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65화 (394/686)

11권 15화

제27장 신수소호(神獸小虎) (15)

“유준?”

소호는 도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되물었다.

손가락이 떨린다.

격전의 여파로 온몸에 열이 나서 김이 나올 정도다. 두 사람의 싸움은 격렬하지 않았던가? 지금 미세한 우위를 점하기는 했지만, 상대는 여전히 상처 입은 짐승처럼 사납게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잠시라도 눈을 떼면 죽는 것은 소호가 될지도 모른다. 방심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생각보다 일찍 만나게 되었군. 네가 예상 밖의 행동을 해 버린 덕분에 지금 황실이 난리다. 온 세상이 뒤집어졌어.”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유준은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목소리가 평온했다.

세상이 뒤집어졌다?

모른다.

소호에게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마 왕진과 유준이 살고 있는 세계만 뒤집어졌을 것이다. 오 년의 시간은 소호와 유준의 거리를 멀리 떨어뜨려 놓았건만.

그럼에도 유준은 엊그제 무산학관에서 헤어진 사람처럼 친근하게 말을 걸고 있었다.

“하핫.”

소호는 나직하게 웃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고 화가 났다.

“황실이 난리라고? 잘됐네. 정신 좀 차리라고 한 짓이니까.”

“아직은 늦지 않았다. 길을 조금 돌아갔을 뿐 함께 갈 수 있어.”

“왕진 태감과 당신은 그게 문제야. 이쪽 사정은 생각도 안 하더라고. 마치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도대체 그런 오만함은 어디서 오는 거야?”

“소호.”

유준은 나직하게 말했다.

“어린애처럼 굴지 마. 조용히 칼을 치우고 물러나라. 도철은 반격하지 않을 거다.”

차분한 말 속에는 절대적인 자신감이 들어 있었다.

도철이 반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한다’는 느낌의 말.

그 말을 듣고 화를 낸 건 소호가 아니었다.

도철.

난폭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개소리 하지 마라! 네가 뭔데 명령질이냐? 개자식, 빌어먹을. 잠시 이런 꼴이 되었다고 우습게 보다니. 난 죽여 버릴 거다. 저 새끼를 잡아먹을 거라고!”

으르렁거리면서 발광하는 도철은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변함이 없는 자였다.

소호는 의외로 도철이 마음에 들었다.

시종일관 똑같은 악랄함이라니.

차라리 속을 알 수 없는 유준보다는 백배, 천배 낫지 않은가.

“그래, 그게 맞지.”

소호는 빙긋 웃었다.

평소와 같은 화사한 웃음.

그 말에 초조함을 느꼈는지 유준의 말이 빨라졌다.

“그만둬라. 지금 물러나서 원래의 약속대로 신년 첫날…….”

소호는 더 듣지 않고 칼을 그어 버렸다.

평생 동안 무공을 익혀온 몸.

소호에게 있어 사람의 목을 베는 일이라는 것은 풀을 베는 것만큼이나 쉬웠다.

손목을 살짝 꺾었을 뿐인데, 그 한 수에 섬뜩한 파열음이 들려왔다.

서걱―.

피부가 갈라지고, 근육이 쪼개진다.

까아앙!

목의 삼분의 일 지점에서 칼이 멈춘 것은, 그나마 유준의 반응이 번개처럼 빨랐기 때문이었다.

푸화악!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 핏물이 허공을 수놓았다.

도철은 그 와중에도 벌떡 일어나 반격을 하려 했다. 번뜩이는 철조에서 강기가 넘실거렸다.

그 끈질긴 집념은 경이로울 지경이었으나, 육신의 한계는 명확했다.

도철은 휘청거리면서 옆으로 쓰러졌다. 어질어질해 보이는 두 눈에선 초점이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안 돼!”

유준의 외침은 공허했다.

“크아아아아!”

비명을 지르는 도철의 몸에서 붉은빛이 물결치며 소호를 향해 흘러나왔다.

소호는 따뜻한 물속에 풍덩 빠져드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극도의 피로감을 호소하던 육체 속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급속도로 흡수되었다.

잔뜩 말라 버린 버섯을 물속에 던져 놓은 것과 같다.

순식간에 활기가 돌고 온몸에 생명력이 흐른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혈류가 빨라졌다.

전신이 나른해져서 다른 생각을 하기 싫을 정도이니, 그야말로 무릉도원이나 다름없다.

“도철! 너도 집혼기를 삼켰던 건가!”

유준은 버럭 소리치면서 도철을 발로 걷어차 버렸다.

퍽! 소리가 나면서 뒤로 나뒹군 도철의 목에서 붉은빛이 점멸하자, 유준은 그제야 손가락으로 목덜미를 찌르면서 점혈을 가했다.

그는 이 상황을 미리 상정한 듯 몸놀림에 망설임이 없었다. 그는 품 안에서 황색 부적을 꺼내 들었다.

따악!

도철의 이마에 부적이 달라붙는 소리가 명료하게 퍼져 나왔다.

우우웅―.

“으음!”

도도하게 흘러오던 붉은빛이 칼로 자른 것처럼 뚝 끊겼다.

소호는 갑작스러운 허탈감에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런 감각은 흑저 도올에 이어서 두 번째였다.

그때 이미 한 번 경험했기 때문일까.

이번에는 짧은 시간 동안 더욱 많은 혼백이 들어온 것 같았다.

소호는 이를 악물었다.

들어올 때는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것처럼 편안했으나, 이제는 그 기운들이 본색을 드러내고 몸속에서는 성난 야생마처럼 날뛰고 있었다.

말 백 마리가 동시에 뛰는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는가?

소호의 몸속이 지금 그러했다.

소호마저 감당하기 힘들 만큼 강대한 내력이 온몸을 미친 듯이 휘돌고 있었다.

얼굴이 울긋불긋했다. 피부가 뜨겁고 힘줄과 핏줄이 피부 밖으로 보일 만큼 돋아났다.

온몸의 근육이 경련하듯 파르르 떨렸다.

“하아…….”

소호는 전면을 노려보았다.

머릿속까지 열기가 뻗치는 듯했다.

점점 생각이 단순해지고 있었다.

적.

유준은 적이다.

때마침 도철에게 응급 처치를 마친 유준이 군더더기 없는 몸놀림으로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유준.”

소호가 움직였다.

쿵.

한 걸음에 십 보가 넘는 거리가 단번에 좁혀진다.

유준은 마치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검을 휘둘렀다.

고오오오―.

소호가 내리치는 도격은 텐챠이의 천랑도였다.

하늘과 땅을 잇는 일격.

도철의 혼백을 절반가량 뺏어간 소호가 폭주하듯 내리친 도격은 막강한 위력을 뽐냈다.

천지를 양단하는 듯한 일격이다.

거대한 신응(神鷹)이 사냥감의 목덜미를 잡아채듯, 날카로운 도격이 유준의 검을 후려쳤다.

콰아아앙! 콰콰콰콰!

처음엔 날카로운 예기가 번뜩였다면, 그 후폭풍은 포탄이 터지는 것처럼 육중하고 격렬했다.

이 정도로 거센 무공은 천하를 뒤져도 찾아내기 힘들다.

“큭.”

유준이 짧은 신음을 흘리며 속절없이 뒤로 물러섰다.

검끝이 쪼개져서 뱀의 혀처럼 갈라졌다.

비틀거리는 그의 몸이 흙먼지로 뒤덮였다. 다급하게 검을 휘두르자, 날아오던 파편들이 조각나며 흩어진다.

이어지는 천랑도 이 격.

소호의 연계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무시무시하게 날아간 비스듬한 참격이 다시 한 번 유준을 노렸다.

“흐읍!”

키이이잉―.

유준의 지팡이 같은 세검이 부러질 듯이 휘어졌다. 그는 정면충돌을 피하고 몸을 비스듬히 돌리면서 해왕십삼기를 전개했다.

넘실거리는 검첨.

검술에 휘말리면 휘말릴수록, 작은 파도가 거대한 해일이 되듯 점점 더 큰 힘으로 덮쳐오는 검술이다.

하지만 소호는 이미 그 검술에 대한 파훼법을 잘 알고 있었다.

답은 단순했다.

막강한 일격이 필요했다.

처음부터 검끝을 후려쳐서 연계를 끊어 버리면 끝나는 일이다.

콰아아아아!

쿠구구궁!

소호의 일격이 단단한 바닥을 삼 장(丈) 너비만큼이나 잘라 버렸다.

천랑도의 웅혼한 기세가 유준의 검술의 맥을 끊어 버렸다.

유준은 뭔가를 결심한 듯 허리를 구부정하게 하며 몸을 낮췄다.

착각일까?

맹인인 유준의 두 눈에서 붉은빛이 번뜩였다.

아직 소호와의 거리는 다섯 걸음이나 떨어져 있었다.

아래에서 위로 치솟는 검날.

날카로운 세검이 기세를 발하는 순간, 소호는 보이지 않는 위협을 느꼈다.

스으으―.

섬뜩한 느낌과 함께 눈앞에서 갑자기 거대한 반달이 그려졌다.

소호는 황급히 몸을 옆으로 돌려 피했다.

서걱!

소호의 머리카락 일부가 잘려 나가며 후드득 떨어졌다.

소호는 힐끗 옆을 보았다.

아직 거리가 꽤 떨어져 있건만, 유준의 검 끝에서 보이지 않는 ‘바람’이 먼 거리까지 잘라 낸 것이다.

그 범위는 무려 십 보가 넘는다.

소호의 머리카락뿐만이 아니라 인근의 단단한 대리석 바닥에도 실금처럼 예리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무려 삼 장이 넘는 거리.

긴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유준의 검이 닿는 것처럼 공격을 가한 것이다.

“하핫.”

소호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머릿속이 단순해진 탓일까?

유준이 여전히 강하다고 판단되니 더욱 즐겁다.

철컹.

소호는 왼손으로 철 요대를 붙잡았다.

쿠우우웅―.

허리춤에서 붉은빛이 뿜어진다. 조금씩 요령을 잡기 시작한 방식으로 발을 구르니 땅바닥이 그에 호응하듯 요동쳤다.

콰과과과!

벽처럼 치솟는 흙덩어리가 유준을 붙잡을 것처럼 앞을 가로막는다.

번쩍!

유준이 수평으로 검을 휘두르자, 성인 남성 다섯 명을 세워 놓은 듯 육중한 흙벽이 비스듬히 잘려 나가면서 미끄러지듯 흘러내렸다.

휘리리릭―.

유준은 눈도 보이지 않는 맹인답지 않게 날렵한 몸놀림으로 반만 남은 흙벽을 뛰어넘었다.

내리치는 검격.

해왕십삼기다.

소호는 칼날이 부러지고 갈라져서 쓸모없어진 박도 손잡이만으로도 무시무시한 도강을 뿜어냈다.

황금색과 핏빛이 섞인 적황색 도강이다.

보이지 않는 바람과 선명하게 빛나는 도강이 허공에서 격렬한 싸움을 이어 나갔다.

쩌저저정!

쒜에에엑!

콰앙!

땅이 패고, 공기가 터져 나갔다.

유준은 소호가 다가갈 때마다 한 걸음을 물러섰다.

당연한 일이다.

유준은 백전연마의 살귀니까.

소호가 가하는 압박을 피하면서 유리한 거리에서 싸우려고 들 것이다.

소호가 도올과 도철에게 행했던 전법이기에 소호는 명확히 그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안 되지.”

다만 소호는 사흉들과 다르다.

도올처럼 자신의 육체를 과신하지 않고, 도철처럼 맹목적이지도 않다.

소호는 머릿속까지 열이 올라 생각이 단순해졌지만, 천무공자로서의 무공 지식을 잊을 정도는 아니었다.

고오오오―.

소호는 공격에 정신을 집중했다.

공격일변도.

그깟 보이지 않는 공격 따위는 뚫어 버리겠다는 의지로 충만했다.

천랑도.

역근경에서 기반한 역발산기개세의 힘이 천재지변처럼 한 사람에게로 쏟아져 내렸다.

쿠구구궁―.

연무장 바닥이 터지고, 그 여파가 해일처럼 쏟아지며 유준의 몸을 멀리 밀어냈다.

쿠웅!

거기에 소호가 내딛은 진각이 흙더미의 파도가 되어 유준을 휩쓴다.

유준은 직접적인 공격은 보이지 않는 풍도(風刀)로 잘라 내되, 자신을 밀어내는 힘에 저항하지 않고 더욱 거리를 벌렸다.

키이이이잉―.

까가가강!

유준의 주변에만 커다란 막이 씌워진 듯했다.

빠르고 정확한 검술이 주변의 파편들을 모조리 쳐 낸 탓이다.

소호가 움직인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손잡이만 남은 박도를 던져 버리고, 양손을 모아 합장을 한다.

승려의 예를 취하는가?

아니다.

능공천상제(凌空天上梯).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른 소호가 양 다리를 교체하면서 순식간에 허공을 딛고 거리를 좁혔다.

모든 것은 유준이 소호의 공격을 피하고 막는 순간에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천랑도의 여파를 쳐 내던 유준이 당황하는 것은 당연한 일.

그는 황급히 거리를 더 벌리기 위해 뒤로 몸을 피했다.

그 순간.

파라라락―.

소호의 양손이 천수관음(千手觀音)처럼 수십 개로 늘어났다.

수많은 손 그림자가 마치 후광처럼 보일 지경.

도대체 어떤 공격을 가할지 알 수 없는 그 찰나, 소호의 우권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격하며 정권 일타를 날렸다.

퍽!

“……!”

유준은 몸이 갈지자[之]로 꺾인 채 뒤로 날아갔다.

공기가 터져 나가는 파공음은 뒤이어 들려왔다.

쒜에에엑―.

막혀 있던 둑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강대한 기파가 유준의 몸을 뒤로 끊임없이 밀어냈다.

구르고, 휩쓸리며 날아간 유준이 어느새 넓디넓은 연무장의 끝자락에 간신히 걸쳐진다.

터엉!

단단한 돌 벽에 등을 부딪힌 유준이 쿨럭― 기침을 토해 낸다.

소호는 정권을 내지른 자세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황금색 기파.

고요한 무신의 기척을 두른 채, 몸을 낮춘 맹수처럼 유준을 응시한다.

“백보신권……!”

유준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리면서, 피 가래를 토해 냈다.

도철이 있던 곳을 돌아보았지만 그가 황급히 일어서서 연무장 너머로 도망치는 것을 목격했다.

“후훗.”

유준은 비웃듯이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후훗, 강해졌구나. 괴물이 다 됐어. 소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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