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권 24화
제28장 은자불식(隱者不息) (8)
시작은 좋았다.
단단한 돌처럼 굳어 있는 흙이지만, 잘 보고 비교적 틈이 있는 곳에 쑤신 덕분에 일 촌(寸) 정도의 깊이는 가볍게 들어갔다.
그런데 그다음이 문제다.
단단한 돌멩이와 중지 끝단이 만난 순간 조서인의 시도는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빡!
“……!”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 조서인을 덮쳐왔다.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전율이 머리끝까지 번개처럼 내달렸다.
“으와아……!”
조서인은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채 부들부들 떨었다.
아직 젊은 나이라고는 하나 거의 모든 평생을 무공을 수련하면서 살아왔건만.
그럼에도 이런 고통에는 익숙해지지 않는다.
문지방에 새끼발톱을 찧은 것과 같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머리를 띵― 하니 울리게 만들었다.
‘무슨 흙에 돌이 이렇게 많아!’
돌도 그냥 작은 돌이 아니라 큰 돌이다.
꺼내 보면 주먹보다 훨씬 클 게 분명했다.
“에라이, 이놈아. 그걸 힘으로 찌르면 어떻게 해!”
빡! 소리가 나도록 뒤통수를 얻어맞은 조서인이 당황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이놈아! 눈물 떨어진다.”
“윽.”
“사내놈이 울기는.”
추 노인은 껄껄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그리 재밌는 건지 좀처럼 웃음을 멈추질 않았다.
“그, 그만 놀리세요, 어르신.”
“못난 놈 같으니. 이놈아, 무산학관에서 수련했다며? 그런데 고작 흙에 손도 못 넣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말은 이럴 때 해야 할 것이다.
조서인은 아직도 얼얼한 손가락을 꿈지럭거리면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게, 외공은 특기가 아니라서…….”
“뭐? 외공은 특기가 아니야?”
추 노인은 이제는 아예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뭐가 웃긴 건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철이도 분위기를 타고 함께 웃기 시작했다.
“헤헷, 헤헤헷.”
“푸하하하!”
조서인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어, 어르신…….”
“이놈아, 외공에 익숙지 않은 무인이 어디에 있단 말이냐. 무산학관이 무림 강호의 무공을 다 모아 놓은 명문 중의 명문이라더니. 다 헛것이네, 헛것이야. 너는 걷는 데도 내공이랑 외공이랑 구분해서 걷느냐?”
바람이 분다.
한마디, 한마디 말이 칼처럼 날카롭게 폐부에 와서 꽂혔다.
껄껄 웃는 노인에게서 깊이를 측량할 수 없는 무의 경지가 느껴졌다.
“이놈아. 외공이 어디에 있고 내공이 어디에 있더냐. 무공이라는 것이 그런 것에 구분이 어디 있어? 그저 내 한 몸 자유롭게 움직일 뿐인데 뭔 생각이 그리 많아?”
“그…….”
조서인은 함부로 답해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가락의 고통은 잠시 잊었다.
먼지를 털고 일어나 자세를 똑바로 한 뒤 진지하게 답하였다.
“사람의 재능은 모두가 똑같지 않으며, 그렇기에 잘하는 것을 더욱 파고들어 한 길의 종사(宗師)가 되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무산학관에서 많은 무공들을 보고 눈에 익혔으나, 철포삼이나 철사장 같은 외공은 익히지 못하여서 그리 답하였으니, 어르신께서는 노여워 마셨으면 합니다.”
“내가 언제 노여워했느냐. 하도 보기에 우스워서 한 말이지. 이놈아. 그래서 한 길만 파겠다고 창술만 연마했다, 이거야?”
조서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곳에 와서 창을 들고 다닌 적이 없거늘.
추 노인은 조서인이 창술을 연마했다는 것을 한눈에 간파했다.
“외공이니 내공이니 말장난하는 것들에게 놀아나지 말거라. 무인이면 무공으로 대결할 때 이길 수 있는 방법만 생각하란 말이다. 만류귀종이라고 했다. 네가 익히는 모든 것이 너를 만든다. 네 생각엔 창술만 뛰어나면 최강이 될 수 있을 것 같으냐? 우스운 소리!”
버럭 내지르는 일갈에는 일생에 걸쳐 깨달은 무공에 대한 철학이 진득하게 담겨 있었다.
“아까 대석이를 보았을 테지? 대석이와 네가 똑같은 수준의 창술을 지니고 있다면 누가 이길 것 같으냐.”
“아……!”
“답은 뻔하지. 물어볼 것도 없어. 힘 센 놈이 이긴다. 명심해라. 강한 힘은 웬만한 문제를 다 해결한다. 그렇다고 네가 타고나질 않았는데 대석이처럼 커다래지라는 게 아니다. 육체를 항상 단련하되 배울 수 있는 건 뭐든 배우면서 탐욕스럽게 강해지라는 말이야. 외공은 못 배웠느니, 이딴 소리 하지 말고!”
조서인은 머릿속에 벼락이 치는 것만 같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인데.
이상하게도 노인이 하는 말은 한 자, 한 자가 마음속에 새겨졌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어르신. 부디 견식을 넓혀 주십시오.”
“오냐, 이놈아. 잘 봐라. 그럼 저 철이 놈은 외공이 뛰어나서 단단한 흙속에 손을 넣었냔 말이야.”
“그건…….”
조서인은 난감해졌다.
철이는 여섯 살밖에 안 되었다고 했다.
타고난 신력이 뛰어나 힘이 셀뿐이지. 무공 절기의 오묘한 이치를 깨닫기엔 아직 너무 어린 나이였다.
그러니 어떻게 자신보다 외공이 뛰어날 수 있겠는가?
“그저 ‘틈’을 보고 흐름대로 손을 넣을 뿐인데.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틈을 보고 흐름대로……?”
“그래. 안 되겠다. 너는 연습을 좀 해야 하겠어. 여기부터 저 끝까지 네가 다 캐내 봐라.”
“예?”
조서인은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더덕 밭은 서인이 지금껏 본 어느 밭보다 컸다.
인위적으로 언덕을 깎아서 만든 밭은 지평선 끝에서 반대쪽 지평선 끝까지가 다 밭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더덕이 끝도 없이 심겨 있었다.
“철아. 너는 도와주면 안 된다, 알았느냐?”
“어어, 음, 네? 어어, 할아버지. 그치만 저 끝까지는 되게 많은데요오…….”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 다 저놈을 위해서니 너는 조용히 하거라.”
“힘든데…….”
“어허.”
철이가 안타까운 얼굴로 조서인의 편을 들어주려 하였으나, 추 노인이 추상같은 목소리로 버럭 소리치자 기죽은 듯이 시무룩해졌다.
“이리 와!”
추 노인은 그런 철이를 번쩍 들어 올리더니 자신의 건장한 어깨에 앉혔다.
“너는 날이 갈수록 무거워지는구나!”
“어어, 엄마가 아빠 닮아서 그렇대요…….”
“하핫, 그건 당연한 말이다. 누가 봐도 너는 대석이 아들이야.”
추 노인은 조서인을 힐끗 쳐다본 뒤 성큼성큼 걸어서 사라져 버렸다.
“어…… 음……?”
휘이잉―.
서늘한 바람이 가슴 속으로 스며드는 듯하다.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인가.
자신은 왜 이곳에 혼자 남아 더덕을 캐야 하는 상황에 처했는가.
‘조금 쓸쓸한데……. 아냐, 아니지. 아까 어르신의 말씀을 들었잖아. 다 나를 위해 해 주신 말씀이야. 틈을 본다……. 흐름에 따른다……?’
조서인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어 잡념을 날려 버렸다.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다시 한 번 손날을 세웠다.
집중하고, 손을 찌른다.
흙속으로 파고든 손끝이 단단한 돌멩이에 부딪친다.
빡!
“……!”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에 옆으로 쓰러진 채 손끝을 파르르 떨었다.
“후우우……!”
조서인은 이글이글 끓는 마음으로 재빨리 다시 한쪽 무릎을 세우고 자세를 잡았다.
“내가 해내고 만다.”
지평선 끝에서 지평선 끝까지.
조서인에게는 캐내야 할 더덕이 너무나도 많이 남아 있었다.
***
“더 빨리! 손을 좀 더 푹 집어넣어야 해!”
“아, 예!”
“이놈아! 흙이 묻어나잖아! 잔뿌리는 또 왜 이리 꺾어졌어!”
“그, 그게…….”
“뭐!”
“아닙니다. 더 노력하겠습니다.”
추 노인은 홀연히 나타나 정신없이 잔소리를 하며 등짝을 몇 번 두드려 준 뒤에 또다시 사라져 버렸다.
“후우.”
조서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잡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그는 손끝에 모든 감각을 집중시켰다.
과(戈), 반(反), 착(捉)의 묘리나, 태극이니 금나수니 하는 정형화된 손놀림.
손을 뻗을 때 그 안에 담긴 철저한 내공 계산도 잊어버렸다.
조서인은 이제 자신이 몇 할의 힘으로 손을 뻗고 있는지도 잊었다.
그의 눈에 보이는 건 오직 두 개뿐이다.
흙. 손.
그리고 머릿속으로는 추 노인이 말한 ‘틈’과 ‘흐름’만을 생각했다.
푹―.
“……!”
그러다 어느 순간, 손이 팔꿈치 언저리까지 쑥 들어갔다.
머릿속을 비우고, 그저 느껴지는 흐름대로 손을 찔러 넣었을 때의 일이다.
깨달음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알고 보니 흐름이란 어려운 게 아니지 않은가.
결(決).
마치 산꼭대기에서 시작된 물이 흐르고 흘러 바다로 향하듯.
손끝에 힘을 뺀 채 결을 따라 밀어 넣으니 별다른 저항 없이 손이 흙속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과한 생각이 흠이다.
숨겨진 묘리라거나 태극의 흐름 같은 것을 생각했던 것이 어리석었다.
‘됐다! 됐어! 답은 역시 다 비우는 거였어. 힘 조절이나, 융통무애한 진기, 금나수 수법 같은 건 다 잊고 흐름대로 손만 찔러넣는 거야.’
눈앞의 흙이 갑자기 생생한 생기를 품은 생명체처럼 보였다.
단단하게 굳어 있던 흙 한 톨, 한 톨의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질 때의 그 환희는 등골을 타고 올라 머리털이 쭈뼛 서는 쾌감을 선사했다.
조서인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꽉 부여잡고, 천천히 손끝의 감각에 집중했다.
‘잡았다!’
손에 잡히는 건 더덕의 뿌리가 분명했다.
가장 두꺼운 뿌리 부분을 붙잡고 살살 흔들면서 꺼내니 흙이 좌우로 갈라지면서, 마치 숨겨졌던 보물처럼 더덕이 솟아올랐다.
“오오오!”
뚝. 뚜두둑―.
“으앗! 안 돼!”
그런데 흙 밖으로 꺼내는 순간 더덕의 잔뿌리가 다 부러져서 바닥에 떨어졌다.
남은 것은 손에 쥐고 있던 큼지막한 뿌리 하나뿐이었다.
“와, 이거 쉽지 않네…….”
하지만 질 수 없다.
무산학관 입관 시험 꼴찌라고 놀림받다가 수위에 거론되는 강자에까지 올라선 조서인이다.
그는 계속해서 흙에 손을 찔러 넣었다.
손톱이 부러지고, 손등의 피부가 쓸려서 피가 나도 개의치 않았다.
찌르고, 찌르고, 찌르고.
더덕을 꺼내 든 게 벌써 수십 뿌리다.
그런데 잔뿌리에 상처 없이 꺼내는 게 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후우.”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해가 지려고 하고 있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노을빛이 은자촌을 둘러싼 흑산과 백산, 그리고 그 중간의 신령한 산을 모두 밝혀 주고 있었다.
붉게 빛나는 하늘과 어딘가 신령해 보이는 세 개의 봉우리.
묘한 기분이었다.
계속해서 수련하는데 지치지를 않는다. 오히려 조서인의 내면에서 더욱 큰 열정만 샘솟았다.
“삼분지 일도 못 왔네…….”
조서인은 끝이 안 보이는 더덕 밭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잠깐 숨만 고르고 다시 하자.”
해가 지고 기온이 낮아지고 있었지만, 조서인의 열정은 더욱더 불타오른다.
잠시 쉬던 조서인이 수련을 재개했다. 이제는 아예 겉옷도 벗어 던지고 흙을 찌르는 것에 몰두했다.
푹. 푹.
어두워진 더덕 밭에서 흙을 찌르는 소리만이 연이어 울려 퍼졌다.
***
“촌장.”
추묵환.
장기린의 의형제인 추룡의 아버지이자, 장강에선 신처럼 추앙받는 장강용왕(長江龍王)이 뒷짐을 진 채 더덕 밭을 내려다보았다.
“괜찮은 아이일세. 심성이 좋다더니. 진짜 그래. 밝은 녀석이야. 소호랑은 또 다르군. 그리고 포기할 줄을 몰라.”
“대석도 그렇게 말하더군요.”
장기린은 추묵환과 나란히 선 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키울 건가?”
“제가 어릴 때부터 피를 보지 않고……. 밝게 컸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드는 친구입니다.”
“그래? 그건 소호도 마찬가지 아닌가.”
“소호는…….”
장기린은 잠시 말을 골랐다.
“좀 다릅니다. 그리고 소호를 위해서도 필요한 친구지요.”
“즉, 소호에게 절차탁마할 친구가 필요하다? 허허, 하긴 소호가 너무 뛰어나서 동년배에 적수가 없긴 하지. 그놈 참, 난놈이란 말이야. 내 장담하지. 소호는 무림 강호 역사에 이름을 남길 것이야.”
허허 웃는 추묵환에게서는 소호에 대한 애정이 진하게 묻어났다.
장기린은 말없이 더덕 밭을 내려다보았다.
“좋은 쪽……이었으면 좋겠습니다만.”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아닙니다. 그리고 저 친구 쓰러지겠습니다.”
“뭣이?”
추묵환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더덕 밭의 끝에 거의 다다른 조서인이 마지막 더덕을 들어 올린 채 옆으로 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