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권 12화
제27장 신수소호(神獸小虎) (12)
날카로운 철조가 소호의 턱밑에 놓였다.
중간의 동작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른 움직임이다. 소호는 살짝 시선만 내려서 철조를 살펴보았다.
마치 커다란 도마뱀의 발톱처럼 단단하고 길어 보이는 손톱이다. 철이지만 전체적으로 은색으로 빛났고, 손가락 부분이 세 개의 관절로 나뉘어져 있었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발톱은 끝부분으로 갈수록 크다. 손바닥 쪽에 가까울수록 작아지는데, 그 이음새가 보이지 않을 만큼 정교하게 맞물려 있었다. 범상치 않은 명장(名匠)이 만든 병기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저 철조에 잡히면 사람의 몸 따위는 갈가리 찢기리라.
“…….”
소호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은 채 지그시 도철을 응시했다.
양손을 늘어뜨린 모습에선 저항할 의지가 없다고 표명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뭐야, 이거?”
도철은 이해가 안 되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지켜보던 군중들도 웅성거렸다.
헛숨을 삼키는 사람들도 있고, 위험하다고 소리치는 사람도 있었다.
“이대로 죽으려고?”
도철은 혼란스러워했다.
적대를 하지 않는다?
그럴 리가 없다.
도철은 들어와서 소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 안에 조용히 흐르는 강렬한 투쟁심과 살기를 확실히 느꼈다.
기세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도철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소호는 그런 도철을 타이르듯 나직하게 말했다.
“당신은 날 못 죽일 것이오. 그러기엔 간이 작거든.”
“뭐……?”
“대범한 척하지만, 당신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비굴한 짓도 서슴지 않는 소인배지. 그러니 대놓고 왕진 태감을 거스르지 못하잖소.”
“이놈, 죽고 싶으냐?”
“죽일 수는 있고?”
도철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다. 소호는 어깨를 쭉 폈다.
“이 땅에서 하고 싶은 대로 맘껏 하고 살겠다니. 당신이 황제라도 되는가! 그래서 지금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앞선 말은 나직하게, 뒷말은 연무장에 있는 모두가 들을 만큼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싸움에는 무조건 달려들어 치고받는 방식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소호가 택한 것은 그중에 하나다.
“내가 누구를 대신하여 왔는지 알고는 있는가! 그걸 알게 된 이후에도 이런 식으로 위협할 텐가!”
벼락처럼 터져 나온 외침은 사자후(獅子吼)처럼 강렬했다.
소호는 턱 밑에 놓인 철조를 맨손으로 밀어 버렸다.
사량발천근이라던가. 이화접목 같은 무공의 묘리를 사용한 것도 아니다.
그냥 밀었다.
손바닥을 쫙 펼친 채, 모두가 보란 듯이 날카로운 손톱을 옆으로 밀어 버렸다.
무공도 뭣도 아닌 움직임에 도철은 철조를 회수했다.
그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뭐? 아니, 왜……? 그럼 왕진 태감이 널 보낸 거냐? 아니, 그럴 리가……. 그래, 그럴 리가 없는데…….”
도철은 제멋대로이지만, 적어도 왕진 태감을 따르는 궁기나 유준의 능력은 두려워했다.
그는 바보가 아니었지만, 예상 밖으로 돌아가는 일이 너무 많았던 탓에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다.
소호는 당당하고 열정적인 모습을 계속 유지했다.
도철이 혼란에 빠지면 빠질수록 소호에겐 유리했다. 소호는 섭주해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나는 커다란 등불이 될 거야, 주해야.”
아무리 큰 그림이라도 시작은 언제나 작은 점 하나에서 시작하는 법이다.
안휘성을 아우르는 큰 소동을 계획하는 지금, 소호는 마음이 크게 들떠서 자신의 웅대한 목표를 설파했다.
“나는 이 땅에서 황실의 눈치를 보느라 억눌려 있는 모든 무림인들에게 자유를 돌려줄 거야.”
“형은 지금의 무림이 잘못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마음에 안 들어.”
소호는 벌떡 일어나 정자 지붕 위의 밤하늘을 가리켰다. 셀 수 없이 많은 별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무림이 아니야. 거칠 것 없이 자유롭고, 고통받는 민초들을 위해 용감하게 나서는! 적이 아무리 강해도 당당하게 일어나서, 자! 강호의 도리를 지키자! 라면서 모두가 한마음으로 달려가서 싸우는. 그런 뜨거운 무언가가 최근엔 더욱 사라졌잖아?”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취하는 기분이었다.
여전히 소호는 긴 말을 조리 있게 하는 건 힘들어했지만, 때마침 대화를 나누는 상대는 어떤 말도 금세 이해하고, 아무것도 숨길 필요가 없는 섭주해다.
소호는 그가 느끼는 지금 무림 강호의 문제점을 가감 없이 말했다.
“각자의 힘으로는 아무 일도 못하지만 모이면 달라. 분명히 달라질 수 있을 거야. 사람들도 다 그렇게 느끼고 있을 거고. 다만 지금은…… 구심점이 없어. 사람들이 ‘이거다!’ 하고 모여들 만한 깃발이 없는 거야.”
“그래서 ‘등불’이군요. 항해 중인 배에 방향을 제시하는 등대처럼.”
“맞아. 그런 거야.”
소호는 배시시 웃었고, 섭주해는 그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힘들 거예요. 만민에게 가야할 길을 보여 주는 것은, 그저 무력이 강해서 이기기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그래?”
“위기도 겪고, 사람들과 공감하고, 그러면서 어려움을 해결해 줘야 하겠죠. 생각할 게 많아질 겁니다.”
“그러니까. 주해가 도와줘야지.”
소호가 배시시 웃자 섭주해도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평온했던 밤, 두 사람 사이에서만 이루어진 대화였다.
‘나는 등불이야.’
소호는 양손을 펼쳤다.
천 명이 넘는 시선이 한 몸에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누군가는 대적해야 한다.
민초들을 짓밟는 도철.
그런 도철과 난폭한 사흉을 거느리고 있는 왕진 태감.
소호가 아니라면 누가 대적하겠는가?
“나는 네가 이제껏 짓밟아 온 사람들의 대리자다. 그동안 외면해 왔던 강호의 도리를 바로 세우는 집행자다.”
마음을 정한 소호에게는 거칠 것이 없었다.
지금도 발밑에는 도철에게 도전했던, 무모하지만 정의로운 노도인이 비통한 얼굴로 쓰러져 있지 않은가.
이 얼마나 참혹한가.
우리가 사는 현실이 이래서야 되겠는가.
소호는 허리에 차고 있던 박도를 뽑아 들었다. 도철은 그 때쯤 생각을 정리해 갔다.
“그러니까…… 왕진이 보낸 건 아니라는 거지?”
“그래.”
“카핫! 우습구나. 말만 번지르르하고, 어린애인가? 스스로 그렇게 말하면서 부끄럽지 않은가? 대리자? 집행자? 네가 뭐라고! 너 따위가 뭐라고 그런 걸 한단 말이냐?”
“내가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소호는 왼손을 펼쳐서 도철을 가리켰다.
“덤벼라, 짐승.”
잠시간의 침묵.
그 후에 도철은 폭발하듯 덤벼들었다.
쩌어어어엉―!
두 사람은 범종을 때린 것 같은 거센 소리와 함께 튕기듯이 서로 물러났다.
타탓!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다시 한 번 거리를 좁힌다.
두 사람은 일격을 부딪치는 것만으로도 서로 이해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싸움법에 있어서 동류(同流)였다.
속도가 빠르고, 다양하면서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상대의 빈틈을 파고든다.
뛰어난 격투 감각과 천부적인 거리감.
상대방의 공격 범위 안에서 무모한 공격을 시도하는 대범함까지.
스읍―.
소호는 숨을 들이켰다.
상대는 강하다.
힘을 남길 필요도, 그럴 여유도 없다.
시작하자마자 전력.
집혼기의 힘이 전신으로 퍼져서 혈맥을 타고 흐른다.
은은했던 황금색 법광 사이로, 붉은색 안광이 번뜩였다.
양손으로 거머쥐는 박도.
“단(斷)!”
소호의 낭랑한 외침과 함께, 공허했던 연무장에 수평으로 긴 실선이 그어졌다.
서걱―.
소리는 미약했으나 그 여파는 무시무시했다.
몸을 낮춰서 피해 낸 도철의 뒤에서, 그가 아끼던 황금 의자가 절반으로 잘려서 미끄러지듯이 넘어가고 있었다.
마치 공간 자체가 잘려 나간 듯했다.
한순간 멎었던 바람이 갑작스레 강해졌다.
“캬하핫!”
상대가 강하다?
그렇다면 더욱 즐겁게 싸울 기회일 뿐이다.
도철은 광소를 터뜨리며 기세가 더욱 사나워졌다.
퍼버벅!
몸을 띄우자마자 날아오는 발차기 삼 연격을 소호가 손바닥으로 흘려냈다.
파미각, 원앙각, 전질보.
처음부터 전력 승부였다.
사방의 모든 것이 느려지고, 색상이 사라진 채 세상 모든 것들이 흑백으로만 보이는 상승의 세계에 접어들었다.
후우웅―.
주변 모든 것들의 접근을 불허하는 강렬한 기세가 퍼져 나갔다.
도철의 철조는 대단했다.
소호가 전력으로 휘두르는 도격을 발톱 하나로도 유연하게 쳐낸다.
그러면서도 흠집 하나 나지 않으니 신병이기가 따로 없다.
쩌어어엉!
쩌저정!
푸확!
바닥이 터져 나가고, 애꿎은 대리석이 수십 개의 조각으로 잘려 나갔다.
호표일신(虎豹一身).
짐승 같은 몸놀림을 지닌 남만의 신법이 도철을 신출귀몰하게 만들었다.
네 발로 땅을 짚으니 그야말로 짐승 같은데, 그러면서도 거리를 제압하고 훨씬 더 진퇴가 자유로우니 그야말로 신공이다.
스르릉―.
열 개의 철조가 해바라기 꽃처럼 벌어지니, 그 안에는 견고하게 유형화된 강기(罡氣)가 제각각 위력을 뽐낸다.
소호는 처음으로 반격하지 않고 몸을 피했다.
서걱―.
살짝 닿았을 뿐인데도 연무장 바닥에 깔린 대리석이 두부처럼 잘려 나갔다.
고오오오―.
쒜에엑!
그런 강기가 열 개.
짐승의 발톱처럼 신체를 붙잡고 할퀴려 드는 동작은 그 자체만으로도 거대한 위협이다.
소호는 아지랑이 같은 몸놀림으로 피해 내면서 칼끝으로 철조의 방향만을 살짝살짝 틀면서 회피했다.
콰과과광!
“어어?”
“피해!”
“위험하다! 천무공자!”
두 사람은 어느새 연무장의 끝까지 움직이고 있었다. 싸움을 지켜보던 수많은 군중들이 재빨리 도망쳤다.
혹시라도 휘말리면 그 순간 목숨은 장담할 수 없다.
도철은 군중들에게도 피해를 줄 수 있는 무공도 사용하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대리석이 깨져 나가고 담벼락은 무참하게 무너졌다. 바닥에는 두 사람의 족적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그러다 한순간,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가 위로 튀어 오른 도철이 호표(虎豹)처럼 덮쳐왔다.
소호는 공중에 뜬 그를 꼬치 꿰듯 칼끝으로 찔렀지만, 도철은 놀랍도록 유연한 몸놀림으로 내찌른 도첨을 피해 냈다.
까드득―.
이름난 명장의 병기는 아니지만, 백련정강한 쇠로 만든 박도가 도자기처럼 깨져 나가고 있었다.
도철의 철조는 잡히는 병기를 무참하게 박살 냈다.
마치 커다란 짐승이 이빨로 깨무는 듯했다.
철조에 닿은 부분부터 조각조각, 철편들이 떨어져 나간다.
소호는 당황하지 않았다.
아직 나이는 많지 않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백전연마라는 단어가 아깝지 않은 수많은 경험을 해 왔다.
소호는 절반만 남은 칼날을 들어 올려 앞으로 가볍게 내찔렀다.
은은히 퍼지는 법광.
황금색 기운이 소호의 손끝에서 강하게 유형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