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75화 (404/686)

11권 25화

제28장 은자불식(隱者不息) (9)

“으음.”

잠에서 깨어난 조서인은 어색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대체 언제 침소로 와서 얌전히 이불까지 덮고 잠을 청했는지 기억이 도통 나질 않았던 것이다.

“더덕 밭……. 더덕…….”

더덕. 흙. 손.

단편적으로 이어지던 기억이 머릿속에 섬광을 피워 올렸다.

“아차! 나, 더덕 다 캤었나?”

허둥지둥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찌릿―하고 오른손에서 고통이 전해졌다.

조서인은 자신의 오른손이 붕대로 칭칭 감겨 있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다.

더덕을 캐다가 정신을 잃었고, 아무래도 누군가가 데려와 치료를 해 준 것이 분명했다.

‘팔은 치료되어 있고, 상의도 갈아입혀져 있고. 이럴 수가, 무인이 되어 가지고 경계심도 없이 이런 꼴이라니.’

무산학관에서 배운 것들이 무색했다. 조서인은 크게 부끄러워져서 얼굴이 붉어졌다.

아무도 질책하는 사람이 없었으나, 그렇기에 더욱 자책하고 반성하게 되었다.

“일어났는가?”

멍하니 잠시 앉아 있으니 방문 밖에서 연륜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서인은 허둥지둥 일어나 문을 열고 흑신의 우문환을 맞이했다.

백발백염에 검은색 옷.

신선 같은 풍모는 여전했다.

우문환은 들어오자마자 은근히 질책하는 말투로 물었다.

“팔은 좀 어떤가?”

“괜찮습니다, 어르신. 역시 어르신께서 제 손을…….”

“크흠!”

우문환은 불쾌한 기색을 담아 기침했다.

“보기보다 무모하군. 어찌 그리 본인의 몸을 함부로 다룬단 말인가. 기(氣)를 다루는 경지에 오른 사람이, 어찌 그리 막무가내야?”

“아…….”

“게다가 기력을 다해 정신을 잃기까지 하다니. 그러고도 무인이라 할 수 있는가?”

언성을 높이지도 안색을 붉히지도 않았건만.

나지막한 질책은 그 어떤 꾸지람보다도 조서인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아이야.”

“예, 어르신.”

“과감한 것과 무모한 것은 다르다. 무인이라는 사람은 평소에 황족보다도 더 유난을 떨어야 한다. 네 몸이 곧 재산이고, 네 몸이 곧 힘이지 않으냐? 작은 상처가 곧 죽음으로 이어지는 꼴을 나는 너무나 많이 보았어.”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대답은 잘하는구나. 고얀지고. 마음 같아서는 한 열흘 쓰라려 하면서 반성했으면 좋겠다만, 이왕 의술을 펼치기로 한 몸이 그래서야 안 되겠지.”

우문환은 품속에서 주먹만 한 가죽 주머니를 꺼내 바닥에 턱하니 내려놓았다.

“이것은……?”

“별거 아닌 고약이다. 하루에 두 번. 상처 부위를 물로 깨끗이 씻은 뒤에 발라 주거라. 함께 넣어둔 환(丸)들은 기력을 돋워 줄 테니 당분간 정오가 되어 양기가 충만하면 한 알씩 먹고.”

주머니를 받아 드는 조서인의 손이 떨렸다.

강호 무림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신의(神醫)가 주는 약이다.

말처럼 별거 아닌 약이 아닐 터.

흑신의가 만든 고약이라고 하면 밖에서는 천금을 부르는 자도 있을 것이 분명했다.

“어르신. 이 귀한 것을……!”

“어허, 별거 아닌 약이라니까. 냉큼 그거 갖고 나가거라.”

조서인은 곧바로 나가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의술을 도와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도움은 무슨. 저놈들 몸이 꽤나 다부지더구나. 회복이 빨라서 지금은 별로 할 일도 없다. 게다가 조금 이따가 운찬이가 오기로 했어.”

“아……!”

우문환의 말대로 방 한구석에 누워 있는 이태산과 태성천은 확연히 안색이 좋아져 있었다.

처음에 창백했던 얼굴에서 이제는 도화빛이 돌고 있다. 흑신의의 의술이 빛을 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보다 오늘도 널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 객잔으로 가봐.”

우문환이 쳐다보지도 않고 손만 내저으니, 조서인은 밖으로 나오는 것밖에 도리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조서인은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바닥을 짚고 이마를 땅에 대는 움직임에 온 정성을 다 쏟았다.

“어허! 별거 아니라니까! 이제 보니 이놈이 날 놀리는구나. 날 이렇게 부끄럽게 만들 거야?”

“아닙니다, 어르신.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버럭 소리치는 우문환의 고함을 피해 조서인은 허둥지둥 밖으로 빠져나왔다.

‘마음이 따뜻해진다…….’

이제껏 어떤 어른이 이렇게 그를 챙겨 주었던가?

오른손에 칭칭 감겨 있는 붕대에서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어제의 추 노인도 그렇다.

말로는 나무라도 더덕을 캐는 법의 핵심을 툭툭 말로 던져 주면서 가르쳐 주려 애쓰는 게 느껴졌다.

조서인은 우문환이 준 가죽 주머니를 품 안으로 소중하게 챙겨 넣었다.

“와아아…….”

조서인은 체면불구하고 인사도 하기 전에 젓가락부터 들 뻔하였다.

눈앞에 놓인 소면 한 그릇 때문이다.

장기린과 마주 앉아 먹었던 것과 똑같은 모양의 소면은 조서인의 눈앞에 턱― 하니 놓인 채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며 조서인을 유혹하고 있었다.

입안을 끈적거리게 만들 정도로 진한 육수와 아삭하면서도 부드러운 청경채. 쫄깃하면서도 입안에 넣으면 툭툭 끊어지는 잘 만든 소면.

그리고 그 위에서 김을 모락모락 피어올리고 있는 부드럽게 찢어진 닭고기.

“고생 많았지? 오늘은 많이 넣었다. 면이 그 날의 두 배야.”

“그, 으, 저기…….”

“하핫! 먹어, 먹어. 이야기는 대충 들었어. 지금 배고프지? 어제 정신없이 땅만 팠다면서? 내가 별일 없으면 계속 밥해 줄 테니까 언제든 먹으러 와.”

강운찬은 힘든 거 다 알고 있다면서 붕대로 칭칭 감긴 오른 손에 젓가락을 쥐어 줬다.

또 한 명, 이곳에 조서인을 따뜻하게 대해 주는 사람이 있다.

소면에서 올라오는 열기 때문일까. 눈시울이 따갑다.

때맞춰 조서인의 배 속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흘러나갔다.

“하핫! 거봐라.”

“……사실 배가 좀 고팠습니다.”

“그럴 줄 알았어. 아차! 젓가락 왼손에 쥐어 줄까?”

“아, 아니요. 잘 먹겠습니다, 운찬 삼촌.”

조서인은 뜨거워진 눈시울을 감추기 위해 재빨리 소면을 입에 집어넣었다.

후루룩―.

“하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입안에 넣으니 생각보다 훨씬 더 뜨거웠다.

아삭―.

그런데도 입안에 들어온 청경채는 여전히 살아 있는 것처럼 생기 있게 씹힌다.

씹히는 순간 입안에 탁― 하고 퍼지는 신선한 향기.

조서인은 참지 못하고 입 밖으로 감상을 토해 냈다.

“맛있다……!”

강운찬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자신감 넘치는 웃음을 지었다.

“끝내주게 맛있지?”

조서인이 연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맛이었다.

정신없이 젓가락질을 하다 보니 어느새 그릇이 바닥을 드러냈다.

운찬이 해 주는 소면의 무서운 점은 국물이 워낙 진하고 끈적해서 면만 먹는 게 아니라 국물도 동시에 먹게 된다는 점이다.

다 먹고 나니 그 흔한 부스러기 하나 없다.

마치 설거지를 한 듯 깨끗한 그릇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후와.”

“하핫 잘 먹네. 더 줄까?”

“아, 아뇨. 너무 많이 먹으면 움직일 때 부대껴서…….”

“후회할 텐데? 내 생각엔 오늘도 힘들 걸?”

조서인은 눈을 끔뻑거리면서 의문을 표했다.

“제가요……?”

“응. 오늘은 대형이 널 보려고 하거든.”

“……!”

운찬의 대형.

즉, 소호의 아버지인 장기린을 말함이다.

“아……!”

가슴이 거칠게 뛰었다.

조서인이 선망하는 무인.

소호의 아버지 장기린과의 만남은 언제나 긴장하게 된다.

“그, 그럼 한 그릇만 더……!”

“하핫, 그렇지? 그럴 줄 알았어.”

운찬은 주방으로 들어가더니 이번에는 납작하고 넓은 접시를 들고 나왔다.

“어……?”

“먹어 본 적 없다고 했지? 향우구육(香芋扣肉)이야.”

“……!”

조서인은 자신이 식탐이 많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소면을 한 그릇 비우긴 했지만 운찬이 면을 두 배로 넣었다고 했으니 두 그릇을 먹은 셈이다.

그런데도 이렇게나 배가 고프고 미친 듯이 고기가 먹고 싶어지다니.

‘아냐, 이건 운찬 삼촌의 실력이 대단한 거야. 너무 맛있으니까. 끊을 수가 없잖아.’

접시 위에 올라간 향우구육은 그 자태부터 완벽했다.

적당히 두툼하면서 길게 썰어낸 통삼겹살을 그와 똑같은 크기로 썰어 낸 토란과 겹쳐 두고 짙은 갈색의 양념을 뿌렸다.

고기와 토란 위에 끼얹은 양념은 또 어떠한가?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양념 위로 잘게 썰어 뿌려진 쪽파가 입맛을 다시게 만든다.

“그거 알아? 구육(扣肉)이라는 말은 썰어 놓은 돼지고기를 쪄서 익힌 요리를 말하는 거야. 구육 중에는 향우구육이 제일이지. 내가 여기 이 통살을 직접 한 번 데친 다음에 기름으로 튀겼어.”

“아아…….”

“데치고 튀기고, 양념을 끼얹은 다음에 다시 한 번 쪄서 익히고. 어때? 보기만 해도 고기가 부드러워 보이지? 이거 입에 넣기만 해도 사르르 녹는다?”

“……!”

며칠 굶은 개가 음식을 본 것처럼 입에서 침이 나올 지경이다.

그냥 구워도 맛있는 돼지고기를 살짝 데치고 튀긴 다음에 다시 찌다니.

그 말만 들어도 식감이 상상이 되지 않은가.

조서인은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왜…….”

“응?”

“왜, 이렇게 맛있는 걸 저에게…….”

“뭐? 뭘 그런 걸 물어보고 그래. 인마, 맛있는 걸 못 먹어 보고 사는 건 너무나 슬픈 일이야. 인생을 손해 보면서 사는 거라니까?”

강운찬은 향우구육이 가득 담긴 접시를 조서인의 앞에 턱― 하니 내려놓았다.

“인생에 즐길거리가 얼마나 되냐? 그중에 먹는 거라도 잘 즐겨야지.”

강운찬이 어서 먹어 보라는 듯이 손짓을 하자, 조서인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앞에 놓인 향우구육을 젓가락으로 살짝 건드려 보았다.

“와……!”

고기의 탱글거리는 감촉이 묵처럼 찰랑거렸다. 젓가락에 힘을 줘 보니 움직임에 맞춰 삼겹살과 토란이 반으로 쪼개졌다.

얼마나 잘 익었는지, 젓가락에 반동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꿀꺽―.

자연스럽게 침이 넘어갔다.

반으로 쪼개지면서 고기 내부의 열이 뜨끈한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윤기가 흐르는 고기와 토란이 입안에 쏙 들어오는 순간 조서인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으음…….”

절로 신음이 흘러나오는 맛.

씹을 때마다 부드러운 식감 사이로 진한 육즙이 배어 나왔다.

“맛있다……!”

“하핫, 이것도 죽여주게 맛있지?”

강운찬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맛있게 먹는 걸 보기만 해도 좋은 듯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조서인의 젓가락질이 점점 더 빨라졌다.

입에 넣어서 몇 번 씹자마자 사라져 버리니, 젓가락질이 빨라질 수밖에 없다.

“맛있나?”

한 접시를 반쯤 비웠을 때, 들어 본 적이 있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큽!”

조서인은 당황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입에 머금고 있던 향우구육을 뿜을 뻔한 것을 간신히 참고 있으니, 장기린은 어제와 똑같이 평온하면서 무심한 얼굴로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운찬, 나는 됐다.”

장기린은 차만 한 잔 받아서 마시면서 조용히 조서인을 바라보았다.

“식사 중에 방해해서 미안하군. 내가 너무 빨리 온 모양이야.”

“아, 아닙니다.”

조서인은 아니라고 하긴 했지만, 조금 전처럼 식욕에 사로잡혀 고기를 입에 밀어 넣지는 못했다.

장기린은 그런 조서인을 보며 부드럽게 웃더니, 차만 한 잔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가 함께 갔으면 하는 곳이 있다. 내게 ‘무공’이라는 것을 알려 준 분이 계시는 곳이지.”

“……!”

충격의 연속.

조서인은 방금 삼킨 향우구육이 체할 것만 같았다.

‘소호 아버님께 무공을 알려 주셨다니. 그럼 사부님이라는 뜻인가? 소호 아버님의 사부님?’

즉, 소호에겐 태사부쯤 되는 존재라는 소리다.

“천천히 먹고 나와라. 난 잠시 별실에 있겠다. 만날 사람도 있고.”

장기린이 밖으로 나간 뒤, 조서인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눈앞의 향우구육은 아깝지만.

매우매우 아깝지만…….

그래도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운찬 삼촌! 맛있는 걸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동적인 맛이었어요.”

조서인은 강운찬을 향해 크게 절을 올린 뒤, 힘차게 풍운객잔의 문을 빠져나갔다.

그의 앞에, 새로운 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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