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권 11화
제27장 신수소호(神獸小虎) (11)
소호는 잠을 자지 못했다.
설레거나 긴장되어서가 아니라, 최근 들어서 아무리 조용한 곳에 편안하게 누워도 도통 잠이 오질 않았던 탓이다.
어두운 밤.
고요한 적막이 감돌면 어김없이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려왔다.
소호의 마음 깊은 곳.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는 늘 냉혹하고 비판적이다.
뻔뻔한 놈이로군, 네가 이렇게 편하게 잘 자격이 있나?
아직 한참 멀었다. 넌 평온한 잠을 잘 수 없어. 늘 괴로워해라. 늘 고민하고, 늘 번민해!
어떤 때는 젊은 목소리로, 어떤 때는 나이가 지긋한 노인의 목소리로 들려오는 그 말들은 소호의 정신을 좀먹으려 들었다.
그나마 어린 시절에 배운 역근경이 있었기에 소호는 지금까지 버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역근경은 신체를 강건하게 만드는 행법(行法)이지만, 한편으론 혼원일기공(混元一氣功)이나 정기신공(精氣神功)처럼 역근경이라는 커다란 그릇 안에 마음과 내공을 닦는 심공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것도 한계가 찾아왔다.
차분하게 마음을 다스리려는 의지가 비를 맞은 모래 탑처럼 나날이 부스러졌다.
점점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사소한 일에도 신경이 곤두서서 평소처럼 웃기가 힘들었다.
소호는 잠들기를 포기했다.
땅거미가 지면 방 안으로 들어와 밤새도록 가부좌를 튼 채 명상에 잠기곤 했다.
그나마 그게 육신을 회복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어설프게 자려고 뒤척거리다가는 해 뜰 때까지 잠 한숨 못 자서 눈만 충혈되기 일쑤다. 그러느니 심공을 연마하며 몸과 마음을 정화하는 것이 효율적이지 않겠는가.
“들어오십시오.”
소호는 흑시군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나이는 이십 대 중반쯤 되었을까?
소호와 그다지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 젊은 흑시군이 소호의 눈치를 살피면서 안쪽으로 그를 안내했다.
‘집중하자. 이곳은 이제부터 사지야.’
안휘성 북부.
사흉 ‘도철’을 따르는 흑시군의 본거지.
이제 정문을 통과했으니 내부의 연무장까지는 외길이었다.
소호는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마차 두 대가 나란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길이 넓게 만들어져 있었다. 주변에서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들 안쪽으로 몰려간 탓에 본래 흑시군들이 지내는 침소 쪽에는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던 탓이다.
활짝 열려있는 문 안으로 흑시군들이 쓰는 것으로 보이는 침상과 이불, 식탁과 음식들이 보였다.
깨끗한 건물들, 빈 공간마다 전리품처럼 쌓여 있는 쌀가마니와 각종 음식들도 보였다.
“그래. 그랬지.”
소호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섭주해가 계책을 세워 이런 상황을 유도했지만, 계기가 주어졌다고 해도 실제로 이런 일을 행한 것은 흑시군이다.
민초들을 수탈한 자.
명나라의 녹을 먹고 있으면서 백성들을 지키기는커녕 오히려 괴롭힌 자들.
그랬다.
모든 건 그들이 자초했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모두 악행에 가담했다.
후우욱―.
소호의 불편한 심기가 강렬한 기파가 되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심상치 않은 기세가 부대 전체를 술렁이게 만들었다.
앞서가며 소호를 안내하던 흑시군이 다리가 꼬인 것처럼 허둥거렸다.
방패를 들고 검에 손을 얹었지만, 차마 소호에게 검을 뽑아 들지는 못했다.
소호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미 안내는 필요 없다.
소호의 예민해진 감각은 커다란 담장 너머 연무장에 모여 있는 수백 명의 인파.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괴물’의 존재를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한 명, 한 명.
연무장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소호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군계일학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웅성거림이 퍼져 나갔다. 그들 중에는 순백의 비단 무복을 입고 황금 자수 영웅건을 쓴 젊은 무인에 대한 소문을 들어 본 사람도 있었다.
“천무공자……!”
누군가 한 사람이 떠올린 이름이 모두의 입을 타고 퍼져 나갔다.
“천무공자? 무산학관의 그?”
“그런 영웅이 이곳엔 왜……? 설마, 혹시?”
“저분도 도철을 응징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여러 가지 추측을 하며 소호의 의중을 파악하려 했다.
스륵―.
사람들은 망설이지도 않고 길을 열어 주었다.
군중이 양 갈래로 갈라지며 소호를 위한 하나의 길을 만들어 주었다.
‘피 냄새가 나.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진한 피 냄새.’
철퍽―.
발밑에서 끈적거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피.
새빨갛다 못해 검게 말라붙기 시작한 핏물이 연무장의 중심을 적시고 있었다.
소호는 발에 피가 묻는 것에 개의치 않고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바닥에 쓰러진 십여 명의 검객들을 지나, 비참한 얼굴로 눈도 감지 못한 노도인의 시신 앞에 섰다.
처참하다.
소호는 그 싸움의 흔적에서 많은 것들을 알 수 있었다.
땅바닥에 새겨진 수많은 칼자국이 그들의 분전(奮戰)을 증명했다.
손톱이 부러지고 온몸의 뼈가 박살 나면서도 끊임없이 움직인 흔적들이다.
피부가 갈라지고 내장이 쏟아져도 투지를 불태우며 검을 휘두른 자들도 있다.
“아아……!”
소호는 탄식했다.
그 처절함.
결기.
오로지 강호의 도리를 지키겠다는 정의감 하나로 목숨을 불태운 의인들.
반면에 그 상대는 어떠했는가?
실력 차가 분명함에도 싸움을 금방 끝내지 않았다.
마치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 듯이. 주변에서 지켜보는 군중들에게 자기 힘을 과시하고 싶은 것처럼.
오히려 싸움을 최대한 길게 끌었다.
‘이 얼마나 잔인한가!’
소호는 노도인의 몸에서 살점이 떨어져 나간 상처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둥그렇고 단단한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산속에서 짐승에게 물어뜯겼다고 생각할 것이다.
고오오오오―.
소호의 불쾌한 감정은 그대로 강대한 기파로 변해 사방을 짓눌렀다.
이미 소호의 몸은 전투를 위한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호흡을 편안하게 가라앉혔지만, 정신은 당장이라도 출수할 수 있도록 한껏 긴장한 상태다.
우우웅―.
은은하게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법광.
소호의 두 눈에서 황금빛 기광이 번뜩였다.
‘그래. 이렇게 만나는구나.’
왕진을 따르는 두 번째 신수.
무림 강호를 떠돌며 수없이 많은 원한을 남긴 무도한 자.
사흉 도철.
황금 의자에 방만하게 걸터앉아 그를 내려다보는 도철과 소호의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넌 뭐냐?”
도철은 곧바로 벌떡 일어섰다.
처음엔 의심스럽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고 소호를 내려다보던 그가, 갑자기 눈을 부릅뜨더니 튕기듯이 몸을 일으킨 것이다.
“너, 그거! 아아? 아아! 크하핫! 그래? 너였구나? 너였어!”
도철은 미친 듯이 웃었다.
그를 수년 동안 모셔 온 흑시군들조차 처음 보는 진심으로 즐거운 듯한 웃음이었다.
“얼마 전부터 도올의 기척이 느껴지질 않았지. 아무리 집중해도 느껴지질 않았어. 그리고 이상한 기척이 슬금슬금 나타나서 기분 나쁘던 참인데……. 근데 그게 너였구나? 백귀가 말하던 그 특별한 놈.”
도철은 뭐가 그리 우스운지 깔깔대면서 웃었다.
“어디 보자, 그 기도, 그 몸도. 발군이군. 만인혼은 다 채운 거지?”
“…….”
“재밌구나, 재밌어. 기린이 날 처음 봤을 때 이런 심정이었을까? 어설픈 모습을 보니 새로워. 호기심이 막 생기고, 알아보고 싶고 그러네?”
소호는 도철의 말 속에서 흘려들을 수 없는 단어를 포착했다.
‘기린?’
하지만 소호가 뭔가를 묻기 전에 도철의 말은 끊임없이 이어져 갔다.
“도올의 집혼기는 잘 흡수한 것 같은데……. 아직 ‘신(神)’은 못 만났네? 저런, 그래서야 안 되지. 접신(接神)을 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어. 그러면 반쪽짜리라고. 내가 하나 맞춰 볼까?”
도철은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너 아직 도올처럼 특별한 힘은 못 쓰지?”
소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신나서 떠드는 도철을 바라보며 그가 어떤 무공을 쓸지, 어떤 식으로 육체가 단련되어 있는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내공보다는 육체파, 외공을 중시하는 성향이야. 몸의 탄력이 엄청나겠어. 숨을 쉴 때마다 근육이 야생 동물처럼 요동쳐. 속도……. 속도를 중시하는 성향이야. 싸우면 미친 듯이 몰아치는 광풍이 따로 없겠어.’
소호의 분석하는 듯한 시선을 느낀 것일까.
도철은 떠들던 걸 멈추고, 눈을 뱀처럼 가늘게 떴다.
“이것 봐라?”
도철도 살기와 함께 강렬한 패기를 뿜어냈다.
종심검 운준 진인을 상대할 때와 같은 기세.
허나 소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미 모든 것은 계획 안에 있었다. 소호는 그 안에서 최선의 선택을 할 뿐이다.
품 안에 손을 넣어 은색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용 문양의 신분패를 꺼내 들었다.
“내 이름은 장소호!”
쿵.
소호의 낭랑한 목소리가 연무장을 떨쳐 울렸다.
“무산학관에서 과분한 호칭을 받기도 했소. 허나 지금은 흑시군을 살피러 왔을 뿐이니 내 신분패를 앞세워 본인을 은룡패주(銀龍牌主)라고 칭하겠소.”
주변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역시 천무공자였어!”
“은룡패주라니. 저런 인재도 흑시군과 똑같이 관직을 받는 건가……!”
“아냐, 뭔가 달라. 분위기가 이상해. 좀 더 지켜보자고.”
소호는 사람들의 말에 휩쓸리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나는 이 은룡패의 권위로 각지의 흑시군을 살펴보고 있소. 북부 장가구 인근의 비처들부터 지금 이곳 안휘성의 흑시군까지. 그런데!”
소호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백의 군중들 너머.
연무장의 담벼락 쪽을 크게 둘러싸고 있는 흑시군들이 자신들에게 보내지는 비난 어린 시선에 당황하고 있었다.
“이곳은, 특히나 더욱 심각하오.”
소호는 당당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명 황실의 녹을 먹는 병사들이 명나라의 백성들을 수탈하다니. 언어도단(言語道斷)!”
소호는 마치 눈앞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의 목을 치듯 오른손을 바깥쪽으로 휘둘렀다.
펄럭―.
소호의 소맷자락이 흔들렸다. 가슴속에 품은 한 자루의 칼처럼, 날카로운 기상으로 도철에게 묻는다.
“그리고 이 참상! 묻겠소, 도철. 당신이 이곳에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오?”
도철은 소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
도철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손에 낀 철조로 포도를 한 알 집어 들어 입안에 툭 던져 넣었다.
“호오.”
“흐음!”
지켜보던 군중들 중에 무공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에게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방금 도철의 행동은 아무렇지 않아 보이지만, 대단한 한 수였다.
살짝 닿기만 해도 찢고 베어 버릴 것처럼 날카로운 철조로 연약한 포도를 젓가락처럼 집어 들다니.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 한 수로, 도철은 자신의 철조술이 경지에 올랐다는 것을 증명한 것과 다름없다.
“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고 살 거야. 그리고 지금 하고 싶은 일은……. 이거지.”
빠드득―.
부서진 포도 씨를 뱉는 순간, 휙― 하니 잔상을 남긴 도철의 몸이 소호의 정면에서 치솟아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