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66화 (395/686)

11권 16화

제27장 신수소호(神獸小虎) (16)

소호는 말없이 유준을 응시했다.

자신의 무공 경지보다 더욱 큰 힘을 아낌없이 뿜어냈는데도 내면의 진기는 진정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애써 힘을 끌어 올리지 않아도 온몸에 융통무애하게 진기가 넘쳐흐른다.

지치기는커녕 오히려 투쟁심만 점점 더 커졌다.

시야가 점점 좁아진다.

두근― 두근―.

심장이 말발굽 소리처럼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싸워라.

쓰러뜨려라.

다 부숴 버려라.

폭력을 종용하는 과격한 말들만 계속해서 들려왔다. 머릿속이 뜨겁다. 아니, 뜨겁다 못해 타 버릴 것 같았다. 적아를 구분하기도 힘들 지경이다.

“백보신권이라니. 정말 너는 못하는 게 없구나. 부러워. 정말 부러운 재능이다.”

유준은 마른기침을 몇 번 토해 낸 뒤 몸을 추스르며 말했다.

“잘 들어라. 지금쯤 머릿속이 뜨겁겠지. 네가 택할 길은 하나다.”

유준은 보이지 않는 막대기를 입에 문 것처럼 갑자기 소리 없이 우물거렸다. 잠시 기다리자 소호의 귀에 전음입밀을 통해 작지만 또렷한 소리가 들려왔다.

“왕 태감님의 휘하에 들어와라. 그래서 신(神)을 만나야 해. 그러지 않으면 죽는다.”

유준은 소호의 대답을 듣지 않고, 품 안에서 작은 주머니를 하나 꺼내 바닥에 툭 던졌다.

“집혼기를 진정시키는 부적이다. 믿든 안 믿든 자유지만, 쓰는 걸 추천하겠어. 그렇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 테니까. 잊지 마라. 신년 첫날. 황학루에서 기다리겠다.”

유준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리려고 했다.

‘가려고? 못 보내지.’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종이에 적어야 할 정도였다.

그냥 보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소호는 단번에 거리를 좁혔다.

짓쳐드는 몸.

강맹한 소림권이 맹호처럼 유준을 덮치려는 그 순간이었다.

쓰아아아악―.

소호는 섬뜩한 느낌에 몸을 뒤로 젖혔다.

예상하고 있었던 걸까?

분명히 뒤를 돌아서 있었는데, 유준은 소호의 움직임이 보이는 듯 정확히 그를 노려 옆구리 사이로 날카롭게 검을 찔렀다.

촤아악―.

유준이 입고 있던 거친 학창의가 한 박자 늦게 잘려 나갔다.

자신의 옷을 방패 삼아 암습을 한 셈이다.

소호는 간신히 검을 피하느라 뒤로 젖혔던 몸을 바로 세우고 곧바로 양손을 허리춤에 갖다 댔다.

우득―.

강하게 거머쥐는 양 주먹.

양손을 동시에 내미는 호권이 벼락처럼 튀어나간다.

한 마리 맹호의 발길질처럼 기습적인 권격.

소림오권 중 백호추산이다.

터엉!

강렬한 진각과 함께 정말로 산을 떨쳐 울릴 것처럼 강렬한 힘이 터져 나왔다.

스릉―.

유준은 소호의 무공과 맞상대하려고 하지 않았다.

권격을 피하고, 피하자마자 비스듬히 검을 베어 올린다.

우우웅―.

쩌정!

유준의 세검에는 불길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분명히 소호가 싸움을 이끌어 가고 있음에도, 어디선가 보이지 않는 칼날이 튀어나와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소호는 맨손으로 검을 마구 쳐 냈다.

나아가면서 반선수, 물러서며 태극권.

손목과 손목이 닿는 순간에는 십이금룡수(十二擒龍手)가 과, 반, 착의 묘리로 유준의 손목을 휘감아 당기려고 들었다.

소호가 생각을 하고 행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그는 머릿속이 몽롱했다.

그저 몸에 익힌 무공.

숨 쉬듯 자연스럽게 온갖 절기들을 상황에 맞게 뿜어낼 뿐이다.

“후훗, 장소호!”

유준은 입가에 묻은 피를 닦지도 않고 웃음을 터뜨렸다.

십이금룡수로 전개된 과, 반, 착의 공격을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낸 뒤 텅! 소리가 나도록 손목과 손목을 거칠게 부딪쳤다.

평소에 몸에 피 한 방울 묻는 것도 싫어하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유준은 거칠게 달라붙어 소호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부딪쳤다.

피와 땀이 섞이고, 이마에 상처가 나는 것도 개의치 않는다.

꾸웅!

퍽― 소리가 나면서 진득하게 피가 흘러내렸다.

무공 중에 석두공(石頭功)이라는 게 있다.

그저 시전 잡배들의 싸움처럼 박치기에 불과하지만, 나름대로 특별한 단련법을 사용해 머리를 튼튼하게 단련하는 무공이다.

유준은 그런 석두공을 쓴 것도 아니었다.

그저 맨몸으로.

온몸에서 강기와 막강한 기파를 뿜어내는 소호와 이마를 맞댔고,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지금은 누가 짐승인가?”

소호는 숨이 뜨거워질 정도의 분노와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서늘함을 동시에 느꼈다.

소호의 눈빛이 달라지자, 유준은 구름 같은 몸놀림으로 훌쩍 뒤로 물러섰다.

후우웅―.

반사적으로 날린 주먹에 백보신권의 묘리가 담겼다.

공기를 잡아 뜯듯 먼 거리를 격하고 강인한 권격으로 꿰뚫는다.

터어엉!

유준은 기다렸다는 듯이 빙글 몸을 회전시키더니 칼을 비스듬하게 세워 들었다. 그는 백보신권의 힘을 거스르지 않고 뱀처럼 타고 넘으면서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까드드득-

“같은 무공이 통할 것 같나?”

따앙!

쩌저저저정!

좁은 공간 속에서 두 청년의 무공이 미친 듯이 얽혀 들었다. 손가락을 꼿꼿이 모은 채 수십 번의 장타를 쳐 내는 소호.

그리고 손잡이를 짧게 쥔 채 끊임없는 검격을 쏟아내는 유준이다.

아라한신권(阿羅漢神拳).

해왕십삼기.

소호의 어깨가 갈라지며 피가 솟구치고, 유준은 옆구리에 권격을 맞아 갈비뼈가 부러졌다.

“쿨럭.”

유준은 방어만으로는 소호를 진정시킬 수 없다고 판단한 듯 보였다.

그는 가느다란 세검을 들어 올리며 기이한 진언을 읊었다.

소호는 그 뜻을 알 수 없는 구결이었다. 그에 공명하듯 세검이 파르르 떨리며 붉은빛을 더욱 강하게 내뿜었다.

콰직! 푸화악!

가볍게 내딛은 발걸음에 땅이 부서지고, 쾌속으로 움직이는 검끝이 기묘한 잔상을 남긴다.

음험하면서도 섬뜩한 기운.

달빛 한 점 없는 어두운 밤에 드러난 맹수의 눈빛 같은 검술이었다.

유준의 백귀검(百鬼劍).

그중에서도 만월귀살(彎月鬼殺)이 펼쳐졌다.

섬뜩하면서도 쾌속한 검술이 날카로운 예기를 품은 채 소호의 가슴을 노렸다.

소호는 자신이 저 무공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답은 막거나 맞는 법뿐.

‘막는다.’

소호는 양손을 크게 휘돌리며 손바닥 사이에 유준의 검을 끼워 넣었다.

끼리리릭―.

태극권의 끈질긴 흡착력이 유준의 검이 향하는 방향을 거세게 비틀었다.

파르르 떨리는 검첨은 마치 강물을 거슬러 오르다가 흐름이 뚝 끊긴 연어와 같았다.

그런데 포기하지 않는다.

유준이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짓더니, 막강한 태극권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요동치면서 자신의 결을 되찾았다.

푸화악!

“……!”

바늘귀를 꿰뚫는 듯한 집요하면서도 섬세한 검 놀림 끝에 소호의 귓불이 베여 나갔다.

그나마 가까워서 그 정도.

한 걸음이라도 더 뒤로 물러났다면 귀가 통째로 날아갈 뻔했다.

소호의 등 뒤에 있던 담벼락이 비스듬히 잘려 나가며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마지막에 비틀다니?’

소호는 분명히 보았다.

유준은 소호에게 더 큰 상처를 입힐 수 있었음에도 귓불을 조금 베어 내는 것으로 공격을 끝냈다.

쿠우우웅―.

유준은 무사한가?

아니다. 그렇지 않았다.

거대한 태극 문양의 원을 그리던 소호의 양손이 비틀어지며 유준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퍼억!

큰 소리와 함께 날아간 유준이 다시 한 번 피를 토한다.

단단한 대리석 바닥에 유준이 남긴 족적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쿨럭.”

유준은 기침을 한 번 토해 낸 뒤, 의미심장한 얼굴로 소호가 서 있는 방향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눈이 안 보이는 맹인임에도, 유준의 모든 감각이 소호를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싸움은 여기서 끝이라고?’

유준은 말없이 몸을 날려 이번엔 정말로 담벼락을 넘어 사라졌다.

소호는 쫓을 수 없었다.

막강한 힘이 동반되었는데도 승리를 거머쥐지 못하다니.

심지어 어깨가 갈라지는 부상을 입었다. 발을 떼기가 힘들 만큼 급격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아…….”

이전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

흑저 도올의 힘을 얻고, 도철의 힘도 절반 정도 얻게 되자 비로소 보이는 게 있었다.

‘이게 신수의 힘이구나.’

사람의 범위를 넘어선 회복력, 막강한 신체 능력과 혼백의 영력을 바탕 삼아 끊임없이 샘솟는 내공까지.

소호는 자신이 신수의 힘을 얻었음을 분명히 실감했다.

새로운 힘을 사용한 첫 싸움은 끝났다. 그리고 소호는 분명히 이기고 살아남았다.

연무장 내부에서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도철이 도주했다는 사실이 그들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안휘성 북부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도철이 이렇게나 손쉽게 퇴장하다니.

게다가 도철을 도울 것처럼 나타났던 맹인 청년도 무시무시한 싸움 끝에 몸을 날려 사라졌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누구인가?

장소호.

무산학관의 천무공자.

최근에 강호 무림계에 분명히 이름을 남기기 시작한 미래가 기대되는 신성(新星)이다.

“천무공자가 도철을 쫓아냈다……!”

“도철이 쫓겨났다! 안휘성은 자유야! 이제 눈치를 안 봐도 된다!”

“이 사실을 알려야 해! 모두에게 알려라! 도철이 도망쳤다! 천무공자가 도철을 내쫓아 주었어!”

환호하는 관중들 곁에서 사색이 된 채 굳어 있는 것은 흑시군 일천 명이다.

그들은 도철이 도망쳤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도대체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 상황은 어떻게 수습해야 하고,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지.

그동안 행한 악행들은 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지금 당장이라도 대문을 열고 성난 안휘성 사람들이 몰려들 거라 생각하니 당장이라도 짐을 싸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질 정도였다.

“어?”

“저길 봐. 움직인다.”

“천무공자가 움직인다……!”

시선이 움직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치 누가 양손으로 머리를 붙잡고 조종하는 것처럼, 모여 있던 모든 군중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한 사람을 멍하니 바라봤다.

“……!”

“숨이 막힌다……!”

장소호가 걸어갔다.

터벅, 터벅.

피곤해 보이는 걸음으로 폐허가 된 연무장을 걸어간다. 그는 피 냄새가 진동하는 시신 더미를 넘어 도철이 즐겨 앉던 황금 의자로 향했다.

걸음을 걸을수록 힘이 회복되어 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쿵. 쿵.

묵직한 걸음걸이.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 채 당당하게 움직이는 그는 그야말로 황족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만큼 압도적인 품격을 발한다.

소호는 등받이가 반쯤 잘려 나간 황금 의자에 올라갔다.

피가 튀고 더러워지긴 하였지만, 그곳은 분명 이 땅을 지배하던 절대자가 앉던 곳이다.

그곳에 소호가 앉았다.

차분하게.

너무나 황금 의자와 어울리는 모습으로.

“흑시군!”

버럭 소리치는 소호의 얼굴은 불그스름했다.

그건 분노일까.

아니면 권력욕에 의한 격정일까.

흑시군은 소호의 부름에 본능적으로 대답할 뻔한 것을 꾹 눌러 참았다.

소호의 기세는 무시무시했다.

드넓은 연무장을 가득 메운 채. 그것으로도 모자라 일천 명의 흑시군을 숨 쉬기도 힘들 만큼 짓눌렀다.

“황실에서 받은 이 은룡패의 주인으로서 명하겠다. 너희 흑시군들은 모두 내 명령을 따라라. 그렇지 않는다면.”

소호는 서늘한 시선으로 모두를 둘러보며 빙긋 웃었다.

“모두 죽이겠다.”

그곳에 있던 모든 이가 소름이 끼쳐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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