우웅―.
“오오?”
도철은 재미있다는 듯이 탄성을 내질렀다.
운준 진인의 평범했던 청강검 위로 은은한 황색의 강기가 찬란하게 빛났다.
“강기? 절정을 초월한 거야?”
후우우우웅―!
운준 진인은 짧게 검을 내리쳤을 뿐이지만, 그 여파로 연무장의 바닥이 무려 손바닥 한 뼘 만큼이나 움푹 패어 잘려 나갔다.
도철은 뒤로 누운 것처럼 유연한 자세로 검격을 회피했다.
쒜에에엑―!
쉬시시식!
운준 진인의 종심검이 다시 한 번 꽃을 피웠다.
손목을 회전시키는 연환검.
순식간에 펼쳐진 수십 번의 검격에 처음으로 도철의 가슴팍 옷자락이 잘려 나갔다.
서걱―.
“이런!”
도철이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찼다.
운준 진인은 자신감을 되찾고 종심검을 흩뿌렸다.
노도인의 주름진 이마 위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본래의 경지보다 높은 위력을 과하게 끌어내고 있으니. 그는 지금 목숨을 깎아 내며 싸우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도철의 어깨, 허리, 허벅지에 상처가 생겨난다.
전부 크지는 않은 자잘한 상처.
실낱같은 피밖에 못 봤지만, 그 작은 상처들이 운준 진인에게 희망을 주었다.
“하아앗!”
운준 진인은 소리쳤다.
“종심천검(從心天劍)!”
운준 진인이 평생을 익혀 온 종심검의 비기.
순간 검이 커진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만큼 거대한 강기의 파도 속에서, 종심삼검의 비기가 화려하게 펼쳐졌다.
운준 진인은 마음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할 수 있다.
그가 평생을 익혀 온 검법은 틀리지 않았다.
팔파일방.
아니, 구파일방 전체의 무공과 비교해도 종심검은 뒤쳐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며 평생을 수련해 왔다.
도철이란 괴물을 베어 낸다면?
강호의 협사로서, 무림을 위협하는 이 괴물을 벨 수 있다면!
그는 그 어떤 희생을 하더라도 감수할 수 있으리라.
터어엉!
“……!”
전신을 후려치는 충격에 운준 진인은 눈을 부릅떴다.
황색 강기에 휩싸여 있던 그의 검을 찬란한 은빛 철조가 강하게 움켜쥐고 있었다.
종심천검은 끝까지 전개되지 못했다.
은빛 철조의 발톱을 시뻘건 피색의 강기가 견고하게 둘러싸고 있다.
강기 대 강기.
그러니 서로 상처를 입힐 수 없다. 서로의 힘을 겨루게 되니, 운준 진인의 종심천검은 도철의 강력한 손아귀 힘에 속절없이 붙잡혀 버렸다.
“기대했어?”
도철의 놀림에 분노하기도 잠시.
으적―!
“크억!”
운준 진인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원숭이가 나뭇가지를 움켜쥐듯, 운준 진인의 검을 붙잡고 뛰어오른 도철이 노도인의 주름진 목덜미를 스쳐 지나갔다.
휘리릭―.
허공에서 몸을 회전시킨 도철이 사뿐히 땅에 내려선다.
스릉―.
운준 진인의 검을 둘러싼 강기가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희미하게 흔들렸다.
그는 왼손으로 자신의 목을 지혈한 채, 경악한 눈빛을 도철에게 향했다.
“퉤.”
도철은 질겅질겅 씹던 덩어리를 바닥에 내뱉었다.
“늙어서 그런가. 씹기도 불편하네.”
“이놈……!”
운준 진인은 도철을 경멸했고, 생각보다 너무 큰 힘의 차이에 절망했으며, 그럼에도 정의를 위해 결연하게 마음을 다졌다.
그는 숨을 쉴 때마다 피가 뿜어지는 목덜미에서 손을 떼어냈다.
이를 악물고 혈도를 점혈 하니, 목덜미의 피부가 꺼멓게 죽으며 피는 더 이상 뿜어지지 않았다.
“챠하아아앗!”
운준 진인은 용맹하게 외치며 달려들었다.
허리까지 오는 백색의 수염이 선홍의 핏빛으로 진하게 물들었다.
***
차르릉―.
철조의 발톱끼리 서로를 스치면서 섬뜩한 소리를 냈다. 도철은 은빛 철조에 묻은 핏물을 귀찮다는 듯이 이리저리 털어냈다.
“퉤!”
입안에 질겅질겅 씹고 있던 것은 몇 번째로 덤빈 것인지 모를 어떤 무인의 살점이다.
도철은 작고 노쇠한 육신의 등을 밟고 그 위에 올라섰다. 바닥에 흥건히 고인 핏물 속에 운준 진인의 얼굴이 반쯤 잠겨 있었다.
바닥에 놓인 시신은 운준 진인 한 사람뿐이 아니다.
태산 소용관 출신의 노도인.
작고 노쇠한 육신을 지닌 한 노인의 장렬한 최후는 모두의 가슴에 호연지기를 불어넣고 말았다.
운준 진인을 따라왔던 무인들은 다들 미치기라도 한 것처럼 이성을 잃고 덤벼들었다.
도철을 천하의 악적이라 매도하고, 욕하며 목숨을 땔감 삼아 마지막 무공(武功)을 불태웠다.
“지겹다, 지겨워.”
주변은 적막할 정도의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숨소리 하나 크게 내는 사람이 없다.
죽은 것은 운준 진인을 비롯한 십여 명의 검객들뿐이다.
싸움을 지켜보기 위해 들어온 수백 명의 사람들은 여전히 연무장을 둘러싸고 있었다.
흑시군도 마찬가지.
일천에 달하는 흑시군도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으나, 그들 또한 무거운 침묵에 잠겨 있다.
도철은 시신들을 짓밟으며 자신의 황금 의자를 향해 돌아갔다.
그는 온몸이 다른 사람의 피로 푹 젖어 있었으나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포도 안 줘?”
“네? 아, 네. 네.”
포도 알을 들고 도철의 입가로 향하는 기녀의 손이 사시나무 떨 듯 덜덜 떨렸다.
그녀는 짙은 화장으로도 감추기 힘들 만큼 안색이 창백해져 있었다.
입으로는 가장된 웃음을 짓고 있으나, 그녀의 시선은 감히 도철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 채 갈 곳을 잃고 이리저리 헤맸다.
“흥.”
도철은 풍랑에 휩쓸린 조각배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는 포도 알을 보며 비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묵묵히 그 포도 알을 입안에 넣고 조용히 혀끝에서 굴리다가 씹었다.
“그래서? 날 응징하고 싶은 놈들이 더 있어?”
대답은 없었다.
도철 한 사람.
천하를 위진하는 사흉의 일익이 지닌 천외천의 무공에 경악하는 군중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대장! 손님이 있……습니다?”
입구를 지키느라 지금까지의 상황을 모르던 병사 한 명이 짙은 피비린내에 놀라 걸음을 멈췄다.
병사는 침묵 속에서 쏟아지는 수백 명의 시선을 감당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먼저 입을 연건 도철이었다.
“누가 왔는데?”
“그, 그게…….”
병사는 당황하다가 겨우 대답을 끌어냈다.
“황실의 은룡패를 지닌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