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78화 (407/686)

12권 3화

제29장 황실대망(皇室大蟒) (3)

“살려도 좋다고……?”

“그래! 왕진 태감께서 마지막에 허가를 내주셨다! 자신을 승리로 이끈 장수를 베고 성세를 이룬 자가 없다는 내 충언을 결국 받아들이고……. 결국 허가를 내려 주셨단 말이다! 그런데……! 그런데 네년이……!”

백설지는 격한 감정에 사로잡힌 곽도엽이 탐탁지 않았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독살스럽게 주변의 흑시군들에게 영향을 준다.

‘안 좋아. 병사들이 동요하고 있잖아?’

흑시군들의 눈빛이 흔들리는 게 선명하게 보일 정도.

백설지는 곽도엽을 향해 단호하게 손을 내쳤다.

“학관에서부터 도철의 보좌를 했다는 소리를 듣긴 했는데……. 그렇다고는 해도 이 정도로 추해지다니. 부끄럽지도 않아?”

“뭐……?”

“거짓을 말하다니! 난 직접 왕진 태감께 도철을 죽이라는 명을 받았다. 감히 흑시군의 행사를 거짓말로 혼란시키려 하다니!”

“뭐, 뭐라고?”

백설지는 곽도엽이 화낼 틈도 주지 않고 소리쳤다.

“끌어내! 나중에 심문하겠다!”

곽도엽도 영리한 자이니 평소라면 냉정하게 대꾸했을 것이다.

허나 지금의 그는 감정적이다.

“이런 쳐 죽일!”

처음으로 이성을 잃어버린 그가 폭풍 같은 경신술로 백설지를 향해 달려들었다.

짧은 다리, 짧은 팔로 무기라곤 고작 손바닥 한 뼘만 한 단검 하나뿐이지만, 그래도 무산학관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이였다.

구궁의 방위를 밟으며 찔러 오는 기세가 범상치 않았다.

‘대체 도철과 무슨 사이였기에?’

궁금증이 들불처럼 일어났지만 지금은 그런 걸 들어줄 시간이 없었다.

스윽―.

앞으로 내민 백설지의 오른손은 유난히 하얗고 매끈해서 광채가 나는 듯 보일 정도였다.

집혼기의 힘을 받아들인 뒤의 변화다.

언제나 신체의 주변만 맴돌던 빙백신기가 그녀의 양팔에 가죽을 씌운 것처럼 달라붙었다.

깡!

“……!”

곽도엽의 단검은 엄연히 검기가 씌워져 있었음에도 백설지의 손에 부딪치자 쇳덩이에 부딪친 것처럼 옆으로 튕겨져 나갔다.

휘리릭―.

백설지의 움직임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단검을 쳐 내는 것과 동시에, 태극권의 묘리를 살린 손동작으로 곽도엽의 손을 옆으로 밀어내면서 앞으로 한 발 내딛는다.

바람에 흔들리는 비단 천처럼 부드럽게 다가간 그녀가 곽도엽의 가슴을 장타로 살짝 두드렸다.

뻐억!

“컥!”

겉으로 보기에는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는 정도의 힘밖에 실리지 않은 듯 보였으나 그 여파는 대단했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곽도엽은 공성추에 얻어맞은 것처럼 강한 힘에 밀려 바닥에 자국을 남기며 뒤로 물러났다.

쿨럭 토해 내는 기침.

단 한 번 손끝에 닿았을 뿐인데도 내상이 막심해 보였다.

“그억!”

곽도엽은 마침내 피까지 토했다.

백설지의 손에 얻어맞은 곽도엽의 가슴 앞에서 빙백신기가 청량한 푸른색으로 빛나며 뭉쳤다.

까드득―.

곽도엽의 가슴에 서리가 내렸다. 그가 입고 있던 옷과 피부가 한데 엉기며 얼어붙었다.

당황한 곽도엽이 가슴 섶을 쥐어뜯으려 했으나 이미 그의 가슴 절반은 빙판처럼 얼어 있었다.

“끄으으……!”

고통에 신음하던 곽도엽은 결국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덜덜 떨리는 몸.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부릅뜬 눈이 백설지를 쏘아보았다.

“대체 언제, 이런 마공(魔功)을 익혔나……?”

백설지는 곽도엽과 더 이상 대화하지 않았다.

그녀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곽도엽에게서 시선을 돌린 채 당당하게 소리쳤다.

“우리는 명을 완수했다! 쓰러진 동료를 도와라! 부상자는 치료를 우선해! 도철의 시신은 회수해라. 황궁으로 함께 가겠다. 그리고 날 습격한 범인은……. 내가 직접 심문할 것이다!”

백설지의 명령에 삼백 명가량의 흑시군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그 모습에선, 백설지의 명을 전적으로 따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를 도철의 대체자로서 완전히 승복한 것이다.

‘이제 마지막 과정이 남았다. 신수비처로 가서 나도 신수가 되면 되는 거야.’

백설지는 멀리 북쪽에 있을 황궁을 응시했다.

보석처럼 푸른 그녀의 눈동자에서 붉은색 기운이 언뜻 드러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오라버니.’

***

삼산현은 주변이 세 개의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해서 삼산현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세 개의 산을 부르는 이름은 시대에 따라 달라졌지만, 지금은 백산, 흑산, 영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백산이라 불리는 산은 자꾸만 얼음이 얼고 눈이 내리는지 산봉우리가 백색으로 뒤덮여 있었던 탓이다.

반면에 다른 한쪽의 산은 눈은커녕, 풀 한 포기 덮지 않은 황량한 돌산이라 거무튀튀한 흑색으로 보였다.

백산과 흑산.

당연히 그렇게 불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또 희한하게 백산과 흑산의 사이에 있는 산봉우리는 사시사철 푸르른 녹음을 자랑했다.

멀리서 보아도 그 산의 싱그러운 생명력이 선명하게 느껴질 정도다.

산꾼이나 나무꾼, 사냥꾼들이 가끔 산으로 들어가는데 그때마다 신묘한 경험을 했다면서 자신의 경험담을 무용담처럼 퍼뜨리곤 했다.

평생 산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희한하게도 영산 안에서는 길을 잃었다던가, 분명히 사냥감을 보았는데 쫓아가려고 했더니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던가.

나무를 베려고 했는데, 어느 순간 스르륵 잠이 들어 깨어 보니 산의 바깥에서 자고 있었다던가. 아니면 집채만 한 검은 곰을 봤다는 등의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이었다.

사람들은 반신반의했으나, 무용담이 몇 년이고 이어지자 이제는 그곳을 신선이 사는 영산이라 부르고 그 뒤로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가담항설은 미신이 되고, 미신은 신화가 된다.

이미 삼산현 사람들에게 있어 삼산은 신성한 신선들의 땅이었다.

“여기는 세 개의 산이 있다. 흑산, 백산, 영산. 그리고 이곳에서부터 그 세 개의 지맥이 갈라지지.”

장기린은 커다란 바위가 비석처럼 꽂혀 있는 땅을 가리켰다.

주변에 있는 노송들과 땅에서 덤불져 자라난 풀들, 그리고 드문드문 꽂혀 있는 돌멩이와 바위들까지.

그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바위로부터 시작되는 세 개의 길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인위적으로 사람이 만든 길은 아니지만, 누가 봐도 각각 세 개의 산 정상으로 가는 길이 이곳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정말 그렇네요. 여기부터는 냉기가 흐릅니다.”

조서인은 백산 쪽의 땅바닥을 손바닥으로 직접 만져 보았다.

껄끄러운 흙바닥 아래, 얼음장 같은 차가움이 느껴진다.

잠깐 손을 댔을 뿐인데도 손이 시릴 정도였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저 멀리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새하얀 설산을 올려다보았다.

“이쪽에는 생기가 흐르고…….”

이번에는 영산 쪽을 보며 땅을 만져 보았다.

영산 쪽의 땅은 감촉부터 백산과는 달랐다.

손가락 한 마디만 한 풀들이 끊임없이 자라 있어 손이 닿는 순간 이미 푹신함이 느껴졌다.

마치 따뜻하게 훈풍이 불어오는 봄철 같은 싱그러움.

풀잎에서 넘어온 무당벌레 한 마리가 손가락을 타고 올라와 기웃거리다가 손가락 끝으로 올라갔다.

부우웅―.

손끝에서 날개를 펼친 무당벌레가 영산이 있는 쪽으로 힘차게 날아간다.

조서인은 백산이 있는 쪽과 영산이 있는 쪽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고작 바위 하나 차이로 갈라져 있을 뿐인데, 이렇게나 다르다니……. 신기합니다.”

“그럴 테지.”

장기린은 당연하다는 듯 동의했고, 그다음엔 마땅히 좌측의 흑산을 설명할 거라 생각했던 조서인의 바람을 가뿐히 무시했다.

“가지. 우리는 영산으로 가야 한다.”

“예? 아, 예.”

조서인은 감히 항거하지 못하고 얼떨결에 따라나섰으나 호기심은 주체하기 힘들었다.

보면 볼수록 묘한 산이었다.

하얗게 눈에 뒤덮인 백산.

생기로 넘쳐나는 영산.

그리고 생기 없이 죽어 있는 것 같은 묘한 분위기의 흑산.

계속해서 흑산을 힐끔거리니 장기린도 마음이 쓰였던 모양이다.

장기린은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흑산이 궁금하더냐?”

“사실……. 예. 그렇습니다.”

“보기보다 엉뚱하구나. 저곳의 주인이 있을 때는 흑산은 더욱 이상한 기운을 두르고 있었다. 그나마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데도 아직도 그 여파로 흑산은 생기가 꽤나 죽어 있지. 지금은 깜돌이가 노는 앞마당일 뿐이다.”

“깜돌이……!”

깜돌이.

대미미의 아버지인 대석이 말했던 업무 중의 하나가 떠올랐다.

‘깜돌이와 씨름하기였나?’

하도 희한한 이름이라 기억하고 있었는데, 결국 여기서 또 듣게 된 것이다.

“저곳은…….”

조서인이 뭔가 말을 꺼내려는 그 순간이었다.

쿠우웅―!

“……!”

마치 산사태라도 일어난 것 같은 진동이 백산 쪽에서 울려 퍼졌다.

땅이 흔들려서 조서인이 직접 진동을 느꼈을 정도다.

새하얀 산이 들썩이고, 산 정상에서 확― 하고 피어오른 눈가루들이 안개처럼 백산을 덮었다.

“왜 저런……?”

이유를 물으려던 조서인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장기린의 눈빛은 지극히 냉철했다.

이제껏 보지 못했던 모습이다.

마냥 소호의 아버지이자 천하에 유래 없이 뛰어난 창사라고만 생각했던 조서인은, 그제야 장기린이 냉철한 장수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조금이나마 눈치챘다.

“반항이 심하군. 그래도 오래가진 못하겠지.”

“예?”

“백산의 주인에게 누군가가 찾아왔다. 그놈이 문제덩어리라서 저런 일이 벌어졌을 뿐.”

장기린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네가 신경 쓸 부분은 아니다.”

“네…….”

“가지. 지금부터 만날 분은, 조금 특별한 분이다.”

조서인은 알 수 없는 기대감이 들었다.

장기린이라는 사람도 특별한데, 그런 사람이 특별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일까?

긴장과 흥분 속에서 조서인은 끊임없이 발을 움직였다.

장기린은 편안한 자세로 다리만 움직일 뿐인데, 특별한 경신술을 사용하지 않는데도 몸이 앞으로 가는 속도가 놀랄 만큼 빨랐다.

조서인이 아무리 제운종을 사용해도 장기린을 따라잡기가 힘들 정도다.

영산의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청량한 향기가 점점 더 짙어져 갔다.

길 양옆에 드리워진 나무들도 점점 강한 생명력을 뿜어낸다. 마침내 정상에 도달했을 때, 그곳에서 조서인은 밑에서는 보이지 않던 꽤나 튼튼하게 지어진 기와집을 발견했다.

‘아니, 이런 곳에 기와집을?’

자연과 어우러진 선경(仙境)에 한 폭을 차지하려면 자고로 다 쓰러져 가는 허름한 초가집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으음,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조서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칸은 다 합쳐서 세 칸 정도밖에 없는데 그 느낌이 범상치가 않았다.

조서인은 알고 있었다. 저렇게 푸른빛이 은은하게 비치는 매끈한 기왓장이 얼마나 비싼 재료인지.

그리고 천정을 떠받드는 목재들 또한 얼마나 고급인지 멀리서도 그 질감이 심상치가 않을 정도다.

“희한하네…….”

“그래, 이놈아. 희한하지?”

조서인은 화들짝 놀라 몸을 경련했다.

어찌나 놀랐던지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정도다.

“꺽.”

“내 집이지만 잘 안 어울린단 말이야. 재료를 너무 좋은 걸 썼나?”

경륜이 묻어나면서도 청수한 목소리였다.

조서인은 황급히 몸을 좌측으로 돌렸다.

기와집을 바라보고 있던 장기린의 옆에 어느샌가 백발, 백염의 노인이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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