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64화 (393/686)

11권 14화

제27장 신수소호(神獸小虎) (14)

소호는 이를 악물었다.

고통은 화선지에 떨어진 먹물처럼 커졌다.

먹물이 번져 점점 화선지를 검게 물들이듯, 복부에서 시작된 고통은 점점 넓게 퍼져서 이제는 대체 어디가 아픈 건지 모를 정도로 온몸이 고통스러웠다.

“으아아아아!”

소호는 전력을 다해 양손을 내리쳤다.

소림오권.

호권(虎拳) 중 호장파풍(虎掌爬風)이었다.

쿠웅―.

강하게 내딛는 진각, 양손으로 동시에 내리치는 권격에 맹호의 강맹함이 담겼다.

가죽 북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도철이 입고 있던 옷이 찢어지면서 몸이 휘청 흔들린다.

그런데 도철의 몸이 흔들리는 만큼 소호의 몸에 박아 넣은 용의 이빨도 동시에 흔들렸다.

“큽.”

소호는 이를 악 물었다.

얼마나 힘을 줬는지, 두 눈에 실핏줄이 터져서 눈앞이 붉어지는 듯했다.

도철의 철조가 소호의 피부를 뚫고 상처를 후벼 파고 있었다.

들고 있던 박도는 놓아 버렸다. 양손을 바깥쪽으로 휘둘러 동시에 커다란 원을 그렸다.

고오오오―.

소호는 고통 속에서 오히려 한 걸음을 더욱 앞으로 나아갔다.

왼발은 땅을 단단히 받치고, 오른발로는 진각을 내딛으며 강한 반탄력을 허리로 끌어냈다.

으득―.

이빨이 부러질 정도로 입을 세게 다물었다.

백호추산(白虎推山).

호권 최후의 초식이자, 강맹한 권격이 도철의 양쪽 가슴을 동시에 후려쳤다.

뻐어억!

“쿠억!”

도철의 몸을 감싸고 있던 은은한 적색 빛.

용의 형상이 깨어지며 철조를 뒤덮고 있던 강기도 흐트러졌다.

도철은 피를 토했다.

움찔 물러서는 그에게선 내면의 기혈이 모두 꼬여 버린 증상이 역력히 드러나고 있었다.

창백한 낯빛.

입술은 핏기가 가셔서 퍼렇게 물들어 보일 정도다.

“흡!”

싸움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소호는 너덜너덜한 소맷자락을 찢어서 허리에 묶었다.

열 개의 이빨 자국이 복근을 꿰뚫고, 나중에는 옆으로 쭉 할퀴듯이 상처를 늘려 놓기까지 했다.

이대로 두면 상처가 점점 벌어져서 내장이 드러날 터였다.

‘위험해.’

이 정도면 숨만 쉬어도 아파야 하건만, 소호는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고통은 몸이 위험을 알려 주는 경고음이었다.

그런데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니. 그건 목숨이 경각에 달했다는 증거이지 않은가.

“후우…… 후우…….”

소호는 숨을 나지막하게 몰아쉬면서 도철을 응시했다.

몸의 상태를 냉철하게 살피고,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준비했다.

그 순간 소호는 알지 못했다.

허리에서부터 시작된 붉은색 기운이 몸을 덮으면서 상처가 점점 낫고 있음을.

“이 자……식…….”

도철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얼굴로 피를 토해 냈다.

백호추산에 실려 있던 역근경 진기가 강맹했던 탓이다.

“킁. 커헝…….”

도철의 숨소리는 이상했다.

개가 먹은 것을 토해 내듯 몇 번 컹컹거리더니, 두 눈에서 완전히 붉은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도철의 상처가 빠른 속도로 회복되어 간다.

얼굴에서도 핏기가 되돌아왔다.

“웃기지 마라……. 잡아먹는 것은 나다……. 내가 잡아먹을 거다……!”

도철은 네 발로 기듯 몸을 낮췄다.

튕기듯이 몸을 날려 오는 모습은 짐승 그 자체였다.

소호는 반으로 부러진 박도를 다시 집어 들고 정면을 겨누었다.

그리고 왼손만을 움직여서 허리에 찬 철 요대를 쓰다듬자, 소호의 몸에서 흐르던 은은한 법광이 옅어졌다.

그 대신 두 눈에서 범상치 않은 붉은 기운이 강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후…….”

서 있는 모습은 대나무처럼 곧고, 두 눈과 마음은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하다.

야수와 무인.

기나긴 싸움의 시작이었다.

“놀랍다. 저게 사람인가.”

“도철은 알고는 있었지만 괴물이군. 정말 괴물이야.”

“천무공자의 이름은 허명이 아니었어……!”

“그런데 어쩐지 천무공자도 좀 섬뜩하지 않아……?”

“예끼, 이 사람 무슨 말인가. 우린 천무공자를 응원해야지!”

소호와 도철의 싸움을 보는 모두는 단 한 시도 눈을 뗄 수 없는 긴장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일각만 지나도 지루해지고 딴 생각이 나는 게 사람의 본능일진데. 한 시진이 넘게 이어지고 있는 싸움은 여전히 모두의 마음을 뒤흔드는 것이다.

쾅! 쾅!

몸이 떨릴 정도의 폭음이 터져 나올 때마다 연무장은 점점 폐허가 되어 갔다.

“제발 천무공자가 이기기를……!”

“도철 놈아. 천벌을 받을 것이다!”

안휘성 북부.

이곳에는 천무공자와 운명을 함께하는 민초들이 있다.

간절한 염원과 응원은 강력한 주술이나 다름없는 일.

그들은 그들의 응원이 또 하나의 기적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후우…….”

소호는 길게 숨을 내쉬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몇 번의 공격을 막았던가?

―잊었다.

몇 번의 무공을 적중했던가?

―잊었다.

그는 지금 왜 싸우고 있는가?

―모두 잊었다.

소호는 마음이 가는 대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건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완전히 상대방과 무공에만 집중하자 평소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들을 시도하고, 또 그것들이 그대로 눈앞에서 실현되어 펼쳐지는 기적을 목격하고 있었다.

눈이 따라가지도 못했던 도철의 공격들이 이제는 모두 시야에 들어왔다.

도철이 철조를 휘두르면 다섯 개의 검강이 날아오는 듯했다.

바닥을 긁으면서 치솟은 강기가 당장이라도 소호의 몸을 갈기갈기 찢을 기세다.

소호는 날아드는 강기를 고작 세 치 정도의 거리만 남긴 채 아슬아슬하게 피해 냈다.

치이익―.

옷이 찢어지고 피부가 갈라졌다. 마치 타들어 가는 것처럼 피부가 뭉개진다.

몸에 평생 남을 상처가 생겨났지만 소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생존만이 중요할 뿐.

중요한 장기만 지켰으면 되었다.

그런 소호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올라올 때마다 상처는 빠른 속도로 아물어 갔다.

쒜에엑―.

용생(龍生)을 펼치며 달려드는 도철은 여전히 위협적이지만, 소호가 발을 구르자 발밑에서 움직이는 흙덩어리에 막혀서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완벽하진 않지만 흑저 도올의 기묘한 힘이 무의식중에 펼쳐진 것이다.

“크아아앗!”

도철은 몸을 기우뚱거리면서도 끝내 넘어지지 않고 놀라운 경신법으로 소호에게 당도했다.

후우웅― 콰과광!

용의 형상을 한 도철로부터 열 개의 강기가 폭죽처럼 터져 나왔다.

마치 커다란 용이 불을 뿜는 듯했다.

움푹 패는 땅.

박살 난 대리석들이 산더미처럼 비산한다.

쿠우우웅―.

소호는 온몸에서 붉은색 살기를 뿜어내며 오른발을 강하게 굴렸다.

천지를 진동시키는 진각과 함께 대리석 밑의 흙들이 벽처럼 치솟는다.

쩌저적!

일차적인 피해는 막았지만 도철은 흙더미를 가르고 부수며 그 속에서 튀어나왔다.

후드득 떨어진 흙더미가 먼지를 피워올린다.

빙글빙글 도는 몸.

팽이처럼 회전하며 돌진하는 도철의 양손은 용의 입처럼 모여 있었다.

까가가강!

반만 남은 박도의 날이 점점 갈려 나가 이제는 단도만 한 크기밖에 남지 않았다.

“큭!”

미처 다 피하지 못한 힘의 여파가 소호의 팔을 스치고, 어깨를 비스듬히 가르는 상흔을 남겼다.

파라락―.

소호는 연대구품과 제운종을 적절하게 섞어 도철의 모든 공격을 다급하게 피해냈다.

땅이 패고 돌덩이가 튕겨졌다.

철조에 살짝 스쳤을 뿐인데도 옷이 잘려 나가며 피부가 너덜너덜해졌다.

도철의 공격은 일 격, 일 격이 다 치명적이다.

단 한 번이라도 더 격중당하면 곧바로 죽어 버리는 건 당연했다.

소호의 절대적인 거리 감각이 없었다면 지금껏 열 번이 넘게 죽었을 게 분명했다.

그야말로 용호상박.

강대한 용과 민첩하고 용맹한 호랑이의 싸움이다.

“크아아아!”

여러모로 도철은 막강했으나, 이 세상에 무적은 없는 법.

소호가 공격을 피할 때마다 내지르는 반격에 도철은 조금씩 타격을 입고 있었다.

손목, 발목, 손등, 발등.

전신에 성한 곳이 단 한 곳도 없을 지경이다.

손바닥만 한 칼로 베더라도, 정확히 한곳을 끈기 있게 베어 내면 언젠가는 거목도 쓰러지는 법 아니던가?

도철은 진흙 속에서 용쓰던 동물이 탈진해서 쓰러지듯 천천히 침몰했다.

공격의 속도가 떨어지고, 본능적으로 사전에 위기를 알아채던 후각이 무뎌졌다.

아무리 소리치면서 발악을 해 봤자 커다란 흐름은 변하지 않았다.

소호 역시도 크게 지쳤지만, 그때마다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들이 그에게 힘을 주었다.

“힘내라! 천무공자!”

“도철을 쓰러뜨려!”

“할 수 있다! 잘한다!”

쩌어엉!

도철의 철조가 손톱이 부러지며 뒤로 날아갔다. 검지와 중지가 옆으로 꺾여서 피부부터 까맣게 죽어 갔다.

소호의 부러진 박도와 수백 번이 넘게 부딪친 결과였다.

“끈질기군. 그만 포기하고 죽어라.”

숨을 쉬기 힘들어서 바닥을 향해 반쯤 굽힌 몸.

씩씩거리면서도 씹어뱉듯이 말하는 도철의 목소리는 처절하기까지 했다.

“포기해야 하는 건 너다.”

소호는 무서운 살기를 일으켰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

심지어 말로 끝내지 않고 곧바로 몸을 날려 도철에게 짓쳐들었다.

파라라라락―.

소맷자락이 펄럭이는 것과 동시에, 바닥에 내려선 소호의 박도에서 적황색 강기가 치솟아 올랐다.

뿜어지는 기세.

막강한 기파가 도철을 덮친다.

터어엉!

소림의 심지, 무당파의 유연함, 북원의 자유로움이 한 몸에 깃들어 있었다.

힘차게 내딛는 진각이 땅을 뒤흔든다.

쩌어어엉!

천랑도의 일격이 도철의 왼쪽 철조의 손톱 세 개를 부러뜨리고 날려 보냈다.

그걸로 끝이 아니다.

힘을 그대로 살려서 더욱 아래로 내려쳐, 도철의 오른쪽 발등까지도 세 치가 넘게 갈라 버렸다.

단단한 바닥이 쩍―소리를 내며 쪼개졌다.

“칵!”

뿜어지는 피.

또다시 도철의 피가 땅을 적신다.

“용……생……!”

도철의 철조가 다시 한 번 음험한 이빨을 드러냈다.

쩌어엉!

부딪침은 잠시, 도철의 몸이 회오리처럼 회전했다.

파라라락―.

까가가가강!

도철이 멀쩡했다면 용아에 그대로 물어뜯기겠지만, 그의 힘이 많이 빠진 지금은 그래도 버틸 만했다.

소호는 태극검의 묘리로 공격들을 비껴 내면서 차분하게 때를 기다렸다.

극도로 움직임이 빠르니 가볍고 약해 보이지만, 사실은 여전히 사흉다운 막강함을 지니고 있는 게 도철이다.

용아에 한 번이라도 걸리면 신체 어디 하나 날아가는 것을 걱정해야 할 만큼 여전히 한 수, 한 수가 강력하지 않은가.

까가가가강!

‘견디기…… 힘들다……! 내상이 심해지고 있어.’

소호가 믿어 오던 역근경 진기는 한계를 드러냈다.

이제 한계인가? 싶을 때, 다행히 도철도 연이은 공격에 한계를 드러냈다.

그는 통하지 않는 공격을 멈추고 내공을 끌어 올려 다음 공격을 준비하려고 하고 있었다.

‘지금!’

점점 선명해지는 용의 형상을 보며, 소호는 대호(大虎) 같은 기상으로 펄쩍 뛰어올라 용의 목을 물어뜯었다.

푸욱.

으득―.

소호는 이를 악물었다.

썩어도 준치라더니.

마지막까지 도철의 철조 손톱이 소호의 복부를 다시 한 번 관통했다.

경련을 일으키는 근육.

부러진 손톱들이 소호의 몸속에서 기생충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지지 않아! 지금이 맞다!’

소호는 복근에 과도한 힘을 주며 버텨 냈다.

도철의 몸이 움찔 떨렸다.

소호의 반만 남은 박도가 도철의 목덜미 피부를 짓누르고 있었다.

“도철.”

꾸우우욱.

도철은 양손으로 소호의 칼날을 붙잡았지만, 내리누르는 소호의 힘은 그보다 더욱 강했다.

한 손으로 잡은 칼이지만, 그 안에는 막강한 도강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네가 이제껏 짓밟아 온 사람들의 대리자다. 그동안 외면해 왔던 강호의 도리를 바로 세우는 집행자다.”

싸움의 시작 때 했던 말이 이제는 현실감을 띈다.

도철이 악에 받쳐서 외쳤다.

“지랄하지 마!”

“네 죗값을 받아라.”

도철의 목에서 피가 점점 많이 흘러나온다.

“이놈……!”

발악하듯이 몸을 비트는 도철의 목덜미를 점점 더 소호의 칼이 파고들어 갔다.

절체절명의 순간.

단 한 사람의 등장이 소호를 마비시켰다.

스르릉―.

섬뜩할 만큼 날카로운 예기가 소호의 가슴을 겨눈다.

그는 빠르고, 차분하며,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소호.”

그 목소리를 어떻게 잊으랴.

언제 어디서 나타난 건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백색의 단출한 옷, 그와는 대조적으로 날카로운 명검을 사용하는 청년이었다.

“너는 그 이상 사흉을 베면 안 된다.”

소리 없이 나타난 청년.

유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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