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77화 (406/686)

12권 2화

제29장 황실대망(皇室大蟒) (2)

그아아아―.

도철이 혼절한 듯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그의 칠공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색 연기가 백설지의 가슴으로 빨려 들어갔다.

불이 나서 연기로 가득 찬 방 안에 통풍구만 딱 하나 있는 것 같은 모습이다.

붉은색 연기는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면서 자신이 가야 할 곳으로 향했다.

백설지의 목에 걸린 집혼기로 빨려 들어가, 새빨갛게 빛을 냈다.

스르륵―.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던 거미가 먹잇감을 발견하고 천천히 다리를 펼치듯.

집혼기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백설지의 심맥(心脈)을 파고들었다.

“흡!”

거미의 다리가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듯한 감각.

작고 꿈틀거리는 것들이 몸 위를 기어 다니는 듯한 섬뜩한 감촉.

백설지는 깜짝 놀라 턱을 들고 허리를 활처럼 젖혔다.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기 위해 주춤거렸지만, 그녀의 양손은 도철과 단단하게 엉겨서 얼어붙어 있는 상태다.

“흐읍?”

그어어어어어―.

처음엔 천천히.

하지만 한 번 방향이 정해지자 도철의 몸에서 흘러나온 붉은색 기운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

백설지는 말도 하지 못한 채 굳어져서 몸을 경련시켰다.

그녀의 심맥으로 들어오는 기운은 그녀가 알고 있던 ‘기(氣)’가 아니었다.

일반적인 내공과는 비교할 수 없다.

굳이 따지자면 그녀가 익히고 평생 단련해 온 빙백신기.

자연 상태 그대로 존재하는, 하지만 사람이 감히 다룰 수 없는 극한의 빙백신기를 다루기 위해 북해의 사람들이 누대에 걸쳐 얼마나 노력해 왔던가.

그런데 그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어떤 실체가 없는 기운이 그녀의 몸을 바꿔 나가는 것을 느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의 혈맥은 물론이고 털 한 올, 한 올에까지도 집혼기에서 쏟아져 나온 기운이 폭발적으로 밀려들어 왔다.

“아아앗!”

백설지는 경련했다.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살아 있음을 느꼈다.

그녀가 숨을 쉬지 않아도, 집혼기를 통해 들어온 강렬한 기운이 그녀를 생존시키고 있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심장이 수축했다가 이완되었다가.

집혼기에서 밀려든 강렬한 힘도 그처럼 그녀의 몸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그으으……읍.

툭.

“……!”

그러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던 기운이 갑자기 인위적으로 턱― 하니 끊기자 백설지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백설지는 끝을 알 수 없이 깊고 어두운 무저갱에 발을 딛고 있다가 갑자기 다시 광명 속으로 끌어 올려진 기분을 느꼈다.

숨이 가빠 온다.

심장이 야생마처럼 뛰어서 손끝이 저렸다.

깜빡깜빡.

도철의 두 눈에서 붉은빛이 점멸한다. 백설지가 제정신을 찾는 것과 거의 동시에 도철도 이성을 되찾은 듯 보였다.

‘대단한 자.’

백설지는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눈앞이 온통 피범벅이었다.

꿰뚫리고, 베이고, 얻어맞고.

도철은 다 죽어 가는 몰골임에도 대체 어느 틈에 그랬는지 한쪽 손의 결빙을 풀어 버린 상태였다.

그는 품 안에서 구깃구깃한 황색 부적을 꺼내 스스로 자신의 이마에 붙여 두었다.

두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집혼기에 혼을 빼앗기면서도 어떻게 이렇게나 제정신일 수가 있단 말인가.

“끄으응.”

“크윽?”

도철의 몸에 칼과 도끼를 꽂아 넣은 흑시군들이 얼굴이 벌게진 채 안간힘을 썼다.

그들은 무기를 다시 회수하려 했으나 마치 돌덩어리에 칼이 낀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콰드득.

도철의 몸에 힘줄이 돋아난다.

지금 도철의 근육들은 쇳덩이처럼 단단하게 부풀었다.

쿨럭쿨럭.

도철은 입에서 피를 토하면서도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죽는 게……. 무슨 뜻인 줄 아냐?”

도철은 웃음을 터뜨렸다.

복부에 검이 세 자루나 꽂히고, 등에는 도끼로 다섯 번이나 찍혔을 뿐 아니라 허벅지에는 화살이 열 발이나 박혀 있는데도 말이다.

“넌 네가 궁기를 구할 수 있을 것 같냐……?”

백설지의 눈빛이 흔들렸다.

“시대가 바뀐다……? 우습구나, 우스워. 웃기는 년. 너는 뭐가 다르다고? 크큭, 궁기는……. 나처럼은 못 죽여……. 그놈은……. 백택도 아마…….”

쿨럭쿨럭.

도철이 토한 피가 백설지의 가슴팍을 흥건히 적셨다.

백설지의 두 눈은 혼란으로 물들었다.

도철의 입에서 갑작스레 나온 말이 그녀의 심중을 뒤흔든 탓이다.

궁기.

사흉의 짐승 중 일인인 그가 누군지 이제는 그녀도 알고 있다.

왕진이 그를 미끼 삼아 그녀를 포섭한 탓이다.

‘오라버니.’

백설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촉촉하면서 윤기가 흐르던 입술에 이빨이 박혔다.

피가 흘러내린다.

따끔한 고통이 당장이라도 분노와 절망에 사로잡힐 것만 같던 그녀의 이성을 간신히 붙들어 주었다.

마음이 흔들린 탓일까.

안 그래도 막강해져서 다루기 힘든 기운들이 내부의 혈맥을 엉망진창으로 만들면서 날뛰었다.

“궁기는…… 너 따위는 기억도 못하던데……. 지 혼자 호들갑이라니……!”

“……!”

‘이자도 알고 있구나!’

백설지는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더더욱 하얗게 질렸다.

“우습다……. 우스워……! 정녕 우스워.”

도철은 그녀를 비웃었다. 그러고는 갑자기 짐승처럼 입을 쩍 벌리며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캬아아앗!”

회광반조일까.

아니면 생존의 본능일까.

도철의 두 눈에서는 집념과 아집, 그리고 식욕에 가까운 욕망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내놔! 내놔라! 내가 잡아먹을 거야! 먹는 건 나다! 난 먹히지 않는다아아!”

양팔을 벌리면서 목을 쭉 빼고 덤벼드니, 그 모습이 마치 심장을 파먹으려는 승냥이처럼 사납기 짝이 없다.

백설지는 철조를 쭉 뻗는 도철의 반대쪽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태극권에 제운종.

무당의 무공이 펼쳐졌다.

도철의 팔목을 끈질기게 붙들고, 몸을 반보 뒤로 빼면서 중심을 비튼다.

“하앗!”

그 순간, 그 상황에서 백설지는 발끝으로 땅을 박차고 가볍게 몸을 띄웠다.

구름 같은 몸놀림.

왼발을 유연하게 뻗어 도철의 머리를 거세게 걷어찼다.

뻑!

본능적인 움직임이었으나, 발이 닿는 순간 그녀는 발끝으로 도철의 이마에 붙어 있던 부적을 떼어 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툭.

그어어어어―.

도철의 몸이 움찔 떨리고, 붉은색 연기가 다시 뿜어지기 시작했다.

“캬아아앗!”

콰직!

“윽!”

도철은 마지막 순간까지 짐승처럼 사납게 굴었다.

그는 턱을 걷어채고, 이마에서 부적이 떨어져 나가는데도 이빨로 백설지의 종아리를 깨물었다.

두꺼운 무복을 입었음에도 도철의 사나운 이빨은 옷감을 찢고 그녀의 다리에 닿았다.

피부가 뚫리고 근육이 뜯겨질 것만 같은 감각이 느껴져서 백설지는 다급하게 움직였다.

“놔……!”

왼쪽 다리를 물린 채, 그녀는 유연하게 팔꿈치를 휘둘렀다.

이문정주를 응용한 일격.

그녀의 팔꿈치가 도끼처럼 도철의 태양혈을 찍었다.

뻑! 뻐억! 뻑!

한 번, 두 번, 세 번.

뼈가 부서지는 듯한 격타음이 난 뒤에야 도철의 입에서 힘이 빠졌다.

그……어어어어어!

“……!”

다시 시작된 붉은색 기운의 폭포.

백설지의 몸이 활처럼 휘면서 뒤로 넘어갔다.

도철도 함께 넘어질 뻔하였으나, 그의 몸에 무기를 박아 넣고 있는 흑시군들 덕분에 넘어지진 않았다.

고오오오오―.

일각이 여삼추 같은 시간이 흘러갔다.

백설지가 혼란스러우면서도 고통스럽고, 또한 조금 전까지 폭발적으로 밀려들어서 이제는 몸 내부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막강한 힘에 전율하고 있을 때쯤.

도철은 햇볕에 내놓은 물고기처럼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말라붙어 갔다.

평범했던 피부색이 적송처럼 붉게 변하고, 야생 짐승처럼 탄력 있던 몸은 쪼글쪼글하게 말라붙어서 뼈다귀만 남았다.

쩌적―.

백설지와 연결되어 있던 손의 얼음이 박살 나서 흩어졌다.

도철의 손이 축 늘어진다.

텅―.

도철의 손에서 떨어져 나온 철조가 바닥을 굴렀다.

쿵.

도철이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그는 눈에서 빛이 사라졌음에도 고개는 숙이지 않았다.

목이 꺾일 정도로 꼿꼿이 고개를 든 채 하늘을 쳐다본다.

흑시군 모두가 침묵에 잠긴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흑시군 무력의 상징.

무림 강호의 수많은 문파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잔혹한 무인.

왕진이 키우는 사흉의 짐승.

도철.

“도철이 정말 죽은 건가……?”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그 소리를 들은 흑시군은 그제야 한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실감하고 전율했다.

“후우, 후우.”

백설지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모자라……. 아직.”

그녀는 가슴의 집혼기를 붙잡은 채 신음했다.

집혼기를 완전히 받아들인 지금에야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그녀는 자신이 아직 완전해지지 않았음을 알았다.

일만 명의 혼백.

신수를 만들어 내기 위한 조건이다. 그런데 이미 신수인 도철의 집혼기를 흡수했음에도 어째서인지 그녀의 집혼기는 채워지지 않았다.

‘도철은 완전하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다른 누군가에게 먼저 힘을 빼앗겨서……?’

백설지는 천무공자 장소호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럼에도 이 힘은…… 강해.’

백설지는 양팔에 칭칭 감아 두었던 붕대를 풀었다.

부러져서 팅팅 부어 있던 그녀의 양팔이 점점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붓기가 빠지고, 본래의 혈색으로 돌아온다.

그뿐인가?

그녀가 도철과 싸우면서 얻었던 상처들도 급격히 제 색을 되찾고 있었다.

본래의 모습으로.

아니, 그 이전보다 훨씬 강력한 육신으로 재탄생되어 간다.

“몇 천? 아니, 몇 백만 더 채워도…….”

그녀는 자신이 내뱉은 말에 스스로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짐승이 따로 있나?

사람의 도리를 포기하면 그게 바로 짐승이다.

그녀는 생각을 그만두고 제자리에서 일어섰다.

주변을 둘러싼 흑시군들이 숨 쉬는 것조차 잊은 것처럼 침묵에 휩싸인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안 돼!”

승리를 선언하려던 백설지를 가로막는 목소리가 있었다.

화아악―.

“적습!”

“다가온다! 막아!”

“화살을 쏴!”

“너무 빠르다! 이미 다 왔……!”

쒜에에엑―.

땅을 박찰 때마다 일 장이 넘는 거리가 쑥쑥 줄어드는데, 그 땅을 박차는 속도가 마치 호수를 향해 던진 물수제비 같았다.

지평선 저 멀리서부터 쏘아진 한 줄기 신형이 순식간에 그들에게 당도했다.

방패병이 막으려 했으나, 그들은 날아드는 사람을 건드리지조차 못했다.

하늘을 날 듯 다가온 그는 깃털 같은 몸놀림으로 백설지의 앞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이럴…… 수가……!”

온통 검은 옷에 얼굴에는 새 모양의 가면을 쓴 자였다.

키는 오 척 단구를 조금 넘을까 말까 싶을 정도로 작은 왜소한 몸을 지녔다.

그는 하늘을 보며 무릎을 꿇고 있는 도철을 보더니, 벌벌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가면을 벗어 던졌다.

‘이 사람은!’

백설지는 가면을 벗은 그를 알아보았다.

왜소한 몸체.

적수를 찾기 힘들 정도로 특출하게 뛰어난 경신술.

그리고 공자를 닮은 듯이 지극히 못생긴 외모.

“주작방장?”

백설지는 기억에 남는 이름을 천천히 입안으로 뇌까렸다.

“곽도엽……. 그랬구나. 네가 도철의 보좌였어.”

곽도엽.

한때 무산학관에서 재능을 펼쳤던 주작방장이 눈앞에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도철의 맥을 짚어 보더니, 핏발 선 눈으로 백설지를 노려보았다.

“살려도 좋다는 허가서를 받아 왔는데……! 네년 때문에 다 헛것이었구나!”

곽도엽의 목소리엔 회한이 묻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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