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권 18화
제28장 은자불식(隱者不息) (2)
“내 사사로이 의술을 행하지 않겠다 마음먹었으나 이 꼴을 보고는 손을 안 쓸 수가 없구나. 통재로다, 통재야.”
노인이 꺼낸 황금색 침들은 종류가 다양했다. 손톱보다 조금 긴, 자그마한 세침부터 길이가 한 자가 넘는 대침까지 있었다.
“반백 년도 제대로 살기 힘든 인생,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런 짓을 벌인단 말인가. 손이 뭉개지고 다리가 꺾인 것도 문제지만, 그보다도 혼백을 잃을 뻔한 것이 더 큰 충격일 터.”
한탄을 토해 내면서도, 의술을 행하는 노인의 손놀림은 지극히 섬세했다.
맥을 확인하면서 혈 자리에 침을 꽂아 넣는 손놀림에 막힘이 없다.
의술이라는 것이 침을 꽂는 깊이, 세기, 순서가 모두 중요하지 않던가.
그 복잡한 의술을 행하는데 모든 것이 숨 쉬듯 편안해 보이니, 노인의 경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뭘, 멍하니 있느냐? 운찬아, 뜨거운 물이랑 깨끗한 천 좀 가지고 오거라.”
“예, 어르신.”
그제야 정신을 차린 조서인도 가만히 있을 수 없겠다 싶어 재빨리 강운찬을 따라 나섰다.
그는 객잔의 주방에서 펄펄 끓고 있던 물을 항아리에 담아서 번쩍 들어 올리고 있었다.
사람 몸통만 한 항아리에 물이 가득 담겨 있는데도 힘든 기색도 없다.
“제가…….”
조서인이 항아리를 받아 들려고 하자 강운찬은 고개를 저은 뒤 눈짓으로 햇볕에 말리고 있던 새하얀 천들을 가리켰다.
“서인이는 그럼 저것 좀 들어줄래?”
“예.”
따뜻한 물과 흰색 천은 시작이었다.
노인의 치료를 곁에서 보좌다 보니 자잘한 잔심부름이 끊이질 않았다.
물을 갈아 주고, 천을 새로 가져왔다.
몸에서 뽑은 침을 물을 적신 천으로 깨끗이 닦아 내고, 크기 순서대로 정리해 둬야만 했다.
조서인이 멍하니 밖을 내다보니 어느새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신묘한 의술이었다.
자르고, 붙이고, 지지는 행위들이 너무 충격적이다. 지금껏 보아온 의원들과는 전혀 달랐다.
“일단 처치는 다 했다. 뭉개진 손은 형태야 조금 보기에 안 좋지만 피와 기가 흐르고 있으니 회복할 수 있을 거다. 단, 검사의 감각까지 되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구나. 그건 전적으로 이 아이의 몫일 터.”
노인은 막강한 힘에 뭉개진 데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 몸처럼 달라붙은 피부들을 세필같이 가는 칼로 섬세하게 잘라 내고 떼어 내어 붕대로 감아 손 모양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동안 보약만 지어 주던 의원들만 보아 와서 그런 걸까. 이렇게 보고 있으니 이제야 정말로 손으로 치료된 것 같았다.
온몸에 꽂혀 있는 황금색 침과 연기를 피워 올리는 쑥뜸들이 두 청년의 기혈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벌써 혈색이 꽤나 돌아온 듯 보였다.
“저 친구 무릎은 이미 다른 사람이 똑바로 잡아 줬더구나. 관절이 박살 나긴 했으나……. 타고난 근력이 있으니 저 친구도 시간이 지나면 걸어 다니는 데 문제가 없을 거다. 무인으로서는 조금 흠이 될지도 모르겠다만.”
노인은 사는 게 더 중요한 것이지 무공 따위는 그다음이라고 말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영육이 어긋나 조화를 이루지 못한 일이다. 일단 비전의 대법을 사용했으니 경과를 지켜보자꾸나. 내일 자정이 될 때까지 저들이 충격을 받지 않도록 조심하거라.”
조서인은 묘한 심정으로 별실에 쓰러져 있는 두 사람, 이태산과 태성천이라는 무산학관 출신 영재들을 바라보았다.
‘사람의 인생이란 정말로 허무하구나.’
무공이란 어떤 의미일까.
평생 연마한 무공을 사용한다는 건 싸운다는 의미인데.
그 싸움의 결과로 이렇게 한순간에 불구가 되어 버린다면?
그렇게 되면 싸운 무인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막연히 알고는 있었지만, 무인으로서의 삶을 적나라하게 목격해 버린 듯한 심정이었다.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도 무인으로 살아갈 가치는 있는 걸까 의구심이 들었다.
“아이야.”
노인은 치료를 마쳤음에도 불같이 타오르는 안타까움과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조서인에게 기세를 뿜어냈다.
“너도 무인이니 미리 말해 두겠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 얻은 것이 아니라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다. 하늘은 구멍이 숭숭 뚫린 성긴 그물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놓치는 것이 하나도 없느니라.”
“천망회회 소이불루(天網恢恢 疏而不漏).”
“바로 그거다. 노자는 읽은 놈이로고.”
노인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에게서는 아무것도 매인 것 없이 자유로운 도인의 향기가 났다.
“명심하겠습니다, 어르신.”
조서인은 황급히 일어나 공손히 예를 취했다.
“어르신, 제 동문들을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꼭 잊지 않겠습니다.”
“이런 것도 인연일 테지. 은혜가 아니니 개의치 말거라. 게다가 치료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한동안은 매일 얼굴을 봐야 할 것이다.”
노인은 뒷짐을 진 채 성큼성큼 걸어서 사라져 버렸다.
몇 시진에 걸쳐 치료한 것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훌훌 털어내고 떠나 버리니, 그야말로 기인이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어르신 대단하지?”
“예. 저기…….”
조서인이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으니, 강운찬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소호처럼 삼촌이라고 불러. 그게 불편하면 강 형이라고 하든가.”
“강 형은 조금…….”
“그래. 그럼 삼촌이라고 하면 되겠네.”
강운찬은 개의치 말라면서 손을 내저었다.
“어르신의 존함은 우 씨에 문환이셔. 혹시 알고 있나?”
“아아!”
조서인은 별호를 듣자마자 탄성을 터뜨렸다.
“흑신의 우문환!”
“하핫, 아네. 맞아, 그분.”
“흑신의께서 이곳에……!”
조서인은 그제야 노인의 치료를 받은 것이 얼마나 얻기 힘든 천금 같은 기회였는지를 깨달았다.
“지금은 은자촌에서 약초나 기르고 계시지만 말이지. 여기엔 저런 분들이 많아. 허름한 화전촌이라고 함부로 재주를 자랑하다가는 큰일 날 거야. 알아둬.”
강운찬은 “서인이의 성격을 보니,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만.”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별실에서 기다리고 있어. 이미 알고 계실 것 같기는 한데, 소호 친구가 찾아왔다고 대형께도 말씀드릴게.”
“대형이라고 하시면……?”
“소호 아버지. 풍운객잔에 왔으니 객주님은 만나고 가야 하지 않겠어?”
“아!”
씩 웃는 강운찬의 양손에는 우문환의 치료를 보좌하느라 튄 피와 약초즙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분도 우리 때문에 고생하셨구나.’
조서인은 다시 한 번 정중하게 감사를 표했다.
“운찬 삼촌. 감사드립니다. 동문들이 일어나면 다시 한 번 인사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별말씀을.”
손을 휘휘 젓는 강운찬에게서는 서글서글한 사람의 매력이 물씬 풍겨 나왔다.
흑신의 우문환만 대단한 것이 아니다.
강운찬, 이 사람의 인품 또한 놀라울 따름이었다. 조서인은 별실로 다시 들어왔다.
이태산과 태성천.
두 사람이 나란히 누워 있는 곁에 앉으니 진하게 배인 약초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었다.
긴장이 탁 풀렸다.
산행의 고단함이 치료를 돕던 피로감과 겹쳐 눈꺼풀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조서인은 눈을 감았다.
잠에 빠져드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
“으음, 음…….”
사람이 잠에서 깨어나는 방식에는 두 종류가 있다.
너무 많이 자서 스스로 눈을 뜨는 경우와, 햇빛이든 소리든 밖의 요인으로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얼떨결에 잠에서 깨어난 조서인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충분히 잔 건 아니다.
시끄러운 것도 아니다.
햇빛이 눈부시게 들어오는 것도 아니다.
“으음?”
그런데 잠에서 깨어났다.
몸이 일어나라고 신호를 보내는 듯한 기분이었다.
도대체 어째서인가?
조서인은 그 이유를 눈을 뜨고 나서 알게 되었다.
“헙!”
심장이 멎는 듯한 기분이라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일 것이다.
조서인은 바닥에 누운 채로 석상처럼 굳어져 버렸다.
그를 내려다보는 눈이 여섯 개.
세 쌍.
범상치 않은 기파를 두르고 있는 노인이 세 명이나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깼군.”
“깼어.”
“잠에서 깼네.”
웬만한 장정 못지않게 기골이 장대한 노인, 몸이 말라서 가벼워 보이지만 어쩐지 손만 대면 베일 것처럼 날카로운 느낌의 노인. 그리고 단단한 몸에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대머리 노인까지.
세 사람 중 범상한 인상이 단 한 명도 없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외모를 지닌 사람이 먼저 움직였다.
“이봐.”
기골이 장대한 노인이다.
그는 허리를 굽히고 마치 어린아이 대하듯 조서인을 마주했다.
“네가 소호 친구라고?”
“예? 아, 예. 그, 그런데요.”
“너 우리랑 이야기 좀 하자.”
백발 백염의 노인이 씩 웃는 모습이 이렇게나 무서울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그는 세 명의 범상치 않은 노인과 함께 다탁에 둘러앉아 있었다.
쪼르르륵―.
은은한 용정향이 구름처럼 퍼져 나왔다.
둥그런 탁자에 단 네 명.
노인들은 숨이 막힐 정도로 부담스럽게 가까이 앉아 있었다.
“자, 자. 한잔해.”
“자고 일어나면 목마르지?”
조서인은 찻물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는 상태로 찻물을 들이켰다.
‘어? 맛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향기가 제대로 녹아든 찻물이었다.
조서인이 많은 경험을 해 본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그동안 마셔 본 차 중에서도 순위에 꼽을 만한 맛이다.
“차가 맛있네요……!”
“흘흘, 그렇지?”
세 사람 중에 몸이 단단하고 머리가 벗겨진 노인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를 끓여 본 지는 얼마 안 됐어. 난 문외한이다.”
“어…… 맛있는데……?”
“우리 집에 와 있는 놈이 쓸데없이 입맛이 고급이라서 말이다. 그놈 잔소리 들으면서 자꾸 찻물을 끓이다 보니 솜씨가 좋아졌지.”
“아……!”
“그래도 이제는 제법 마실 만한가 보구만.”
본래 만류귀종이라 하지 않던가.
한 가지의 능력이 극에 달하면 다른 종류의 일도 금방 익히는 법이다.
대머리 노인은 노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다도의 극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소개가 늦었구나. 우리는 은자촌의 노인들이다. 소호는 친손주처럼 아꼈지.”
“아끼다마다. 오히려 내 행동을 보고 친손주가 더 섭섭해할 것이야.”
“호강에 겨운 소리 하고 있구만. 손주? 손주가 있으면 당신들은 다 탈락이야. 이 사람들은 외로움이 뭔지도 모르겠구만?”
“뭐야?”
노인들은 자신들끼리 다투다가 갑자기 다시 조서인에게로 시선을 모았다.
“크흠, 어쨌든 우리는 은자촌에서도 소호와 친했다고 자부한단다.”
“그러니 얘야, 소호의 이야기를 좀 들려주지 않으련?”
“그래. 무산학관이라는 곳은 지낼 만했는지. 가서 지내다 보니 힘든 적은 없었는지. 그런 것 말이야.”
“그 아이는 무슨 신법을 쓰더냐? 아지랑이같이 움직이는 신법을 사용하지 않던가?”
제각각 다른 내용이지만 핵심은 다 같았다.
소호는 어떻게 지내었나?
조서인은 그 말을 듣자 마음이 따뜻해졌다.
처음에 놀라고 당황했던 마음이 다 사라졌다.
그랬다.
이들은 그저 노인.
외모가 아무리 역전의 용사들처럼 범상치 않더라도, 다들 소호를 걱정하는 할아버지들일 뿐이었다.
“어떤 이야기부터 할까요? 학관의 입학 시험에 늦었던 이야기부터 할까요?”
“뭐야? 그놈이 늦었다고?”
크게 반응하는 노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조서인은 조금조금, 자신이 아는 것들을 이야기로 풀어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