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권 1화
제29장 황실대망(皇室大蟒) (1)
정오의 뜨거운 햇살조차 어스름하게 숨겨 버리는 울창한 산림 속.
한 무리의 사람들이 각자의 무기를 든 채 살기를 피워 올렸다.
활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지고, 잔뜩 날이 선 외날도와 한손에 들 수 있는 전부(戰斧)가 그들의 대적을 겨누었다.
격전을 거듭하면서 생긴 진한 동료애가 그들 사이에 흐르고 있었다.
검은색 천으로 온몸을 가리고, 가슴에 작게 새겨진 황금색 용문양이 그들의 신분을 증명했다.
흑시군.
최근 들어 가장 많이 회자되는 황실의 무력(武力)이자 대 무림인 전용 군병들이 삼백 명이나 모여 일제히 힘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쿠워어어어―!
모골이 송연해지는 포효가 산림을 뒤흔들었다.
거송의 잎사귀가 태풍이라도 만난 것처럼 흔들렸다. 놀란 새들이 날개를 퍼덕이며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사람인가 짐승인가.
분명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포효하고 난폭하게 구는 모습은 영락없이 짐승이다.
흑시군들은 긴장하여 낯빛이 창백해졌지만 그들 중 물러나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각자 열 명의 흑시군들을 통솔하는 조장들이 조원들을 안심시켰기 때문이다. 그들은 제각각 손을 들어 모두를 준비시켰다.
“대기.”
그들은 사냥꾼이다.
사냥감이 아무리 난폭하고 무섭다고 한들, 사냥꾼이 사냥감을 무서워해야 쓰겠는가.
사냥감과 가장 가까이에 있던 그들의 ‘대장’이 허공에서 주먹을 꽉 움켜쥐는 순간, 조장들이 들고 있던 손을 앞을 향해 내리쳤다.
“쏴!”
백 개의 검은 화살이 일제히 허공을 갈랐다.
쒜에에엑―.
채채챙!
지난 사흘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쫓겼으니 체력이 떨어질 법도 하건만.
그들의 ‘사냥감’은 철조가 단 하나만 남았음에도 놀랄 만한 무위를 선보였다.
날아오는 화살 중에 자신의 몸에 박힐 법한 것들 중의 팔 할을 모두 쳐 냈다.
푹―!
난폭한 방어를 뚫고 피부에 박힌 몇 개의 화살들이 꼬리를 덜렁거렸다.
“크아아아! 이 새끼들아!”
불과 며칠 전만 해도 흑시군의 도철이라고 하면 상대가 누구든 꼬리를 말고 도망쳤을 것이다.
허나 지금은 아니다.
천무공자에게 정면으로 싸워 패배했고, 이제는 왕진에게 죽여도 좋다는 허가가 나온 순간부터 도철은 그저 난폭한 짐승 같은 사냥감에 불과했다.
도철은 철조를 끼지 않은 맨손으로 붕대를 칭칭 감은 자신의 목을 붙잡고 있었다.
그는 몸에 박힌 화살들을 철조로 잡아 거칠게 뽑아 버렸다.
피부가 뜯어지고 피가 뿜어져도 개의치 않았다.
썩어도 준치라고 하던가.
도철은 쫓기면서 초췌해졌음에도 초인적인 능력을 보여 주었다.
훅― 하고 꺼지듯이 사라지는 신형.
비조처럼 날아든 도철이 흑시군 한 명의 가슴을 거세게 할퀴었다.
“끄윽!”
갑주가 갈라진 흑시군은 곧바로 방패를 들고 몸을 숨겼다.
동시에 칼과 전부를 든 흑시군들이 양옆에서 반사적으로 튀어나와 도철을 공격하려 들었다.
“이 새끼들이. 감히 누구한테!”
도철은 튕기듯이 몸을 날려 공격을 피하는 것과 동시에 흑시군 한 명의 어깨를 할퀴고, 다른 한 명의 얼굴을 발로 걷어찼다.
일련의 동작들이 고작 한 호흡 만에 이루어졌다.
뻐억!
섬뜩한 소리와 함께 얼굴을 걷어차인 흑시군의 목이 모로 꺾인다.
하나 남은 도철의 철조에서 핏빛 강기가 치솟았다.
“너희들한테 합격술을 가르친 게 누군데! 배은망덕한 새끼들!”
악에 받친 목소리가 섬뜩한 살기를 띄었다.
철조에서 치솟은 강기가 흑시군 한 명의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퍽― 소리와 함께 터져 나가는 팔목.
순식간에 손이 날아간 흑시군이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끄와아악!”
“물러나!”
그 순간 지금 이곳에 있는 흑시군 부대의 대장이 나타나 도철의 측면으로 치고 들어갔다.
가녀린 몸.
펄럭이는 옷자락 너머로 색목인 특유의 이국적인 피부색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백설지는 갑옷처럼 보일 만큼 붕대로 칭칭 감은 양손으로 도철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쫙 펼쳐진 양손바닥 위로 푸른빛 빙백신기가 가득하다.
뿌옇게 흐려진 안개가 그녀의 몸 주변을 따라다니는 듯이 보였다.
쩌저적!
“카악!”
맨손으로 그녀의 공격을 받아친 도철이 괴로운 신음을 흘리며 훌쩍 뛰어 물러났다.
꽁꽁 얼어붙었던 얼음 조각이 떨어지면서 피부도 함께 뜯어 가 버렸다.
도철의 팔목 부근이 흉측한 속살을 드러냈다. 그는 숨을 몰아쉬면서 백설지를 노려보았다.
“색목인 계집! 죽여 버린다!”
상처 입은 야수처럼 울부짖은 도철이 달려들었지만, 백설지는 정면으로 상대하지 않고 계속해서 공격을 흘리며 뒤로 물러나기만 했다.
“방패!”
그녀가 주먹을 들어 올리자, 스무 명, 두 개 조가 튀어나와 그녀의 주변을 방패로 둘러쌌다.
“이 새끼들아! 비켜!”
도철이 성질을 부리며 강기로 후려쳤지만, 황실 소속 대장장이들이 만든 강철 방패는 도철의 강기조차 막아 냈다.
끼긱―거리면서 방패 위로 발톱 자국을 낸 것이 그의 한계였다.
강대한 힘에 방패병 한 명이 뒤로 쓰러졌지만, 그를 대신할 병사는 백 명이 넘게 있었다.
한 명을 쓰러뜨리면 두 명이.
두 명을 쓰러뜨리면 네 명이 나타나 길을 막았다.
도철은 그물에 걸린 짐승 같은 심정을 느꼈다. 헐떡이는 숨소리가 거칠다.
“이 새끼들! 다 죽여 버리겠다!”
도철이 분을 참지 못하고 더더욱 거칠게 움직였다.
그 순간 백설지가 허공으로 쭉 뻗은 주먹을 활짝 펼쳤다.
“비산!”
피슈슈슉―!
방패병과 함께 뒤로 삼 보 물러서는 것과 동시에 산공독과 독분으로 채워 넣은 가죽 주머니를 도철에게 날려 보냈다.
“폭!”
백설지의 신호에 맞춰 날아든 단검과 화살이 도철의 머리 위에서 독주머니들을 터뜨렸다.
푸확!
우수수 쏟아진 독분들은 안 그래도 지쳐 있던 도철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크아아아!”
무인의 내공을 흩어 버리는 산공독.
사람의 감각을 둔하게 하고 피를 토하게 만드는 혈독이 뒤섞여 뿌연 독연을 만들어 냈다.
흑시군이 사용하던 방식 그대로, 흑시군의 대장이었던 도철을 사냥하고 있는 것이다.
도철은 괴성을 지르면서 몸을 뒤틀었다.
그의 살기에서는 지독한 분노와 고통이 뒤섞여 있었다.
고오오오오―.
두 눈이 피처럼 붉어지고, 아지랑이 같은 열기가 쩍 벌린 입에서 흘러나왔다.
치지직―.
그가 붉은색 기운에 휩싸이는 것과 동시에 백설지에게 입은 상처들이 빠른 속도로 아물어 갔다.
아직 그에게 남아 있는 집혼기의 힘으로 산공독의 독기를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도철은 목에서 손을 뗐다.
그는 광기 어린 눈으로 머리 위에서 양손을 모았다.
“용생……!”
으르렁거리는 듯한 울음소리.
비록 철조는 하나뿐이지만, 그럼에도 양손에서 핏빛 강기가 뿜어지며 용의 이빨을 무사히 만들어 냈다.
“막아!”
다급한 백설지의 외침이 무색하게, 도철의 용생은 앞을 막고 있던 열 명의 방패병을 한꺼번에 뒤로 날려 버렸다.
콰장창!
“쿠억!”
방패가 우그러지고 갑주가 찢어진 흑시군들이 바윗돌에 얻어맞은 조약돌처럼 사방으로 튕겨졌다.
키아아아악―!
도철은 뱀과 같은 기성을 내지르며 한 마리의 용이 되어 백설지에게 돌진했다.
유연하게 꿈틀거리는 몸놀림과 강대한 기세가 만나니, 그야말로 거대한 용 한 마리가 백설지를 물어뜯기 위해 날아오는 모양새다.
우우웅!
허나 이런 형태의 격돌은 이미 백설지가 계획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백설지는 그 흔한 기합성도 없이 양손을 모아 허리 옆에서 머리 위의 허공을 향해 쳐올렸다.
키이잉―.
양손에서 치솟는 빙백신기.
꽁꽁 얼어붙은 얼음 조각이 그녀의 손바닥 위에 달라붙었다.
커다랗게 원의 형상을 취하면서 모아지는 진기.
그녀는 양손의 엄지와 엄지를 서로 모아 손바닥을 나란하게 만들었다.
쿠웅―.
힘차게 내딛는 진각.
바닥에서 시작되어 전신을 휘감은 나선의 전사력이 그녀의 충만한 내공과 만나 막강한 기파를 만들어 냈다.
시작은 그녀의 양손.
마지막도 그녀의 양손이다.
“빙백신장(氷魄神掌)!”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두 눈에 선명히 보일 만큼 집약된 빙백신기가 커다란 구를 형성해서 뭉쳐졌다.
“캬아아앗!”
도철은 빙백신기가 한데 뭉쳐있는 것을 보았으나 피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용생의 위력은 절대적.
신수의 능력으로 몸에 용을 강림시킨 그는 오만할 만큼 두려움이 없었다.
푸화악!
도철의 몸과 닿은 빙백신장은 빙백신기를 폭발하듯 뿜어냈다.
순식간에 차가워지는 공기.
파릇파릇한 생기로 넘쳐나던 산림이 순식간에 북방의 냉혹한 대지가 되어 버린 듯했다.
빙백신기를 온몸에 얻어맞은 도철은 잠시 움찔했으나, 그대로 기세를 늦추지 않고 앞으로 돌진했다.
새하얀 서리로 뒤덮인 도철의 몸이 허공에 흰색 잔상을 남겼다.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거리.
쩌엉!
핏빛 강기로 만들어 낸 용의 이빨이 얼음으로 뒤덮인 백설지의 양손과 부딪쳤다.
쩌저저적!
백설지의 양손을 덮고 있던 단단한 얼음이 도철의 용아와 만나자 단박에 금이 가며 산산조각 났다.
백설지는 이를 악물었다.
가슴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갈라진 힘의 파편들이 그녀의 몸에 상처를 새겨 놓았다.
어깨, 가슴, 옆구리, 허벅지.
부분부분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백옥 같은 피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찢어진 피부에서 피가 솟구쳐 오른다.
얕지 않은 상처.
치솟는 핏물의 양이 심상치가 않았다.
그 순간, 그녀가 매일같이 소호와 함께 수련하던 수공 산타(散打)가 빛을 발했다.
자연스럽고 능숙하게 움직인 그녀의 양손이 도철의 손목을 붙잡은 것이다.
“……!”
안 그래도 눈사람처럼 온몸에 하얗게 서리가 내려 있던 도철이 팔목부터 얼어붙어 간다.
“캬아아악―!”
도철은 기성을 지르면서 붉은색 기운을 더더욱 끌어 올렸다.
엎치락뒤치락.
두 개의 기운이 거세게 격돌하는 사이, 도철의 철조는 백설지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푸욱―.
피부를 꿰뚫고 근육을 찢는다.
“윽!”
백설지는 처음으로 신음을 흘렸다.
그녀는 아득한 고통에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지만 고통을 끝까지 버텨 냈다.
그녀는 전사이자 사냥꾼.
겉모습처럼 여리기만 한 북방의 공주가 아니다.
그녀는 지독한 고통 속에서도 자신만만하게 두 눈을 빛냈다.
“이년……!”
용생의 여파에서 빠져나온 도철은 그녀의 눈을 보는 순간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그는 아차 싶었으나 그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빙백신기에 붙잡힌 손목은 만년한설에 갇힌 것처럼 딱 달라붙어서 절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비틀고 흔들어도 백설지는 유연한 태극권의 묘리를 살려 절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빙백신기를 얻어맞고 서리로 뒤덮인 온몸은 굳어져서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크아악!”
그래 봐야 한 호흡 쉬고 신수의 힘을 끌어 올리면 단박에 부술 수 있는 힘.
그런데 그 한 호흡이 도철의 명운을 갈랐다.
푸욱―.
푹! 푹! 푹!
도철이 호흡을 들이켜려는 순간, 사방에서 달려든 흑시군들이 들고 있던 무기로 도철의 몸을 꿰뚫었다.
“이년……이……!”
충격을 받아 흐릿해진 도철의 두 눈이,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보이는 백설지의 가슴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빛나고 있는 호박색 보석.
술식이 새겨진 은판에 둘러싸인 집혼기가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