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282화 (411/686)

12권 7화

제29장 황실대망(皇室大蟒) (7)

“어, 어르신.”

부끄러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어찌 이런 꼴이란 말인가.

검선이 친히 나서서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자신에게 무공을 전수해 주었는데, 이리도 한심한 꼴을 보여서야 되겠느냐는 말이다.

“저는, 저기, 눈을 뜨고 그냥 일어섰을 뿐인데…….”

조서인이 허둥지둥 양팔을 빼내자, 부서진 나무 파편들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방 안이 더러워졌을 뿐만 아니라 조서인의 소매에도 먼지 같은 가루들이 잔뜩 묻었다.

“어어…….”

이런 꼴을 하고 검선께 인사를 드릴 수야 없지 않겠는가.

조서인이 옷에 묻은 먼지들을 손으로 팡팡 두드리고 있으니 어째선지 검은색 가루 같은 것들이 함께 후드득 떨어졌다.

‘이게 뭐지?’

대충 먼지를 다 털어낸 조서인이 앞으로 나서려는데, 검선이 손을 저어 그를 말렸다.

“거기 잠시 서 있거라.”

“예……?”

“너는 모르겠구나. 건곤조화신공(乾坤調和神功)을 익힌 자는 일정한 경지에 이르면 환골탈태의 공능을 자연스레 얻게 된다.”

“예?”

조서인은 너무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환골탈태라니.

전설로나 들어왔던 이야기가 아닌가.

무공의 경지가 조화경에 들면 무공을 펼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가진 몸으로 완전히 변해서 새로 태어난다는 게 바로 환골탈태다.

조서인은 더듬더듬 자신의 몸을 만져 보았다.

혹시 뭔가가 바뀌었나 싶어 기대가 부풀어 올랐다.

‘바뀌었나? 아냐, 그대론데……? 달라진 게 없어. 모양은 그대로인데 힘만 세진 건가?’

매일 몸을 단련하는 무인이 자신의 몸 형태를 모를 리가 없다.

조서인은 손끝부터 발끝까지 상세하게 살폈으나, 몸을 움직일 때마다 소맷자락에서 이상한 검은색 가루가 떨어지는 것 말고는 변한 점이 없었다.

‘옷이 많이 낡았나? 왜 이런 게 떨어지지? 쑥스럽게. 검선께서 계신데.’

조서인은 얼굴이 빨개진 채 최대한 소맷자락을 펄럭이지 않게 조심하면서 자세를 바로 했다.

“착각하지 말거라. 하루아침에 진정한 환골탈태가 이루어지진 않는다. 하지만 몸에 쌓여 있던 노폐물과 혈도에 남아 있던 찌꺼기들은 초반에 특히 많이 나오지. 네가 자꾸 가루처럼 뿌리고 있는 그것들 말이다.”

“예……?”

“너는 아무래도 본인의 체취이니 느끼지 못하는 듯하지만, 일단 뒤뜰에 개울이 있으니 어서 가서 씻도록 하거라.”

“……!”

조서인은 당황하다 못해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체취라면 냄새가 아닌가?

냄새가 나고 있었다니!

조서인이 밖으로 나가기 위해 한 걸음 내밀자, 검선은 한 걸음을 물러났다.

강호 무림 역사에 이름이 남을 위대한 무인이 소매를 들어 얼굴 앞을 가리고 있다.

조서인의 냄새 때문에!

“빠, 빨리 씻고 오겠습니다.”

쾅!

허둥지둥 발을 내딛자 몸이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흡?”

깜짝 놀란 조서인이 양팔을 마구 휘저으며 균형을 잡으려 했으나 쉽지가 않다.

왼발을 디디면 오른쪽으로 몸이 기우뚱하고, 오른발을 내딛으면 왼쪽으로 몸이 기운다.

검선과의 거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급격한 가속에 놀라 양발을 땅에 디디니, 이번엔 땅을 망치로 내리찍은 것 같은 굉음이 터졌다.

콰드드득―.

“으억!”

단단한 흙바닥에 길게 고랑이 팼다.

결국 멈춰서는 데 성공하긴 했으나, 강한 반탄력이 몸을 흔들었다.

훅―.

검은 가루가 먼지처럼 풀풀 피어올랐다.

검선은 한숨을 내쉬면서 뒤뚱거리는 조서인의 뒷덜미를 잡아 균형을 잡는 데 도움을 주었다.

“가, 감사합니다.”

“…….”

“이렇게 폐를 끼쳐서 정말, 몸 둘 바를…… 아, 숨을 쉬지 않으시는군요. 빠, 빨리 다녀오겠습니다!”

조서인은 이번엔 제대로 하겠다는 마음으로 움직이려 했으나, 검선이 묵묵히 고개를 저어 그를 말렸다.

“예? 걷지 말라고요?”

휘익―.

조서인의 눈앞에 보이던 풍경이 갑자기 뒤로 길게 늘어졌다.

검선의 한 걸음이 만들어 낸 광경이다.

그리 대단한 신법을 쓴 것 같지도 않은데, 검선은 새처럼 훨훨 날아올라 순식간에 기와집의 지붕을 통째로 뛰어넘었다.

“흐읍!”

너무 놀라면 비명도 나오지 않는 법이다.

긴장한 강아지처럼 사지를 뻣뻣하게 뻗은 채 굳어 버린 조서인은 그 자세 그대로 개울물 속에 풍덩 빠져 버렸다.

“우풉!”

조서인은 뼛속까지 시리도록 전해지는 한기에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땅을 짚고 움직이려 하는데, 검선의 준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힘 빼거라!”

백발, 백염.

고급스러운 검은색 비단 장포에 흰색 수실로 장식된 검과 국화 문양이 화려하게 존재감을 뽐낸다.

개울가의 바위 위에 서 있는 모습이 마치 커다란 학이 한 마리 서 있는 듯했다.

조선인을 내려다보는 검선의 눈빛은 신비로워 보였다. 그가 외쳤다.

“마차 바퀴에 진흙이 잔뜩 묻은 데다 굳어져서 굴러가지 않던 마차가 한 대 있었다. 그 마차는 항상 성실하게 앞으로만 나아가려 했으나, 늘 자기가 왜 그리 느린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 그런데도 다른 마차들과 보조를 맞춰 왔으니 기특하기 이를 데 없다. 그랬던 마차를 강물에 빠뜨려 진흙을 다 떼어 냈다. 그러니 그 마차는 이제 얼마나 잘 굴러가겠느냐?”

“아……!”

어린아이에게 설명하듯 유치한 비유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지금 조서인의 몸 상태를 정확히 비유한 촌철살인의 평가다.

“하지만 제대로 움직이려면 아직도 할 일이 아주 많다. 불필요하게 붙어 있던 먼지들도 좀 닦아 내고, 못질도 새로 해야겠지. 거기에 기름칠도 좀 해야 하고 말이다. 하지만 일단 개울물에서 꺼내는 게 가장 먼저 할 일이다.”

검선은 껄껄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너는 오늘부로 새로 태어난 아이라고 생각해라. 걸음마부터 시작하는 거다. 어머니의 포근한 양수에서 기어 나와 똑바로 서는 것부터 하라는 뜻이다.”

새로운 인연.

신묘한 무공.

그리고 천하의 둘도 없을 스승.

“아……!”

조서인은 문득 깨닫는 바가 있어 개울물 속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이런 호사를 제가 누려도 될는지 모르겠지만……. 죽을힘을 다해!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감격에 겨워 눈물이 떨어질 지경이다.

소호가 손을 내밀어 무공을 함께 고민해 주었을 때가 첫 번째.

이렇게 장기린의 소개로 검선으로부터 지도를 받게 된 지금이 두 번째 기회였다.

조서인은 누군가에게 이렇게나 큰 도움을 받는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그 지나친 겸손이 득이 될지 실이 될지는 모르겠다. 허나 보기에는 좋구나.”

검선은 인자하게 웃은 뒤에 말을 이었다.

“내가 아니라 기린이다. 네 친우 소호의 아비가 너를 가르치겠다고 마음먹었으니 나도 한 팔을 거들 뿐이다. 너는 앞으로 나를 태사부라고 부르거라.”

“태, 태…….”

소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태사부라니!

무림오존 중에서도 최고라 칭송받는 검선이 조서인의 태사부라니!

“어허! 또 기절하면 이번엔 혼쭐을 낼 것이야.”

“흡.”

“어디 사내대장부가 픽픽 기절을 하느냐.”

조서인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조서인이 어디 심약한 성격이던가. 그렇지만 기절했던 것은 사실이었으니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검선의 사승을 잇는다는 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소호 아버님이 그럼 검선의 제자셨어? 구양세가 사람도 아닌데?’

점입가경.

충격의 연속이라 조서인은 아찔해지려는 정신을 붙잡았다.

그는 엉금엉금 기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걸음을 처음 걷는 어린아이처럼.

비틀거리면서 균형을 잡으려 노력하는데, 검선은 그 모습을 차분하게 지켜보며 기다려 주었다.

“후우.”

마침내 개울가로 나오는 데 성공한 조서인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댔다.

“허허, 그 마음은 기꺼우나, 구배지례는 아껴 두거라. 소호 아비에게 해야지.”

“감사……합니다!”

“들어가자. 앞으로 할 일이 너무나 많아.”

조서인은 붉어진 눈시울을 닦아 낸 뒤, 황급히 검선의 뒤를 쫓았다.

‘이 은혜를 잊지 않겠어. 반드시 강해질 거야.’

무산학관에서 나온 후에 새롭게 이어지는 기연.

조서인은 미래에 대한 결의를 조용히 가슴에 품었다.

***

“서인이는 언제 오려나?”

창밖을 바라보던 청년이 혼잣말을 내뱉었다.

새하얀 비단 옷에 비단 장포.

황금 수실로 장식된 옷은 청년의 깨끗하고 하얀 얼굴과 잘 어울렸다.

언제나 나른한 듯 장난스럽게 웃는 청년이었으나, 지금만큼은 잔잔한 호수처럼 분위기가 가라앉은 채 비가 내리는 바깥의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여기에서 놀고 있었어?”

창밖을 내다보던 청년.

소호는 문을 활짝 열고 허리에 손을 척― 하니 얹은 대미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미미 왔어?”

“다들 바쁘게 일하고 있는데, 이렇게 혼자 농땡이를 피울 거야?”

“농땡이라니. 잠깐 생각을 정리했을 뿐인데?”

“그걸 농땡이라고 하는 거야. 생각을 정리할 틈이 어딨어? 빨리빨리 움직여야지.”

평범한 여인들보다 훨씬 큰 키.

윤기가 흐르는 붉은색 비단에 커다란 꽃을 수로 새겨 놓은 장포를 어깨에 걸치고 있는 모습은 영락없이 할아버지인 혈수라와 판박이다.

최근 들어 뒷세계에서 거화신녀라고 불린다는 소문은 소호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기녀들뿐만이 아니라 수염이 덥수룩한 호걸들도 그녀에게 열광을 한다던데, 그 이유를 소호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점점 예뻐지네.’

키는 크고, 어깨도 넓지만 얼굴은 연 부인을 닮아 여성스러운 외모였다.

눈도 동그랗게 크고 속눈썹도 길다. 팔도 길쭉길쭉하고 손도 가늘고 긴데, 대체 어디서 그런 강력한 힘이 나오는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아마 그 이해할 수 없는 격차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끄는 이유 중 하나일 터였다.

심지어 점점 성격도 화끈해져서, 얼마 전에는 평소에 안면이 있던 기녀를 괴롭혔다는 이유로 안휘성과 합비 사이에 있던 산적들 소굴 하나를 쑥대밭으로 뒤집어 놓고 온 일은 유명했다.

“왜 그렇게 쳐다봐?”

지그시 응시하는 소호의 시선이 이상했던 걸까.

대미미가 고개를 갸웃하며 의아해했다.

“아니, 미미도 이제 다 컸구나 싶어서. 점점 어머님을 닮아 가네?”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대미미는 작게 한숨을 내쉬긴 했지만 싫은 얼굴은 아니었다.

살짝 얼굴을 붉히면서 웃더니 빨리 나오라고 손짓했다.

“요즘 세력을 넓히기로 해서 정신없이 바쁘잖아. 새로 들어오는 무인들도 많고.”

“그래. 그랬지. 요즘은 너무 많은 것 아닌가 싶을 정도야.”

“천무공자의 이름이 천하를 진동시키고 있으니 어쩔 수가 없어. 무림인들은 소문을 좋아하잖아?”

“그렇긴 하지. 근데 너무 좋아하는 거 아냐? 소문만 듣고 천릿길을 걸어 날 보러 오다니. 그게 말이나 돼?”

“왜 안 돼? 예전에 개구리 바위 위에서 맨날 ‘지겹다―!’라고 소리치던 오라버니면 그보다 더 멀리 있어도 보러 갈 걸?”

“으음.”

소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럴 땐 동생이 자란 것이 실감이 났다.

너무 맞는 말만 하니 반박할 수가 없지 않은가.

“예전의 미미가 좋았어. 그때는 막, 분홍색 꽃신만 신고. 무슨 말만 해도 부끄러워하면서 종종 걸음으로 도망치고 그랬는데.”

“언제 적 소리를 하는 거야?”

대미미가 등짝을 철썩 때리려는 것에 깜짝 놀라서 소호는 궁신탄영을 쓸 뻔했다.

“진정해. 네가 때리면 장난으로 안 끝난다고.”

“흥, 이상한 말을 하니까 그렇잖아.”

대미미의 얼굴이 빨갛다.

말투랑 행동은 대범해졌지만, 속은 그때의 대미미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하핫, 가자, 미미야. 사람들이 어디서 기다린다고?”

“연무장. 거기에 다들 모여 있어.”

소호는 성큼 발을 내디뎠다.

이제는 무산학관의 장소호가 아니었다.

천무련(天武聯)의 천무공자.

정도의 기치를 내걸고, 무인들을 규합할 천무련의 천무공자가 되는 길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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