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71화 (400/686)

11권 21화

제28장 은자불식(隱者不息) (5)

집혼기.

장기린이 그 말을 처음 들은 건 도철이 덤벼들었을 때였다.

마치 들개 같은 인상의 사내였다.

도철은 비정상적인 광기에 휩싸인 채 장기린에게 떼를 쓰듯 외쳤었다. 네 집혼기를 내놓으라고. 네 걸 잡아먹겠다며 날뛰던 모습은 짐승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왕진이 준 거겠군.”

“그런 것 같습니다. 그 외에는 습득할 방도가 없으니까요.”

장기린은 명치에서 조금 윗부분을 손으로 매만졌다.

피부 아래 작은 돌기 같은 것이 만져진다. 오랫동안 잊고 살아온 과거의 흔적이었다.

“기분이 이상하군.”

“대형…….”

“이해할 수 없지만, 마음으로 납득이 되는 기분이야. 이런 것이 운명이란 건가?”

“…….”

부운화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는 장기린의 우려를 불식시키듯 단호하게 손을 내저었다.

“대형이 운명을 논하는 말을 들은 것은 두 번째군요. 첫 번째는 항주에서 텐챠이와 부딪치게 되었을 때였지요.”

“그래. 맞다. 그때도 그랬었지.”

“그때와 같은 대답을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대형의 과거가 업이 되어 덮쳐온다는 것은 대형의 착각입니다.”

부운화의 대답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눈앞에 탐나는 물건이 놓여 있다고 한들, 그걸 훔쳐 가면 훔쳐 간 놈이 나쁜 겁니다. 누군가가 재물을 관리하지 못했다고 탓한다면 그건 잘못된 일이지요.”

정말로 그때와 똑같은 말이었다.

한 마디, 한 마디에 장기린과 소호를 걱정하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선하지 않지. 스스로 조심해야 하는 법이다.”

“맞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도둑을 옹호할 필요는 없습니다. 훔쳐 간 놈이 나쁜 겁니다. 이번 일도 그렇습니다. 괜한 일을 벌인 놈이 나쁜 겁니다. 탐나는 재능을 지닌 소호가 나쁜 것이 아니며, 자신의 과거의 업이, 신수의 업이 자식에게까지 돌아온다고 생각하는 것은 부모의 지나친 자책이지요.”

부운화는 마치 칼을 내리치듯 단호하게 단정 지었다.

장기린을 생각하고, 소호를 걱정하는 마음이 진하게 전해져 온다.

그 마음을 왜 모르겠는가.

“잘 알겠다, 운화. 하지만 그렇다 한들, 나는 부모로서 소호에게 가르쳐야 할 것 같다.”

장기린은 침중한 얼굴로 조용히 숨을 가다듬었다.

“조심하라고 일렀건만, 집혼기라니. 어째서 그런 위험한 물건을 받았는가? 그리고 그런 물건을 받았음에도 왜 우리에게 그걸 감췄나?”

“그건 아마 소호가 대형의 도움을 받지 않고 강해지고 싶다는 치기로…….”

“네가 소호를 아낀다면 너무 감싸줘선 안 된다, 운화.”

부운화가 입을 다물었다.

“게다가 집혼기의 힘을 써서 강해져 놓고 도리어 왕진의 사흉을 물어뜯다니. 어째서 그런 일이 벌어졌는가?”

“대형…….”

“왕진만 탓하기엔 소호 녀석이 스스로 그곳에 발을 디뎠어.”

장기린은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아는 사내였다.

부운화의 말도 일리가 있으나, 그럼에도 장기린은 왕진의 탓만 할 수는 없었다.

잘못된 상황에 대해 남 탓을 하다니. 그는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다. 아들이라도 잘못한 일은 잘못한 것이다.

다만, 그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인가는 또 다른 문제다.

“그리고 소호의 잘못은……. 나의 잘못이다.”

“대형,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잘못 가르쳤어.”

깊은 자책.

부모로서의 시름을 느낀 부운화는 잠시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생각하던 부운화가 급히 말을 이었다.

“대형, 그래도 저는 왕진이 원흉이라 생각합니다. 대형께서 분명히 왕진에게 경고했습니다. 저희를 건드리면 그 대가를 치를 거라고. 그런데도 이런 수작을 부리다니. 저희를 우습게 본 것으로밖에 해석이 되질 않습니다.”

소호를 자신의 아들처럼 아끼는 부운화다. 그런 소호에게 은근슬쩍 집혼기를 건네면서 수작을 부린 왕진이 용서가 될 리 있겠는가.

하지만 장기린은 흔들리지 않았다.

과거를 떠올리는 그의 시선이 부운화의 머리 너머 먼 곳을 향했다.

“운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가 기억나나? 함께 나간 첫 싸움에서 텐챠이 친위대를 처음 만났었지”

“잊을 리가 없지요.”

첫 싸움이니 정신없이 싸우지 않았던가.

전투. 피. 시체.

보보마다 시신이 있으니 시산혈해라는 말로도 부족했다.

부운화로서도 안락했던 무당파를 벗어나서 처음 겪는 잔혹한 풍경이었다.

부운화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날을 기점으로 북방 민족들에게 ‘붉은 악귀’라는 이름이 퍼졌으니까요.”

“그날 그곳에서 죽은 자가 얼마인지 알고 있나?”

“전투…… 전투랄 것도 없군요. 학살이었으니. 삼천은 넘어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일천 이백삼십 명. 나 혼자 죽인 숫자야.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날 나는 분명히 피를 즐겼고, 힘에 취해 있었어. 나를 막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경험이란 그래서 소중하다.

이미 겪어 봤기에 그다음에 같은 잘못을 예방할 수 있다.

장기린은 소호의 행동을 들으니, 그 심정을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알 수 있었다.

왜냐면 과거에 그가 이미 경험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경솔하고 어렸다. 그때의 나는 분명 그랬어. 생명의 소중함도 몰랐다. 그렇지만 그래도 지금의 소호보다 나은 점이 있었어.”

“어떤 점이 나았습니까?”

“그때의 나에게는 상관으로서 명령을 내리는 공손 장군이 있었고, 군부소속이라는 올가미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소호의 머리 위에는 누가 있지?”

부운화는 잠시 침묵하다가 답했다.

“아무도 없지요.”

“그렇다면 소호는 어디까지 나아갈까? 붉은 악귀를 넘어서면 어떤 별호를 얻을까?”

“소호는 그럴 애가 아닙니다.”

“내 피를 이은 아이다. 충분히 그럴 수 있어.”

“설령 그렇다고 한들, 대형이 그때 잘못한 게 아니듯 소호도 적에게만 냉혹할 것입니다.”

“…….”

“대형, 살생은 나쁜 일이지요. 하지만 과거를 나쁘게만 보시면 안 됩니다. 저희는 나라를 위해 힘써 싸운 것 아니었습니까?”

“그래. 그랬지. 그렇기에 같은 실수를 반복시키고 싶지는 않다.”

“소호를 왜 믿지 못하십니까? 알아서 잘 해낼 아이입니다.”

“아직 철부지다. 제 잘난 줄 알고 사흉을 사냥하러 다니는 꼴을 좀 봐.”

“소호의 나이 때 이미 대형은 북원에서 붉은 악귀였습니다.”

장기린과 부운화의 생각이 어긋 난다.

적룡기마대 시절로부터 십여 년이 흘렀으나, 그동안 한 번도 없었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 어긋나 있는 그 때, 다급한 발소리가 다가왔다.

“형님, 형님!”

어딘가 즐거운 듯한 목소리.

의족이 발을 딛는 소리가 함께 들리니 그가 누구인지는 두 사람 다 단박에 알아챘다.

“운찬?”

“예, 형님. 소호의 친구가 찾아왔어요!”

강운찬의 방문은 두 사람의 대화를 끝내는 신호와도 같았다.

장기린이 조서인과의 대화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 보니, 부운화는 이미 자신이 타고 온 말을 마구간에서 꺼내는 중이었다.

“대형, 제가 황실에 입궁해야 할 일이 있어서 조금 빨리 돌아가 봐야 합니다.”

“그렇군.”

히히힝―.

은빛 갈기를 지닌 명마가 당당하게 울음을 터뜨린다.

장기린은 가만히 손을 내밀어 뜨거운 숨을 푸르륵― 토해 내는 명마의 콧등을 쓰다듬었다.

“운화, 넌 이미 누가 오는지 알고 있었군.”

부운화는 부정하지 않았다.

“소호의 절친인 조서인이 데리고 온 건 이태산과 태성천이라는 청년입니다. 소호보다 일이 년 정도 먼저 무산학관에 들어갔고, 먼저 두각을 나타냈었지요. 오랜 시간 동안 현무방과 청룡방의 방장이기도 했습니다.”

“현무방? 아, 그 기숙사 말이군.”

“예. 무룡전에서는 소호에게 밀려 우승을 별로 못했지만, 그래도 무산학관 안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무재 중의 무재입니다.”

“왜 다쳤지?”

“도올과 싸우면서 크게 다쳤습니다. 두 사람을 왕진이 보냈지요. 아무래도……. 왕진은 스스로 사흉을 정리하고 싶은 듯이 보입니다.”

“사흉이 악명을 많이 쌓았나?”

“예. 부유한 땅의 백성들이 치를 떨지요.”

특이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나쁜 일을 좀 해야 하지만, 막상 올라가고 나면 나쁜 일을 했다는 평판이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그럼 어찌 될까?

직접 나쁜 일을 수행한 자를 도마뱀이 꼬리 자르듯 잘라 낸다.

어찌 보면 권력층에서 늘 벌어지는 일 중 하나에 불과했다.

“토사구팽인가.”

“그보다 조금 더 내막이 있어 보입니다만 큰 틀에선, 예, 맞습니다.”

장기린은 집혼기를 지녔던 소호를 떠올리고, 속을 알 수 없는 뱀과 같던 왕진을 떠올렸다.

뭔가 조각이 맞춰진다.

혼백을 집약시키는 집혼기.

이미 만 단위의 혼백을 모아두었을 사흉.

커다란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제물이군.”

“예. 아마도.”

장기린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어두운 동굴 안.

하나씩 사라져 가던 소년들.

그리고 그걸 모두 계획했던 양 노인의 광기.

“수십 년이 흘렀건만, 사람은…….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를 않는군.”

부운화는 그 말에 담긴 속뜻을 알아채고 씁쓸하게 웃었다.

“동감입니다, 대형.”

“…….”

“저는 왕진을 적으로 생각하고 움직일 것입니다. 혹시 대형께서 마음에 안 드신다고 하시면…….”

그렇다면 중지하겠다.

부운화의 생략된 말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었다.

“아니.”

장기린은 고개를 저었다.

“네가 가장 잘 알겠지. 너를 믿겠다, 운화.”

“……대형,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말을 해서 마음을 심란하게 했군요.”

“아니다. 다만, 나와는 관점이 다를 뿐이야.”

장기린은 뒷짐을 진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스름하게 해가 지는 하늘은 편안하게 삼산현의 산등성이를 감싸고 있었다.

“지난번에 나갔을 때 나는 천명을 느꼈다. 누군가는 돌아올 곳을 지켜야 하겠지. 나는 은자촌을 지키면서 이제 밖으로는 가능한 한 나서지 않으려고 한다.”

“대형…….”

“대신이라면 조금 그렇지만. 이제 제자를 받아 가르쳐 볼까 싶군.”

“……!”

부운화가 굳었다.

숨을 멈추더니 한참이나 그대로 서 있었다.

“운화?”

히히힝―.

은빛 갈기의 명마가 왜 그러냐는 듯 부운화의 뺨을 핥았다.

그러자 그는 말을 다시 마구간 안으로 밀어 넣었다.

“어? 가는 거 아니었나? 바쁘다면서?”

“더 중요한 일이 생겼습니다.”

“뭐? 황실에 입궁해야 한다면서?”

“그깟 곳, 기다리라 그러지요.”

부운화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차분한 듯하면서도 두 눈이 활활 불타고 있었다.

“누굽니까? 누굴 제자로 맞을 겁니까? 어떤 놈을 보니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까?”

격렬한 질문에 웃음이 나오는 것은 왜일까.

장기린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소호를 이길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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