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80화 (409/686)

12권 5화

제29장 황실대망(皇室大蟒) (5)

훅― 하고 다가오는 존재감.

박살 난 얼음 파편들을 맨손으로 짓이기며 짐승처럼 달려드는 자가 있다.

얼핏 봐도 키가 칠 척이 넘는 거구의 육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신을 붕대로 칭칭 감았는데, 팔꿈치 위의 양손만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는 모습이 기괴했다.

궁기.

왕진이 키우는 사흉 중 최강의 짐승이 이곳 삼산현에 와 있었던 것이다.

쿵, 쿵, 쿵.

떨어져 있는 거리는 이십 보.

붕대로 칭칭 감은 발이 설원을 밟을 때마다 바닥에 깔린 눈이 먼지처럼 흩날렸다.

“너의 삶이 안타까워 빙벽으로 길을 막고 기회를 주었거늘. 어찌하여 돌아가지 않고 끝까지 덤벼드는가?”

문사건을 쓴 사내는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으나, 궁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양팔 벌려 달려드는 그의 손끝에는 극한의 빙백신기가 유형화되어 실려 있었다.

푸른빛이 번뜩인다.

안 그래도 차가운 설원은 궁기로 인해 더욱 서늘해졌다.

크아아아―.

괴성을 지르며 달려든 궁기가 허공으로 펄쩍 뛰어올랐다.

“짐승이 따로 없다. 무엇이 너를 그렇게까지 사납게 만드는가?”

문사건을 쓴 사내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호리병을 들고 손바닥에 물을 몇 방울 따라냈다.

그리고 검지와 중지로 부드럽게 손가락을 몇 번 튕겨 내자, 궁기가 컥! 하고 숨 막히는 소리를 내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크륵……!”

붕대로 칭칭 감긴 입 부근에서 피가래가 끓는 소리가 났다.

새하얀 붕대 너머로 점점이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정확히 세 군데.

문사건을 쓴 사내가 손가락을 튕긴 숫자와 일치했다.

“백……택……!”

궁기는 몸에 얼음 못이 박힌 상태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어별로 뚝뚝 끊어지는 말투였으나 의미를 알아듣기는 어렵지 않았다.

“북해. 는 잊지 않는다. 너를.”

“그런가. 나도 북해는 잊지 못한다.”

문사건을 쓴 사내.

그는 태조 주원장부터 영락제 시절까지 황제를 보좌했던 황실의 수호신이었다.

황실의 대신들 중 백택의 존재를 모르는 자는 없었다.

현명한 조언자이자 비할 바 없는 호위무장.

최초의 신수(神獸)이며 수십 년간 세 황제를 모시며 자신의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던 그가 황실에서 사라졌을 때는 난리가 났었다.

단지 백택 한 명이 사라졌을 뿐인데 명 황실은 끝이라느니 황제는 대체 누가 지키느니 난리가 나 모든 관리들이 암암리에 백택을 추적했던 것 또한 유명한 이야기다.

추후에 선덕제가 조정을 안정시키고 나서야 백택을 찾는 이들이 줄었다. 그만큼 백택의 존재는 컸다.

존재감이 크다는 건 그곳에서 쉴 틈도 없이 많은 일을 했다는 뜻.

이제야 삼산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건만, 하늘은 그가 휴식을 취하는 걸 두고 보지 못하고 또 다른 시련을 보내 온 것이다.

“태감. 원한다. 황실로. 돌아와라.”

스읍―.

하얀 입김을 만들어 내던 뜨거운 숨이 칭칭 감긴 붕대 사이로 도로 빨려 들어갔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듯 보였다.

마치 비둘기처럼 가슴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싶을 때 궁기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몸을 두드렸다.

투웅!

북 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궁기는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원뿔 형태의 얼음 덩어리 세 개를 뽑아냈다.

“크륵……!”

피가래가 그치고 궁기의 몸이 안정을 되찾았다.

서서히 자세를 잡는 궁기에게서 다시 한 번 맹렬한 투기가 솟구친다.

백택은 감탄했다.

“회복이 빠르군. 술법의 세계가 이리도 발전했던가. 아니면 죽은 자를 신수로 만들었기에 네가 특별한 것인가?”

문답을 하지 않고 달려드는 궁기에게 백택은 다시 한 번 손을 물에 적셔 앞으로 흩뿌렸다.

따아앙!

궁기는 빙백신기를 담은 장타로 백택의 탄지공을 막아 냈다. 튕겨나간 얼음 못이 바닥에 박히며 눈가루를 피워 올렸다.

“우습. 다!”

한 번 당한 공격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듯했다.

이제 남은 간격은 십 보.

평상시의 궁기라면 두 걸음 만에 다가갈 수 있을 짧은 거리지만, 상대가 백택이라면 여전히 천 리만큼이나 먼 거리다.

“이건 어떠한가?”

백택은 호리병을 통째로 휘둘러 허공에 뿌려 버렸다.

얼핏 봐도 수십.

아니, 수백에 달하는 물방울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며 빛난다.

반짝임은 순간.

백택이 손바닥으로 물방울들을 쳐 내자 수백 개의 얼음으로 만들어진 화살이 궁기를 향해 날아갔다.

“……!”

궁기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후우우우웁!

궁기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쿠우웅―!

거구의 사내가 전력을 다해 발을 구르니, 그것은 단순한 진각이 아니라 백산 전체를 떨쳐 울리는 거센 충격을 만들어 냈다.

궁기는 무릎과 골반을 저릿저릿하게 만들 정도의 반탄력을 느끼면서 양손의 엄지를 모아 정면을 향해 쌍장을 내질렀다.

바닥에 쌓여 있던 눈이 마치 회오리바람에 빨려 올라가듯 궁기의 발을 타고 위로 치솟았다. 강한 상승 기류가 향하는 곳은 명백했다.

궁기의 정면!

둥그렇게 하나로 합쳐진 빙백신기가 백택이 쳐 낸 탄지공에 맞서서 강한 폭발을 일으켰다.

빙백신장!

혼백조차 얼어붙는다는 북해빙궁의 비기가 궁기의 손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쿠와아아아―!

퍼펑!

궁기가 전력으로 쳐 낸 빙백신장은 수백 개의 얼음 못을 단박에 박살 내며 정면으로 날아갔다.

커다란 용이 불꽃을 토해 내듯, 궁기의 빙백신장은 백산의 정수리까지 닿을 만큼 치솟으며 모든 것을 휩쓸었다.

휘이잉―.

거센 눈보라가 일어났다.

차디찬 한기가 사방을 휩쓸고 지나간 후, 정면에는 백택 모양의 얼음 덩어리가 하나 서 있을 뿐 그 외의 인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황량했다.

온 세상이 눈으로만 덮여 있는 듯 했다.

궁기는 나지막하게 거친 숨을 토해 내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는 백택의 생사를 확인해야 했다.

만약 빙백신장으로 죽였다면 끌고 오라는 명령을 어긴 셈이나, 그래도 족했다. 황실과 왕진의 위협이 되지 않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니 말이다.

쩌저적―.

“……!”

그런데 백택만 한 체구의 얼음 덩어리는 궁기가 가까이 가자마자 몇 개의 조각으로 나뉘며 박살 나 버렸다.

속은 텅 비어서 얼음 덩어리 내부 어디에도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피슈슈슉―.

“……!”

궁기가 자세를 바로 잡기도 전에 바닥으로부터 비스듬하게 솟구친 힘의 흐름이 궁기의 상체를 휩쓸었다.

서걱―.

쩌저정!

궁기의 가슴이 비스듬한 각도로 쩍― 하니 갈라졌다.

붕대가 뚝뚝 끊어져서 잘려 나가고, 박살 난 얼음 파편들이 그의 피부에 수백 개의 생채기를 남겼다.

이인(夷人) 특유의 노란 머리와 하얀 피부가 눈에 띄었다.

죽은 생선처럼 빛이 없는 파란 눈이 사방을 살펴보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바닥을 내려다본다.

백택은 그곳에서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그 짧은 틈에 꽁꽁 얼어붙은 땅을 대체 어떻게 파고 들어간 건지 상상도 되질 않는다.

백택의 두 눈이 하얗게 빛난다. 마치 눈동자까지 얼어붙은 것처럼 보였다.

그는 호리병에서 남은 물을 허공에 모조리 부어 버렸는데 물 덩어리는 땅으로 떨어지지 않고 공중에 둥둥 떠 있었다.

절정의 허공섭물(虛空攝物)!

백택이 오른손을 위로 향하자, 물 덩어리도 궁기의 머리 위로 떠올랐다.

그러고는 네 개로 갈라지더니 커다란 원추형의 날카로운 흉기가 되었다.

퍼버벅!

“……!”

궁기는 움찔 몸을 떨었다.

망치로 정을 박듯, 위에서 내리찍은 원추형의 얼음 못이 궁기의 양 발등을 꿰뚫으며 바닥에 박힌 탓이다.

잠시 균형을 잃고 허우적거리던 궁기의 양손을 이번엔 나머지 두 개의 얼음 못이 땅에 박아 버렸다.

크아아아아―!

궁기는 괴성을 내질렀다.

양손, 양발이 바닥에 말뚝 박힌 그는, 목줄로 맨 짐승처럼 보였다.

너덜너덜해진 붕대 사이로, 금발과 푸른 눈이 기괴한 도깨비처럼 살기를 띈다.

“고통도 못 느끼는가. 그래서 그리 과감히 움직이는 것이군. 그리고 아까부터 눈에 거슬리던 것이 있었다.”

백택은 뒷짐을 진 채 걸어와 궁기의 품 안에 손을 넣었다.

까드득!

궁기는 이빨로 그를 깨물기라도 할 것처럼 몸을 뒤틀었으나 그의 양손, 양발을 꿰뚫은 얼음 못이 너무나 강력하게 박혀 있어 움직이지 못했다.

“이거로군.”

백택은 궁기의 품 안에서 손바닥만 한 장신구를 꺼내 들었다.

잘 세공된 금판 위에 붉은색 보석이 박혀 있는 장신구였다.

생긴 것만 보면 화려한 장신구에 불과하지만, 그리 단순한 물건이 아님은 곧 알 수 있었다. 금판에 깨알만 한 글씨로 새겨져 있는 것은 천축에서 건너온 법문(法文)들이다.

집혼기와 같은 주구(呪具)인가?

아니다.

집혼기와 비슷하지만 크게 다른 기운을 품고 있었다.

우우웅―.

장신구는 백택의 손위에서 점점 더 강한 빛을 내뿜었다.

사나운 짐승처럼 몸부림치던 궁기가, 백택이 그 장신구를 들어 올리자 움직임을 딱 멈췄다.

“왕진은 영리한 사람이로군. 황실의 창고에서 이런 것까지 찾아낸 것인가? 뭐라고 하던가? 이 금문(金文)이 백택과 명 황실의 약속의 증표이자 술법의 근원이니 이것만 있으면 나를 다룰 수 있을 거라 하던가?”

백택은 무심한 눈빛으로 손바닥 위의 장신구를 응시했다.

이미 백 년에 가깝게 살아왔다.

백택은 삶의 미련은 없었으나, 그 삶을 남에게 좌지우지 당하는 것은 더더욱 거절하고 싶었다.

“성공하면 좋고, 실패하여도 이 금문이 파괴되면 나는 이 땅에 매인 게 없게 되겠지. 제약이 있기에 힘이 생기는 법. 자유의 몸이 된 백택이 더 이상 황실의 일에 끼어들게 할 수는 없으니 효과적으로 방해물을 제거하는 한 수로군. 영리한 사람이야. 간계만 펼치며 살기엔 재능이 아까울 정도다. 허나.”

콰직.

백택은 양손으로 장신구를 붙잡고, 허공섭물을 이용해 수기(水氣)를 내리쳐 장신구를 반으로 쪼개 버렸다.

“사람이 하는 일이다. 영원한 것은 없는 법. 과거의 술식이 지금도 신수들을 제약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쩌어엉!

장신구는 비명을 지르듯이 쇳소리를 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우르릉―.

하늘에서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벼락이라도 칠 것처럼 우중충해진 곳에서 백택의 눈에서 빛나는 하얀색 안광은 점점 짙어져만 갔다.

“오만하도다. 나만 없다면 너희의 세상일 것 같은가? 짧은 소견. 강호 무림에 대해 잘 모르는 무지의 소치다. 당금의 무림인들이 그리 만만해 보이던가?”

앉아서 구만 리 창천을 굽어보는 현자가 있다면 백택 또한 그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장기린의 배려로 백산에서 고요한 신선의 삶을 살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하늘의 뜻을 읽고 도도하게 흘러가는 운명의 흐름을 느꼈으며, 현 세태에 대해 걱정하며 세상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 많은 살생을 저질러 원한을 짊어진 대가가 고작 무림 십대고수 수준의 힘이라니. 그리고 그걸로 무림 천하를 통일했다 외치는 꼴이라니. 가당치 않다.”

궁기는 반발하듯 몸을 꿈틀거렸으나 차마 말은 하지 못했다.

백택의 기세가 너무나 강력하여 그의 정신과 영혼을 제압하고 있는 탓이다.

“무림 강호에는 나와 비슷한 경지에 오른 무림오존들이 있고, 그들은 너희와 제대로 싸우려 하지도 않았다. 네가 황실의 후광을 걸치고 있었기 때문이야. 그걸 네 힘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매화향이 나는구나. 너는 선경에 오를 수 있었던 위대한 무인을 언제까지 괴롭힐 셈이냐.”

한 걸음 내딛은 백택이 궁기의 명문혈에 손을 가져다 댔다.

“……!”

처음으로 궁기가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몸을 비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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