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권 6화
제29장 황실대망(皇室大蟒) (6)
그아아아아!
마치 동굴을 울리는 바람과 같은 괴성이 울려 퍼졌다.
백택은 발광하며 경련하는 궁기를 앞에 두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북풍한설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준엄하게 경고했다.
“네놈이 괴롭힌 영혼들의 고통에 비하면 새 발의 피나 다름없다. 엄살떨지 말고 참아라.”
“카악!”
백택은 짐승처럼 이를 드러낸 궁기의 이마를 턱 하니 붙잡았다.
왼손으로는 궁기의 이마를 잡은 채, 오른손으로는 명문혈에 손바닥을 대고 정신을 집중했다.
기이잉―.
궁기의 이마에 핏줄이 돋아났다.
“훕!”
터엉!
백택의 왼발이 땅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반면에 궁기의 몸은 거대한 무언가에 얻어맞은 것처럼 위로 들썩였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올라갈 때는 하나였으나 떨어질 때는 둘이 되었다.
궁기의 육신은 내려왔으나, 동시에 분리된 붉은색 기운이 연기처럼 피어올라 허공에 머무른 것이다.
“카악! 컥!”
양손, 양발이 땅에 못 박힌 채로 궁기는 기침을 토해 내며 침을 질질 흘렸다. 지독한 탈력감이 궁기를 잠식했다.
새하얗게 드러난 양팔과 목덜미에서 힘줄이 잔뜩 돋아났지만, 그 안에 실린 힘은 현저히 줄어들어 예전의 위용을 점차 잃어 갔다.
“고생하시었소. 이미 천도(天道)를 어기고 시간을 지체한 탓에 그대를 위한 제(祭)를 올릴 시간도 없구려.”
백택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향해 정중하게 예를 갖추어 말했다.
허공에 있는 붉은빛이 마치 그에게 대답하듯 일렁거렸다.
“화산은 영산이며, 그 안에 무수히 많은 인연을 품고 있으니 잠시의 고난은 거뜬히 이겨 낼 것이오. 그러니 화산신검의 이름은 내려 두시오. 그대가 아니라도 화산은 스스로를 지켜내리라.”
서서히 흩어져 가는 붉은빛을 되찾기 위해 궁기가 발악을 하며 몸을 뒤틀었다.
“크아악!”
하지만 백택이 호리병을 꺼내 궁기의 양손 양발을 고정시키고 있는 얼음 못에 붓자 몸을 경련하며 조용해졌다.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꽃에 물을 뿌린 것과 같다.
잠시간은 가라앉을 것이나, 불꽃은 언젠가 다시 활활 타올라 기세를 살릴 것이다.
불을 끄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불씨조차 남지 않게 완전히 짓밟아야 한다. 초장에 완전히 불씨를 밟아 끄지 않으면 언제 다시 불꽃이 피어날지 모르는 일이다.
“난 너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
백택은 완전히 흩어져 버린 붉은빛에 인사를 마친 후 궁기의 앞에 서서 그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양손 양발이 땅에 박힌 채 주저앉아 있는 궁기는 이를 드러냈다.
“아깝구나. 잘 살아남았다면 영웅이 되었을 재능인데, 한순간의 미망으로 이렇게나 떨어져 내렸구나. 너는 어찌하고 싶으냐? 이대로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채, 계속해서 나쁜 짓만 하며 지낼 것인가?”
궁기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숨만 씨근거릴 뿐 대답하지 않았다.
시퍼렇게 날이 선 두 눈에선, 기회만 되면 백택을 물어뜯겠다는 짐승 같은 살기가 흘러나왔다.
“난…… 죽인다. 백택을.”
“그런가.”
백택은 뒷짐을 진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할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았겠지.”
백택은 잠시간의 고민 끝에 강하게 발을 굴렀다.
쿠구궁―.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갈라지더니, 지저에서 물줄기가 솟구쳤다.
물줄기는 마치 한 마리의 용처럼 살아 있는 듯이 보였다.
투명하고 반짝거리는 물줄기가 허공을 유영한다. 수룡은 충분히 자유를 즐긴 뒤, 갑자기 궁기의 머리 위에 똬리를 틀고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큭……!”
궁기의 승모근이 한계까지 부풀어 올랐다. 힘줄이 돋아나고 온몸이 경직되었다.
“그아아아아!”
궁기가 마지막으로 용을 쓰듯 전력을 다해 몸을 일으키려 들었다.
쩌적!
“……!”
그때 궁기의 양손을 꿰뚫고 있던 얼음 못에 금이 갔으나, 그걸 눈치챈 것은 백택뿐이다.
촤아아악!
궁기는 쏟아지는 물줄기를 피하지 못한 채 정통으로 얻어맞았다.
한겨울, 한기가 가득한 설산에서 온몸에 물을 끼얹은 셈이다.
궁기는 온몸에 서리가 내린 것처럼 하얗게 얼어붙어 갔다.
“크윽……!”
그뿐만이 아니다.
궁기를 흠뻑 적신 물줄기는 그의 주변을 둥그렇게 둘러싸는 단단한 빙벽을 만들어 냈다.
얼어붙은 몸을 움직이더라도 결국 빙벽에 막혀서 갇히는 구조였다.
“이미 삼도천을 보고 온 놈이니 이 정도로 끄떡없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 안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거라. 네가 누구인지. 네가 어떤 것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화아아악―.
백택이 두 눈을 번뜩이며 살기를 뿜어내자 백산 전체가 두려움에 몸을 떠는 듯했다.
눈발이 흩날리고 천지가 진동한다.
백택은 담대한 궁기마저 공포에 질릴 정도의 위압감을 천지사방으로 흩뿌리고 있었다.
“명심하라.”
백택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다음에 보았을 때 네가 아무런 변화도 없다면, 쫓아가서 죽이겠다.”
쩌저적―.
쿠웅!
빙벽이 완전히 얼어붙는 것과 동시에 궁기와 백택의 사이가 완전히 단절되었다.
사나운 방문객은 두꺼운 얼음 속에 묻혔다. 움직이는 것은 백산을 지키는 고독한 한 명의 수호신뿐이다.
“옛날 생각이 나는군.”
백택은 치기 어리고, 자만심에 차 있는 신수를 보니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신수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영락제를 모실 때, 장기린과 처음 만났을 때도 생각났다.
“황실이 나를 다시 찾는다?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다. 나의 천명은 분명 끝났을 터. 그러면 등선을 할 때가 온 것인가?”
기이잉―.
손끝이 떨린다. 백택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금문을 부쉈으니 이제 그에게는 이곳 현세에 남은 미련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셈이다.
전화위복이랄까.
황실이라는 족쇄를 다시 채우려던 방문객이 오히려 하나 남아 있던 족쇄를 풀어 준 셈이 될 줄이야.
어느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이래서 세상은 재미있는 것이다.
우우웅―.
백택은 흩어졌다가, 다시 단단하게 모이기를 반복하는 그의 무형기를 보다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아직은 아니야.”
백택은 천천히 백산의 정상으로 올라갔다.
황량하게 부는 설풍 속, 발목까지 올라오는 눈 속으로 백택의 신형은 점점 멀어져 갔다.
***
우두둑―.
온몸에 어긋나 있던 뼈마디가 단번에 제자리로 돌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조서인은 거대한 물줄기 속에 몸을 담그고 떠있는 한 마리의 물고기였다.
내가 물인가.
아니면 진기가 물인가.
내가 물고기인가.
아니면 진기가 물고기인가.
너와 나의 경계가 흐려지고, 오로지 흐름만이 남았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진기의 흐름이 그의 몸속에 존재하던 불순물들을 다 쓸어 갔다.
온몸에 먼지를 묻힌 채 흐르는 강물 속에 몸을 던진 것과 같다.
몸을 닦아 주는 강물의 흐름도 기분이 좋은데, 내부의 불순물을 씻어 주는 진기의 흐름은 얼마나 기분이 좋겠는가.
극락이 따로 없다.
조서인은 새로 태어나는 것이 이런 기분일까 생각했다.
“스으으으읍―.”
천천히, 최대한 느리게 숨을 들이쉬는데도 진기의 흐름이 급격히 빨라졌다.
두근― 두근―.
조서인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인생 최대의 집중력을 발휘했다.
그는 평온한 흐름 속에서 새로 태어나는 것 같은 쾌감을 느끼는 중이지만, 한편으로는 위험천만한 길을 건너고 있기도 했다.
새로 배운 호흡법은 모든 것이 달랐다.
임독양맥을 통해 전신에 내공을 흘려보낸다는 점은 동일한데, 초반부의 혈도 순서를 몇 개 바꾼 것만으로도 진기의 유동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백회(百會)에서 후정(後頂)으로 가는 게 아니라, 백회에서 뇌호(腦戶)로 갔다가 그다음에 후정으로 가는 식이다.
단지 몇 개의 혈도를 앞뒤로 바꿨을 뿐인데, 얌전히 걷던 조랑말이 질주하는 야생마가 된 듯 진기가 거칠었다. 청량하던 물살이 이제는 혈도 내부를 활활 불태우는 불덩어리가 된 것 같다.
거세게 흐르는 강물이 물길 주변을 휩쓸고 제방을 무너뜨리듯이, 한순간이라도 방심하면 몸속의 균형을 박살 낼 수 있으니 아찔하기 그지없었다.
‘야생마를 길들여야 해. 아니, 길들이는 게 아니라 내가 익숙해져야 해. 이 흐름에 익숙해져야 한다. 담대하고 강해져야 해.’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의 천성은 바꿀 수 없다. 조서인은 담대하고 강인한 성격은 타고나지 못했다.
허나 흐름에 익숙해지는 것.
그것 하나만을 생각하면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력이라는 건 조서인의 특기가 아니던가.
조서인은 최대한의 경각심을 끌어 올렸다. 천하에 길이 남을 작품을 수놓는 심정으로 하나, 하나 호흡에만 정신을 집중했다.
대체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걸까.
배고픈 것도 잊었으며,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호흡에만 집중했다.
너무 거센 진기의 흐름에 잡아먹히지 않도록, 기호지세로 호랑이 등에 올라탔으니 얌전히 올라타 있는 것에만 온 정신을 집중했다.
“후우우우우우…….”
마침내 호흡이 멈추었다.
달릴 만큼 달린 호랑이는 이제는 지겨워졌는지, 아니면 할 일이 별로 안 남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자신의 동굴을 찾아 조용히 들어가 잠을 청했다.
자연스럽게 눈을 떠보니 하늘은 너무나 밝아 해가 중천에 떠있었다.
“시간이…… 안 흘렀어?”
조서인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분명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 호흡을 시작했는데, 아직도 중천에 떠 있다니?
“이놈아. 시간이 안 흐르긴, 사흘이나 지났다!”
“예?”
조서인은 깜짝 놀라 허둥지둥 몸을 일으키려다가 천장에 머리를 박았다.
살짝 몸을 튕겼을 뿐인데, 전력을 다해 발을 구른 것처럼 몸이 위로 솟구쳤던 탓이다.
“쿠억?”
모양 빠지는 비명을 지르면서 천장 대들보에 머리를 박은 후, 이번엔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눈앞에서 별이 번쩍거렸다.
고통과 충격으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떨어진다!’
화들짝 놀라서 낙법을 취하려고 손을 쭉 뻗었는데, 손바닥이 나무 바닥을 뚫고 아래로 푹 꺼져 버렸다.
“우와아아악?”
스스로의 힘에 놀라 소리치고, 의외로 대들보를 들이받은 머리를 제외하고는 아픔이 전혀 없다는 것에 두 번 놀랐다.
바닥을 뚫고 들어간 손을 빼려고 반대쪽 손으로 나무 벽을 짚었는데, 이번엔 나무판자를 부러뜨리면서 왼손이 옆으로 쑥 빠졌다.
“우억?”
졸지에 한 손은 바닥을, 한 손은 벽을 뚫은 채로 고정되어 버렸다.
당황하여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게 무슨 일인가.
대미미나 할 법한 일을 왜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인가.
“쯧쯧쯧.”
혀를 차는 소리에 놀라 고개를 퍼뜩 들어 올리자, 방문 밖에서 백발, 백염의 멋들어진 노인이 뒷짐을 진 채 고개를 젓는 모습이 보였다.
“아주 지랄을 하는구나. 지랄을 해.”
조서인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