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79화 (408/686)

12권 4화

제29장 황실대망(皇室大蟒) (4)

“잘 지내셨습니까?”

장기린은 정중한 태도로 노인을 대했다.

양손을 모은 자세.

절도 있게 허리를 굽힌 모습에선 같은 마을의 존장을 대할 때보다 더 깊은 존경이 우러나왔다.

‘대체 저분이 누구시기에?’

조서인은 그 노인의 정체를 생각해 내기 위해 머릿속으로 온갖 이름들을 떠올렸으나 생각해 낼 수 없었다.

‘무인일까? 그러면 무림 십대고수의 아래가 아닐 텐데? 아냐, 소호 아버님이 무공만 갖고 존경을 나누는 분은 아니셔. 우 신의님도 의술만 뛰어날 뿐인데 소호 아버님의 존경을 받잖아? 그럼 누구일까? 범상치 않은 분은 분명한데…….’

생각을 하면 할수록 미궁에 빠지는 느낌이었다. 그중에 가장 이해가 안 가는 건 눈앞에 있는 노인이 무공을 익힌 흔적을 전혀 알아챌 수 없다는 점이었다.

깃털처럼 가벼운 걸음걸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깊은 숨의 깊이.

언제든 자신을 방어해 낼 수 있는 완강한 무형기.

노인에게서는 무인에게서 나타나는 그 어떤 습관도 보이지 않는다. 노인은 무색무취의 물처럼 그저 잔잔하게 가라앉아 있을 뿐이다.

‘에이, 뭐 어때. 무공을 익히셨든 안 익히셨든. 소호 아버님이 공손하게 대하는 어르신이 분명한데.’

조서인은 생각을 멈추고 예의만을 갖췄다.

“웬 어린아이를 데려온다 싶어 소호인 줄 알았는데. 막상 만나 보니 전혀 다른 놈이로다. 이 아이는 누구더냐?”

“소호의 친우입니다.”

“친우라! 벗은 서로 닮는다던데 희한하구나. 성품이 정반대인 녀석이 친우라니. 아이야, 궁금하구나. 너는 어떻게 소호와 벗이 되었느냐?”

조서인이 인사도 하기 전에 던져진 질문에 놀라서 장기린을 바라보니 대답해 드리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소호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재능을 지녔지만, 그래도 무공이 좋아서 무산학관이라는 곳에 들어갔습니다. 입관 시험 성적이 좋지 않았던 저를 또래 아이들이 많이 놀렸지만……. 소호만이 저의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래? 뭐라고 편을 들어주었는고?”

“저는 둔재가 아니라고…….”

“둔재가 아니다?”

조서인은 지금 이 순간도 똑똑히 기억한다.

은위군은 차라리 솔직한 편이다.

보이지 않게 그를 괴롭히던 시선들이 있었다. 무언가를 시도할 때는 늘 ‘실패할 게 뻔해.’라는 듯한 시선이 따라왔고, 교관들은 알게 모르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며 그를 더 챙겨 줬지만 그 친절함이 오히려 서인에게는 불편했다.

오로지 소호만이 달랐다.

소호는 진심으로 서인이 둔재가 아님을 믿고 도와주려 했다.

“그러했구나. 그 악동이 너는 둔재가 아니라고 했더냐?”

“악동……?”

“그래. 그 영악하고 대담한 놈은 날 보고 무공을 익혔는지 궁금해서 다리를 걸었다.”

“흡.”

조서인은 웃을 뻔한 것을 참느라 이를 악물었다.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너무나도 소호가 어렸을 때 할 법한 일이지 않은가.

“웃는다? 짐작 가는 게 있다는 뜻이렷다?”

“크흠, 흠, 아닙니다, 어르신.”

“고얀 놈이지. 안 그러냐?”

껄껄 웃는 노인에게서 호탕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지금이 이 정도면 젊었을 때는 얼마나 호방했을지 짐작이 가는 사람이었다.

거기에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장기린도 한마디 거들었다.

“다리를 걸었다니. 순화해서 말씀해 주시는군요.”

“허어, 그럼 어찌 말할까. 목검으로 배운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적룡창을 썼다고?”

“기가 막히게 잘 쓰긴 했지요.”

“그건 그렇다. 고얀 놈인 건 변함없지만.”

끌끌 웃는 노인에게서도 소호에 대한 애정이 엿보였다.

이런 분들에게 둘러싸여 어린 시절을 보내다니. 역시 소호는 부러운 친구였다.

“아이야. 이제 긴장이 좀 풀렸느냐?”

“예? 아, 예. 감사합니다.”

“저 깎아 놓은 바위 같은 놈도 마음을 써서 어울리지 않는 맞장구를 쳐 주는 걸 보니 네가 좋은 인상을 남기긴 한 모양이구나.”

“예……?”

“묻겠다. 아이야, 너는 무공을 익혀서 어찌되고 싶으냐?”

“저는…….”

공손히 대답하려던 조서인은 헉! 하고 놀라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분명히 장기린의 옆에 서 있던 노인이 어느샌가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서 조서인을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팔자로 기른 수염.

세월의 흔적을 이기지 못하고 깊은 고랑이 팬 얼굴이지만 눈빛만큼은 그 어떠한 젊은이보다도 강렬하다.

그는 잠시 현계로 내려와 사람의 속을 꿰뚫어 보는 신선 같기도 했고, 고요한 암흑 속에서 사람을 응시하는 요괴 같기도 했다.

조서인은 눈이 마주치자마자 정신이 아찔해졌다.

“타고난 품성이 겸손하고 성실하여 흠잡을 것이 없으나, 그간의 삶이 각박하여 사람을 무공으로 판별하는 버릇이 남았구나. 희뿌연 미혹이 눈을 가리고 있으니 그것을 벗어야 세상이 바로 보일 것이니라.”

“아……!”

“기껏 타고난 무재를 스스로가 모르니 그 또한 재능이라. 늘 노력하는 삶을 사니 네게 필요한 것은 끊임없이 올라갈 목표이며, 네게 주어질 것은 끝없는 발전이다. 아이야. 너는 기린과 내가 나눈 약조를 알고 있느냐?”

연륜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담긴 강렬한 패기와 지극한 현기는 듣는 사람의 정신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조서인은 숨이 턱 막혔다.

도인.

아니 그를 넘어선 신선이다.

조서인은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감각 속에서 겨우 대답을 짜냈다.

“저는…… 잘…… 모릅니다…….”

“내가 등선을 준비할 때 기린은 이곳으로 나를 데려오며 말했다. 제자가 될 아이가 생기면 데려오겠다고. 그런데 네가 함께 왔구나. 아이야. 너는 나와 기린의 인연으로 만들어진 무공을 이을 준비가 되었느냐? 감히 말하건대, 이 길은 네 생각보다 고되고 험난할 것이니라.”

“인연……? 제자……?”

“그래. 계파는 다르지만 내 무공을 잇는 것이다.”

“어르신께서는…… 누구시기에……?”

“난 구양재인이라는 사람이다. 들은 적이 있느냐?”

“검선……!”

그 순간 훅― 하고 끼쳐드는 기파는 조서인이 감히 감당할 수 없는 힘을 품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람 냄새가 나는 대화를 나누던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전혀 다른 존재였다.

저 높은 산봉우리에서 자라는 솔의 향과 같은 청량감.

고요한 절 안에 들어온 것 같은 신령스러움.

인간사 속세를 초탈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전율이 일 지경이다.

구양재인의 두 눈을 마주 보자 깊이를 알 수 없는 끝없는 구름 속으로 몸이 떨어지는 듯 아찔했다.

‘정말로 검선……!’

지금 그의 눈앞에는 검술 하나만으로 신선의 경지에 오른 존재가 서 있었다.

모든 무림인들의 꿈.

강호 무림의 정점인 무림오존 중의 일인이다.

“그…….”

조서인은 멍하니 중얼거리다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장기린을 바라봤다.

들었던 말들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떠돈다.

타고난 품성.

눈앞을 가리는 희뿌연 미혹.

기린과의 인연.

그리고 제자.

“어……?”

이해가 되질 않고 묻고 싶은 말이 산더미지만 조서인은 그에 대해 물을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

정신은 육체를 지배하는 법이다.

이는 일류의 경지를 넘어선 무인이라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이미 감당할 수 있는 정신적 한계를 넘어선 조서인은 그대로 몸이 뒤로 넘어가 버렸다.

아득해지는 이성.

까맣게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린 것도 같다고, 조서인은 생각했다.

***

“나약한지고. 이래서야 유성검과 적룡창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쓰러진 조서인을 검선의 방 안에 눕혀 두고 나오던 장기린이 나직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유성검까지 생각하셨습니까? 저는 적룡창만 생각했습니다만.”

“커험!”

“마음에 드시니 본신을 드러낸 것 아닙니까? 저 때도 그러셨지요.”

“너는 좀 다르지 않더냐. 사신이 죽일 듯이 달려드는 데 이 힘없는 늙은이야 본신 실력을 드러내 이 노구를 지킬 수밖에.”

검선 구양재인은 억지로 기침을 토해 내며 약한 노인처럼 행동했다.

장기린은 어이가 없어져서 웃었다.

검선이 약한 늙은이면 이 세상에 약하지 않은 자가 어디에 있을까.

게다가 저런 너스레라니.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아 하던 손녀, 구양화를 만났을 때나 보이던 행동이지 않은가.

“힘없는 늙은이라니. 농담도 잘 하십니다.”

검선 구양재인은 호탕하게 껄껄 웃었다.

검은색 비단 옷.

하얀 실로 수놓은 검과 국화 문양이 검선의 웃음소리에 맞춰 들썩거렸다.

“성실하고 겸손하여 백연이 생각나는 아이다. 타고난 성품이 맑으니 가르칠 맛이 나겠어.”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장기린은 백연을 떠올렸다.

풍운객잔에 찾아왔던 순박한 청년.

반야혼을 잡겠다고 구양화와 함께 수레를 타고 떠돌던 청년이 지금은 백도를 대표하는 무림맹주가 아닌가.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따로 없다.

뽕 밭이 바다가 되듯.

세상은 장기린 없이도 무한히 흘러가며 변하고 있었다.

‘세월은 무상하다. 한 번 사는 인생, 집착을 해서 무엇할까.’

거침없이 달려오던 인생을 쉬기 위해 풍운객잔을 차렸다.

잊고 싶었던 과거가 발목을 잡아 한 번 풍비박산이 났으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열었던 것이 바로 지금의 풍운객잔 아니던가.

부인인 진휘연은 상계에서 포부를 펼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중이다.

아들인 소호는 은자촌이 지루하다면서 무림 강호에 평지풍파를 일으키겠다며 뛰쳐나갔다.

모두가 제 길을 찾아가는 지금, 장기린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기린아. 너의 무력은 나날이 나에게 근접하고 있구나. 이제는 어디로 갈 것인고?”

앞길을 가로막았을 때는 악연이라 여겼으나, 이제는 스승이 된 검선이 장기린을 걱정했다.

“제가 할 일을 해야겠지요.”

장기린은 잔잔히 웃었다.

풍운객잔을 지키는 것.

그리고 한 가정의 아버지로서 의무를 다하는 것.

“아들놈이 실수하기 전에 바로잡을 것들이 있으니……. 바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평범한 삶은 정말로 어렵군요.”

구양재인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걸 알고 있으니 네가 웬만한 도사보다 낫구나. 구양세가의 못난 놈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로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에 애환이 담겼다.

가문을 책임지는 자리의 무게를 아는 사내들의 마음이 이심전심으로 통한 것이다.

“며칠 두고 가거라. 내가 조금 다듬어 보마.”

“부탁드리겠습니다.”

양손을 모아 공손한 예를 표하는 장기린에게 구양재인도 예로 받아 주었다.

“기린아.”

“예.”

“저건 도와주지 않아도 되겠느냐?”

구양재인이 가리키는 방향에는 백산의 설경이 있었다.

구양재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쾅! 하고 또 한 번 폭발이 일어나며 눈가루가 허공에 흩날렸다.

“예. 괜찮습니다.”

삼산현의 수호자.

장기린은 신뢰 가득한 눈빛으로 백산을 바라보았다.

“저곳에는 그가 있으니까요.”

***

백산의 중턱.

지맥에서 올라오는 한기가 땅 위의 모든 것들을 얼린 설산 위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그는 황실의 관리들이나 입을 법한 비단 관복 위에 새하얀 문사건을 쓰고 있었다.

평범한 체구.

오히려 살짝 마른 듯한 몸이라 천생 학사처럼 생긴 자였으나, 건장한 장한도 일각을 버티지 못할 한파 속에 묵묵히 서 있는 모습에서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흘렀다.

그는 한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산은 많은 진법으로 지켜지고 있었다.

진법을 구성하는 것은 바위도 있고, 나무도 있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백산의 중요 지맥 곳곳에 그가 직접 세워 둔 빙벽들이었다.

“오는군.”

무심하게 중얼거리는 말에 대답하듯, 빙벽이 하나 터져 나가며 새하얀 얼음 가루를 흩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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