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권 20화
제28장 은자불식(隱者不息) (4)
“소호는, 왕진 태감의 흑시군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협을 논해야 할 무인들을 힘으로 짓눌러서 통제하는 건 잘못되었다고……. 그래서 무림 강호를 예전으로 돌려놓고 싶다고 말했어요.”
일개 젊은 청년이 무림 강호를 바꾸겠다는 말이다.
말을 하고 있으면서도 스스로도 너무 허황되어서 조서인은 조금 주눅이 들었다.
“그래?”
한데 장기린은 그걸 이상하다고 말하거나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묵묵히 생각을 거듭하더니 곧 차분하게 되물을 뿐이었다.
“괜찮은 목표구나. 준비는 잘 되어 가나?”
“……!”
조서인은 장기린의 반응에 충격을 받았다. 설마 이런 답을 들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탓이다.
비웃음도 아니고, 비판도 아니고.
준비가 잘 되어 가냐고 묻다니?
‘대산파 사람들의 반응하고는 천지 차이야. 이게 이분의 그릇인가……?’
조서인은 고개를 저어 잡념을 떨쳐냈다.
“서인?”
“네? 아, 네. 어, 그게…….”
“…….”
“크흠! 자금도 구했고, 사람도 모으고 있습니다. 안휘성만 잘 마무리되면 큰일을 도모할 만한 기반이 확실하게 잡힐 거라고 주해는 확신했어요.”
장기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해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걱정……되십니까?”
“그래. 걱정하고 있다.”
조서인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소호는 어디로 보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청년이었다. 부모가 자기 아들이 큰일을 도모하는데 걱정하지 않을 리가 없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장기린의 어조가 조금 이상했다.
“강한 의지는 사람을 뭉치게 하지. 하지만 사람이 뭉치면 권력이 생기고, 권력이 생기면 비판을 받기가 힘들다. 높은 관직을 가진 자들이 실정을 펼치거나 부패하고 잘못된 길로 가기 쉬운 이유가 거기에 있다.”
“……네?”
“적을 잘 고르면 만인지적의 영웅이지만, 잘못 고르면 수많은 인명을 죽인 살귀가 된다. 소호는 그걸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 천하에 피해만 주는 녀석이 되면 어찌하는가?”
조서인은 굳어졌다.
가만히 앉아 기억을 되짚는 듯한 장기린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내용도 상상을 초월한다.
그 말 즉슨, 소호를 걱정하는 말이 아니지 않은가?
“저는…… 잘…….”
얼떨결에 모른다고 대답하려 했으나, 왠지 오기가 치밀었다.
아직 젊은 나이.
조서인과 소호가 보통 우정이던가?
동고동락하며 평생을 함께하기로 한 친우였다.
그런 친우의 부모님 앞에서 그를 믿어 주지 않는다면 어찌하겠는가.
“아버님, 소호는 잘 해낼 겁니다!”
조서인은 크게 숨을 한 번 들이켠 뒤 마음을 다졌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소호의 곁에는 제가 있고, 대미미가 있고 섭주해가 있습니다. 소호는 생각이 깊은 친구라서 함부로 결정을 내리지 않습니다. 설령 실수한다고 하더라도……. 제가 꼭 도와줄 것입니다. 반드시 천하에 도움이 될 일을 하겠습니다.”
강한 의지, 미래를 걸고 말하는 약속의 대화였다.
그 말에 어떤 감정을 느꼈을 것인가.
장기린은 잠시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런가. 고맙구나.”
“당연한 일입니다.”
“한 가지만 더 묻겠다. 너에게 소호는 어떤 친구지? 소호를 이겨 보고 싶은 마음은 있나?”
“예?”
갑작스레 널뛰듯이 주제가 바뀌어 버렸다.
조서인은 당황하면서 입을 뻐끔거렸다.
“어, 저기, 소호는 제게 둘도 없을 소중한 친구고……. 소호는…… 대단하지만…….”
사실 학관에서부터 늘 생각해 오던 부분이 아니던가.
조서인은 가슴을 매만졌다.
별것 아닌 일이다.
소호는 대단하다.
전국의 무재들만 모인다는 무산제전에서도 감히 적수가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성적을 자랑했다.
그야말로 이야기 속 주인공과 같다.
어떤 무공이든 한눈에 형(形)과 의(意)를 모두 알아채는 재능.
어떠한 동작도 보자마자 똑같이 행할 만큼 유연하고 탄탄하게 단련된 육신.
그뿐인가.
승부사로서의 감각도 있다.
소호 스스로도 유준 말고는 져 본 적이 없다고 말했었다. 그건 한 사람과의 비무든, 다대일의 전투든 상관없었다. 언제나 상대방에게 상성상 효율적인 무공으로 상대를 압도할 뿐이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곁에서 지켜봐 온 조서인이기에 아는 부분도 있다.
소호는 가끔 지루해 보였다.
동등하게 겨룰 적수가 없다는 사실에 상심한 게 분명했다.
상대가 누구든, 적절한 거리에서 상성상 좋은 무공을 쓰면 이기게 되니 목숨을 건 싸움을 가볍게 보기까지 했다.
그런 소호다.
조서인은 물론이고, 호사가들이 다들 입을 모아 칭송하는 천무공자의 재능을 누가 모르겠는가.
그걸 인정하면 그뿐이지만.
조서인은 차마 그걸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저는…… 인정받고 싶습니다. 소호와 동등하게 겨룰 수 있는 친우이고 싶다고 늘 생각합니다. 소호가 외롭지 않게. 지금은 많이 부족하지만, 느려도 천천히, 단련하다 보면 언젠가는 닿지 않을까…… 생각해요.”
가슴속의 들끓는 열정을 어떻게 숨길 수 있겠는가.
조서인은 본인이 많이 부족한 것을 알지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늘 생각해 오던, 가장 친한 친우와 절차탁마할 수 있는 동등한 위치에 올라서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가.”
나직하게 들려오는 목소리는 분명히 웃음기를 품고 있었다.
조서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장기린의 반응은 이번에도 예상을 벗어났다.
그는 조서인의 꿈을 비웃지 않았다.
“고맙구나.”
“예?”
“함께 온 환자 두 명이 나을 때까지는 이곳에 머물러야 할 테지?”
“네, 우 신의님께서도 한동안은 매일 돌봐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그럼 환자들을 돌볼 때를 제외하고는 마을 일을 조금씩 도와주면 좋겠다.”
“네,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뭐든 말씀해주세요.”
“운찬에게 말해 두도록 하지. 오늘은 마을을 구경하고, 내일 다시 보도록 하자.”
장기린이 떠나는 뒷모습을 조서인은 오랫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
조서인이 풍운객잔에 도착하기 한 시진 전.
장기린은 오랜만에 찾아온 부운화를 손님으로 맞이하고 있었다.
은빛 갈기를 지닌 명마를 타고 나타난 부운화는 선비같이 뽀얀 피부에 주름 하나 없는 얼굴로 밝게 웃었다.
“대형, 잘 지내셨습니까?”
“운화, 너는 왜 늙지를 않는 거냐.”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대뜸 튀어나온 질문에도 부운화는 소리 내어 웃기만 했다.
“제가 할 소리를 하십니다. 대형도 겉으로 보이는 기파 말고는 다 그대로인 거 아십니까?”
“난 나이가 들었어. 아침에 세안을 할 때마다 매일이 다르다. 이게 늙는다는 거겠지.”
“그야말로 별소리를 다 하십니다.”
“근데 너는 사람들이 이십 대로도 보겠어.”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제가 좋아 보인다면 원인은 하나지요. 무당파의 양생술이 도움이 되나 봅니다. 대형께서도 배워 보시렵니까?”
은근히 권유하는 말투에 장기린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도가 경전이라면 청명경 하나로도 충분하다. 더 이상 나를 그 길로 데려가지 마.”
“하핫, 검선께서 주신 청명경이면 충분하긴 하겠죠. 그래도 마음이 바뀌시면 말씀하세요. 무당의 품은 넓어서 언제든 들어와 쉬실 수 있습니다.”
“너도 안 돌아가고 있는 무당파에 날 밀어 넣지 마라. 됐어. 은자촌도 벅차, 나는.”
“은자촌이라. 하핫, 날이 갈수록 점점 은자촌에 어울려지시기는 합니다. 살기가 거의 다 씻기셨어요.”
“휘연과 똑같은 소리를 하는군. 나는 도통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만.”
장기린은 나직하게 웃은 뒤 부운화의 허리춤을 힐끗 바라봤다.
“네가 장군검을 늘 차고 있듯, 나도 그저 상황에 맞춰 살아가는 걸 테지.”
“장군검이요?”
부운화는 자신의 허리춤에 차고 있는 한 쌍의 장군검을 손으로 톡톡 두드렸다.
“여전히 어울립니까?”
“잘 어울린다, 여전히.”
“다행입니다. 아직은 이걸 풀고 다닐 수가 없습니다. 황실분위기가 점점 더 사나워지네요.”
“언제는 안 그랬던가?”
“그렇긴 하지요.”
부운화는 어깨를 으쓱했다.
인사말은 이 정도면 되었다.
본론을 이야기할 때였다.
“대형, 소호 이야기를 좀 할까 합니다.”
“들어와. 차부터 한잔하자.”
차를 한잔하면서 꺼낸 부운화의 말은 상당히 장기린의 예상을 벗어나 있었다.
왕진이 은근히 소호를 포섭하려 움직이는 일.
소호가 왕진이 관리하던 장가구 인근의 비처를 쑥대밭으로 만든 일.
하북에서 유명하던 군벌의 목을 날린 일.
그리고, 최근에 안휘성에서 벌어진 도철과의 싸움.
모든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들은 장기린은 기묘한 심정에 사로잡혔다.
“누가 핏줄은 못 속인달까 봐. 적이다 싶으면 가차 없이 들이받는 모습이 대형과 똑같습니다. 판박이에요.”
“똑같긴. 전혀 다르다.”
“그래요? 제가 보기엔 똑같이 과감한데요.”
장기린은 입을 꾹 다물었다.
부운화가 그의 눈치를 한 번 살핀 뒤 조용히 자신의 잔에 찻물을 다시 채웠다.
“강적을 만날수록 강해지는 모습도 똑같습니다. 그거 아십니까? 하북을 공포로 몰아넣은 흑저 도올. 그리고 안휘성에서 남궁세가를 괴롭히던 흑시군의 대장은 도철이었어요. 왕진이 키우던 그 사흉 중의 두 사람입니다.”
장기린은 과거에 한 번 부딪쳤던 그 기묘한 청년을 떠올렸다.
대천문을 박살 내러 갔었을 때, 노비인 척 조용히 숨죽이고 때를 노리다가 기습을 가했던 음흉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야생 동물처럼 사납고 가벼운 몸놀림.
거기에 철조를 네 개나 끼고 사용하던 용생이라는 무공은 너무나 강렬해서 확실히 기억에 남아 있다.
“신수(神獸)였다는 소리군.”
“예. 저번에 대형이 말씀하셨던 그 신수입니다.”
부운화는 장기린의 과거 이야기를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장기린이 ‘기린’이 되는 과정을 알고 있는 사람은 휘연과 부운화, 그리고 지금은 부운화와 혼인한 남궁연뿐이었다.
장기린은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 비교해 보았다.
소호의 무력.
그리고 그가 직접 느꼈었던 도철의 무공.
“소호가 그 정도로 강했던가?”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그게 의문입니다. 소호가 재능은 있었지만 그래 봤자 후기지수들 중에서만 두각을 나타낼 법한 일류 고수 정도였지요. 그런데 올라오는 기록을 보면 하북에서 도올과 싸운 이후……. 급격히 강해졌어요.”
“그래?”
“예. 흑저랑 싸울 때는 미미나 다른 사람의 도움도 좀 받아서 힘겹게 싸워서 죽였는데. 도철 때는……. 일대일로 당당하게 싸워서 때려눕혔답니다.”
“도철은 죽었나?”
“도망쳤습니다.”
장기린이 또다시 입을 꾹 다물고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그 말은, 소호도 갖고 있다는 거군.”
“예.”
부운화는 침중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갖고 있을 겁니다. 집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