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69화 (398/686)

11권 19화

제28장 은자불식(隱者不息) (3)

“저런, 돼먹지 못한 놈들 같으니. 동창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구만, 똑같아. 어째 시간이 지나도 변하는 게 없어.”

“흥, 어디 관아 놈들이 변한 적이 있답니까? 천 년 전에도 똑같았을 거고, 천년 후에도 똑같겠지.”

“그래도 그렇지. 우리 소호가 그놈 때문에 휘둘려서 무산제전에서 우승을 못할 뻔했다잖아! 그러니 화가 안 나?”

버럭 소리치는 모습에서 소호에 대한 애정이 듬뿍 묻어난다.

특히 체구가 건장한 노인의 애정이 가장 격렬했다.

“이보오, 추 형. 무산제전이니 뭐니 그깟 작은 일에 집착할 필요가 있습니까? 소호는 어차피 큰물에서 놀 몸인데.”

“묵가야. 모르는 소리 하지 마라. 크게 될 놈일수록 떡잎 때부터 두각을 드러내는 거야. 그게 다 나중에 전국을 떠도는 호사가들의 시(詩)가 될 텐데. 그게 어찌 사소한 거냔 말이야.”

“어이구, 극성이오, 극성. 소호 어미보다 더하네, 더해.”

“더해야지 그럼! 이럴 때 챙겨 주지 않고서야 우리가 소호 할아버지라고 할 자격이 없지. 완벽해야 할 소호의 업적에 흠이라도 생기면 안 되는 것이야. 나중에 무산학관에서 주목을 못 받았네, 어쩌네 뒷말이라도 나오면 누가 책임지냔 말씀이야!”

탁자를 탕탕 두드리는 노인의 언성이 화포를 터뜨리는 것처럼 컸다.

“어허, 추 형, 별실에는 환자도 있소. 자꾸 그렇게 소리칠 것이오?”

“크흠! 소리치긴 누가 소리쳤다고 그래?”

단단한 몸의 대머리 노인은 말수가 많지는 않지만, 그만큼 무게감이 있었다.

건장한 노인이 당황하며 헛기침을 했다.

“그래도 그 말에는 동감하오. 소호를 이용해 먹고 괴롭히는 놈들을 가만둬서야 소호 할애비라고 할 자격이 없지.”

“암, 암! 그렇고말고. 광 아우가 옳은 말을 하는구만.”

“그래서 아이야. 결국 마지막에 소호는 어떻게 되었지?”

조서인은 찻물로 목을 한 번 적신 뒤에 안심하라는 듯 노인들에게 웃어 주었다.

“백검회의 음모를 막아 낸 영웅이 되었습니다. 무산제전에 모인 군중들을 향해 왕진 태감이 소호를 칭송하기까지 했지요. 천무공자가 있어서 자신이 무사할 수 있었다고 말입니다.”

“허어.”

어째서일까.

분명 좋게 끝난 결말일 텐데 세 명의 노인들은 불안한 얼굴이었다. 그들은 제각각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신음을 내뱉었다.

“흐음, 왕진 놈. 끝에는 바른 말을 하긴 했구만. 그런데 명성을 얻은 것은 좋지만 영 탐탁지가 않군…….”

“좋지 않군, 좋지 않아.”

“달변가 놈들은 늘 남들을 이용할 생각만 하고 있지.”

노인들은 각자 심각한 얼굴이 되어 걱정을 숨기지 않았다.

연륜이라는 것은 무시할 수가 없는 법이다. 심지어 그들은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지난 세월 동안 그들이 겪어 온 풍파가 어떠한 것들이었나. 보통 사람들이라면 듣도 보도 못했을 일들을 수도 없이 겪어 보았다.

음모, 배신, 책략.

안 좋은 일은 원래 당해 본 놈이 잘 아는 법 아니던가.

“아이야. 그 왕진 놈이 소호에게 뭔가를 주지는 않았더냐?”

“포섭하려고 하는 것 같긴 한데……. 특이하구만, 특이해. 대체 어디에 써먹으려는 거지?”

“황실에서 닳고 닳은 놈이 아무런 대가도 없이 칭찬할 리가 없다.”

“그래, 광 아우 말이 맞다. 그 여우 같은 것들은 공짜로 뭘 해 주는 법이 없지.”

조서인은 입을 꾹 다물었다.

몇 가지 떠오르는 게 있기는 하나, 섣불리 말을 해도 좋을지 판단을 할 수가 없었던 탓이다.

“어르신들, 거기서부터는 제가 대화를 나눠도 되겠습니까?”

잠시 소강상태가 된 그 때, 당당하면서 차분한 목소리가 조서인의 등 뒤에서 흘러나왔다.

주변의 분위기가 변한다.

노인들은 반가워하며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이는 본인들이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나타난 사람을 존중하여 예를 표했다.

‘설마?’

조서인은 허둥지둥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있다.

세월이 흘렀으나 처음에 보았던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

단출한 백창의를 입고 평범한 기운을 두르고 있으나, 그 속에 숨겨진 힘은 천하를 아우르는 사내였다.

“오랜만이구나. 창술은 좀 늘었나?”

풍운객잔의 객주.

소호의 아버지.

장기린.

그가 나타난 것이다.

***

소면은 고소한 냄새를 풍겼다.

산뜻하면서도 진한 향이 콧속에 달라붙는 듯했다. 고기 육수의 뽀얀 색깔은 언제나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 준다.

고기는 꽤나 많았다. 닭고기를 먹기 좋게 쭉쭉 찢어서 잔뜩 올려 두었는데, 정갈하게 뽑힌 면과 어울려 있으니 보기만 해도 마음이 풍족해진다. 살짝 데친 파와 청경채가 올라가 있는 것도 좋았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만큼 보고 있는 사람의 마음도 들뜨는 듯했다.

‘맛있겠다……!’

문제가 있다면 음식을 앞에 두고 함께 앉은 사람이 ‘그분’이라는 점이다.

조서인은 젓가락을 꼭 붙잡은 채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형님, 더 차려드려도 되는데. 정말 이걸로 되겠어요? 일각, 아니 반각만 주시면 제가 요리 하나 내올게요.”

“아니, 가볍게 먹고 싶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 요리도 천천히 맛보면 되는 일이지.”

“그래도……”

“그리고 풍운객잔에서 가장 유명한 요리가 소면이지 않나?”

장기린은 나직하게 웃으면서 조서인에게 손짓을 했다.

“먹어 보거라. 예전부터 풍운객잔의 소면은 줄을 서서라도 먹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았다.”

“예. 감사합니다.”

조서인은 장기린이 젓가락질을 시작하는 것을 확인한 후, 천천히 소면을 들어 올렸다.

후룩―.

촉촉하게 국물을 머금은 소면이 입안에 들어오는 순간, 고소한 향기의 정체였던 진한 육수가 입안을 한 가득 채웠다.

‘맛있다……!’

조서인은 며칠 굶은 사람처럼 정신없이 젓가락질을 했다. 뜨끈한 국물, 부드러운 고기, 매끈하면서 쫄깃한 소면의 면발이 조화를 이뤄 환상적인 궁합을 이뤄 낸다.

겉보기엔 단순한 듯하지만, 시전에 파는 소면에서는 절대로 맛볼 수 없는 제대로 된 맛이었다.

조서인이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소면의 국물까지 싹싹 긁어 먹은 뒤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더 줄까?”

그때 옆에 있던 강운찬이 기다렸다는 듯이 소면을 한 그릇 더 내밀었다.

조서인은 어째서 처음에 식사를 준비할 때 강운찬이 세 그릇을 준비해 뒀었는지를 그제야 알아챘다.

조서인이 정신없이 먹을 줄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괜찮아. 형님은 항상 한 그릇만 드시거든. 그렇죠?”

장기린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다.

얼떨결에 받아 들고 보니 왠지 부끄러워져서 반대쪽에 앉아 있는 장기린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소면을 먹고 있었으나, 엄지손톱만 한 길이의 수염 사이로 보이는 입매가 조용히 웃음 짓고 있었다.

‘부끄럽다! 너무 부끄러워! 먹을 것만 밝히는 사람 같잖아?’

염치도 없이 소면만 먹어치운 것 같은 자괴감이 덮쳐왔다.

“마, 맛있어서……. 정신없이 먹었습니다.”

“하핫, 숙수에게 최고의 칭찬이네.”

“도대체 어떻게 만드셨어요……?”

“그거? 그냥 소면 만들 듯이 만들었지 뭐. 특별한 건 없어.”

강운찬은 잔말 말고 어서 더 먹으라며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조서인은 얼굴이 빨개진 채 새로 나온 소면을 한 젓가락 다시 입에 넣었다.

희한한 일이었다.

그렇게 부끄러웠는데도, 한 입을 집어먹으니, 마치 처음 먹는 것처럼 또다시 새롭고 맛있게 느껴졌다.

‘이런 소면이 있다니! 소호야, 부럽다! 너는 이런 걸 먹고 자란 거야?’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것 같은 심정으로 조서인은 먹는 것에 집중했다. 눈 깜짝할 새에 소면 그릇은 깨끗하게 비워졌다.

“소면이 맛이 괜찮지?”

“제 인생 최고의 소면이었어요……! 앞으로 평범한 소면으로는 만족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다행이군.”

장기린은 본인도 깨끗하게 비운 소면 그릇을 강운찬에게 건네주었다.

“들었지? 서인이가 소면이 마음에 들었나 봐.”

“하핫, 그러게요. 매번 드시던 분들만 드시니까 몰랐는데, 반응을 보니 아직 실력이 안 죽은 것 같습니다.”

“죽기는 무슨. 늦지 않았어. 지금이라도 대령숙수에 지원하라니까.”

“아, 글쎄, 형님. 저는 여기가 좋아요. 식재료들도 신선하고.”

강운찬은 씩 웃으면서 너스레를 떨더니, 그릇을 받아 들고 밖으로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자연스러운 배려였다.

조용한 객잔 안에는 두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서인아. 환자 두 사람을 데리고 왔다지?”

“아, 예. 같은 무산학관 출신의 선배 두 명인데……. 큰 부상을 입었는데 의원들이 다들 치료할 수 없다고 손을 내저었습니다. 절망적이었는데, 그때 소호가 이 마을로 가면 된다고 추천을 해 주었어요.”

“왜 본인은 직접 오지 않고?”

“으음……. 소호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꽤나 바빠서…….”

“…….”

“하핫, 아마 조만간 찾아뵙지 않을……까요?”

장기린은 조서인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속을 다 꿰뚫어 보는 듯 깊은 시선이 느껴졌다.

“그, 우 신의(神醫)님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잘 치료될 것 같습니다. 대단한 분이세요. 우 신의님은.”

“그분은 대단하시지. 여기에 계셔 주신 덕분에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았는지 모른다.”

장기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도 주변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무게감이 있었다.

조서인도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장기린이 입을 꾹 다물고 있을수록,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신경 쓰게 되었다.

“서인.”

“예, 예?”

“솔직하게 이야기해 줄 수 있겠나? 지금 내 아들놈은 뭘 하려고 하고 있지?”

순간 조서인의 머릿속에서 폭죽이 터진 것처럼 온갖 생각들이 떠올랐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왜 소호 아버님이 자신에게 소호가 하려는 일에 대해 묻는 것인가?

이걸 함부로 말해도 되는 건가?

괜히 말실수를 해서 사달이 나는 건 아닐까?

‘으아아아, 이게 뭐야!’

나는 누구고, 왜 여기에 있는가.

왜 존경하는 창사(槍士)를 앞에 두고, 어째서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가.

혼란에 빠져서 현기증이 나려고 하는 그 때, 장기린은 조서인으로부터 시선을 떼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녀석은 원래 자유로운 녀석이었다. 어릴 때부터 이런 작은 마을에 구속되어 있는 걸 좋아하지 않았지. 그래서 학관에서 담판을 지은 뒤부터는 그저 지켜보았다.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그저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며 도움을 주겠다고 생각만 하고 있었지.”

신선이 땅에 발을 대고 인간이 되면 이런 느낌일까.

속세를 벗어난 초월자에서 한 사람의 아버지로 변모한 장기린은 인간적인 느낌이 물씬 풍겨났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행동이 범상치 않아졌다. 학관을 졸업한 뒤에 한 번쯤 마을에 들를 거라 생각했는데 오지도 않았어. 천천히 오려나 보다 싶었는데, 갑자기 하북에선 왕진의 사흉 중 한 명을 쓰러뜨렸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아…….”

“최근에는 안휘성에 가 있었던 모양이더군. 그러니 묻겠다. 서인아. 소호는 뭘 원하는 것이지?”

인간적인 아버지.

장기린이 진심으로 꺼낸 질문이다.

“소호는…….”

조서인은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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