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권 8화
제29장 황실대망(皇室大蟒) (8)
“황산에서 온 방익지라고 합니다.”
덩치가 크고 눈이 작은 사내가 웃는 얼굴로 포권을 취했다.
나이는 사십 대 중반 정도 되었을까.
주변의 환경을 살피는 눈빛이 날카롭다. 옷자락 사이로 보이는 목덜미와 손목 부근의 흉터들이 그의 인생이 험난했음을 증명했다.
“이 먼 길까지 와 주셔서 감사해요. 소호입니다.”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천무공자를 직접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직접 만나 보니 이렇게나 헌앙한 청년이셨을 줄이야. 일세의 영웅을 곁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아 앞으로가 기대됩니다.”
“과분한 칭찬이시네요. 저는 그저 무림 강호를 무림인들의 손으로 되찾고 싶을 뿐이에요.”
“왕진 태감과 흑시군으로부터 말입니까?”
“예.”
그 점에 대해 소호에게서는 흔들림이 없다.
방익지는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연배에, 그만한 배포. 이 방 모는 다시 한 번 감탄했습니다.”
“아뇨. 당연한 일인걸요. 천무련을 만들겠다는 소문을 듣고 가장 먼저 찾아와 주신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릴게요.”
“그 말씀은 제가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방익지는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예를 차리며 공손하게 소호를 대했다.
소호는 기분 좋은 미소로 그를 대한 뒤, 방익지의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또 다른 사내를 맞이했다.
“남해에서 온 이남성이라고 하오.”
이남성은 무뚝뚝한 사내였다.
특출한 체구는 아니었으나 군더더기 없이 잘 단련된 육체를 지녔다. 바다에 가까운 남해 사람답게 피부가 잘 그을려 있었는데, 그게 오히려 건강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반가워요. 소호입니다.”
소호가 먼저 포권을 취하자 이남성은 묵묵히 마주 포권을 취했다.
“남해는 도철의 피해를 입은 적이 있었소. 해산물을 좋아한다는 당금의 황제 때문이었지. 도철을 쓰러뜨릴 수 있는 무인이 없어 한을 품고 있었는데 그대가 대신 그 한을 풀어 주었소.”
“그랬나요?”
“그렇소. 그에 대한 감사를 표하지 않으면 장부가 아니오. 작은 힘이 나마 그대의 대업에 보태고 싶소.”
이남성은 달변가는 아니지만, 말에 진심을 담을 줄 아는 사내였다.
소호는 그 진심을 어떻게 받아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공손히 인사했다.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남성은 묵묵히 마주 포권을 취한 뒤 섭주해의 안내를 받아 안쪽으로 향했다.
소호는 그날 방익지와 이남성을 빼고도 열 명의 사내들을 만났다.
대부분이 하북과 하남에서 왔고, 그 외에도 성(城)을 몇 개나 지나야 올 수 있는 먼 거리를 걸어온 사람들도 많았다.
“오늘 만나 본 사람들은 모두 소속된 문파가 없으면서도 실력이 좋은 사람들입니다. 하오문의 도움을 받아 선별했어요.”
섭주해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하오문의 도움으로 사람들을 선별하면서 악인들을 철저하게 걸러냈다는 확신이 느껴졌다.
소호는 방익지와 이남성을 머릿속으로 떠올린 뒤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경험이 많아 보였어.”
“소속된 문파가 없거나, 아니면 지방의 작은 문파 출신은 낭인들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게 되죠. 지금의 명성을 얻기 위해 고생을 많이 했을 거예요.”
“그렇구나.”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하는 낭인의 삶.
고독한 무림인의 길.
소호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고난의 길이었다.
“저들에게는 앞으로 우리 천무련에 합류할 사람들의 관리를 부탁할 생각입니다. 대신 소호 형이 무공을 좀 다듬어 주고요. 위치상은 수하지만 식객 정도로 대우해 주시면 되겠네요.”
“식객이라…….”
소호는 가만히 생각을 거듭하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지방의 작은 문파 출신이라는 건……. 상승 무공을 익힐 기회가 적었다는 이야기지?”
“그 상승 무공이라는 게 팔대문파 수준의 무공을 말하시는 거면 맞습니다. 지방에도 훌륭한 문파들이 있기는 하지만, 지금 모인 사람들은 대문파에 들어갈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지요. 하지만 무림 강호에는 기인이사들이 수없이 많으니 지방의 작은 문파 출신이라고 해서 무조건 폄하하는 건 좋지 않을 겁니다.”
“그렇긴 해. 사실 아버지도 팔대문파 출신이 아니고, 은자촌의 어르신들도……. 어? 그러고 보니 검선 할아버지랑 불요신승 할아버지 빼고는 다들 거대 문파 출신이 아니네?”
“그렇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소호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그런 거 보면 확실히 무공은 문제가 아니야. 사람이 문제지.”
“그렇지만 거대 문파 출신들은 다들 일정 이상의 무공을 지니고 있죠. 애초에 거기까지 무공을 가르칠 수 있는 뛰어난 선배이자 스승들도 많고요. 평균의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평균…… 그렇지. 평균이 중요한 거구나. 대문파 출신들은 평균적으로 강하고, 지방의 작은 문파 출신들은 그 편차가 크다?”
“맞습니다.”
소호는 자신이 힘을 쓰면 그 격차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도우면 사람들의 무공을 끌어 올릴 수 있겠지?”
“물론이죠. 천무삼보를 쓰겠다는 거죠?”
섭주해가 놀리듯이 묻는다.
창백해 보일 만큼 하얀 얼굴 위로 장난스런 미소가 떠올랐다.
“천무삼보는 무슨. 쑥스러우니까 그런 건 말하지 마.”
“왜요? 호사가들이 다들 그렇게 말하는데. 천무공자에게는 세 가지 보물이 있으니, 첫 번째는 상대가 어떠한 무공을 익혔는지 한눈에 알아보는 눈, 두 번째는 어떠한 무공이든 다 익힐 수 있는 천부의 재능이며, 세 번째는 모든 무공의 상성을 꿰뚫어 보는 식견이다.”
“그만해, 그만. 그런 거 다 허명이야. 호사가들 말은 믿을 거 하나 없다는 걸 얼마 전에 깨달았어.”
소호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리고 그들이 서 있는 땅을 크게 둘러보았다.
시선이 닿는 지평선까지 이어진 땅.
이 땅이 모두 지금은 소호의 관리하에 있다.
“도철이 가지고 있던 땅에 염상 목인규의 돈을 얻었어. 이제 우린 뭘 할 수 있을까?”
소호는 질문을 던졌지만, 그건 답을 원하는 질문은 아니었다.
이미 소호와 섭주해, 두 사람은 끊임없이 많은 대화를 나누어 왔다.
소호가 원하는 바.
섭주해가 이루고 싶은 일.
그 모든 뜻을 합쳐서 결정한 일이었다.
“천무련의 기치를 높이 세울 수 있을 테죠.”
“천무련……. 이름이 좋아. 맞아. 이곳에 우리의 성을 짓자. 무림 강호를 예전으로 돌려놓는 거야.”
“좋습니다.”
“궁금해. 우린 얼마나 높이 올라갈 수 있을까?”
하늘을 향해 처음 날아오르는 새가 이런 기분일까?
갈 수 있는 곳이 너무 많으니 가슴이 벅차오른다.
주변은 높은 담장으로 끝없이 이어져서 마치 성벽처럼 그들을 지켜 주고 있었다.
도철이 지배하던 흑시군 부대의 근거지였던 이곳은 지대가 넓고 토양의 질이 풍부했다. 연무장을 지을 수도 있을 테고, 사람을 모아 무공을 단련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안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커다란 일을 준비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날 수 있는 곳까지 날아가 볼 겁니다.”
섭주해는 피로가 남아 있는 듯한 얼굴로, 하지만 열정적으로 씩 웃었다.
소호는 섭주해의 가라앉은 눈 밑을 지그시 보다가 웃었다.
“응. 앞으로도 많이 도와줘.”
“당연한 말을.”
“밥 좀 잘 챙겨 먹고.”
“이래 봬도 삼시세끼 잘 챙겨 먹고 있어요.”
“영 못 먹는 얼굴인데. 누가 보면 내가 동생 굶기는 줄 알겠다.”
“후훗, 생각 없이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제가 혼낼 겁니다.”
소호는 다시 장난스러운 얼굴로 돌아와 창밖을 힐끔 바라봤다.
“오늘이 그날이지?”
“네. 무림맹주를 만나는 날이요.”
“무림맹이 안휘성 근처에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 우리가 이곳에 자리 잡은 게 운명일지도 모르겠네.”
“그러면 좋겠네요. 슬슬 출발해야 해요.”
“알았어. 가자. 얼마나 걸려?”
“두 시진쯤 가면 됩니다. 마차로요.”
“신법으론?”
“…….”
“알았어. 얌전히 마차 탈게.”
소호는 손을 휘휘 내저으면서 마구간으로 향했다.
섭주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그런 소호의 뒤를 따랐다.
***
무림맹은 안휘성에서 하남으로 가는 방향에 존재했다.
특별한 지형이나 지명을 말할 수 없는 것은, 무림맹이 있는 곳이 그렇게 관료적으로 딱 나눌 수 없는 곳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은자촌 같다……!”
소호는 눈을 빛냈다.
마차의 창문 밖으로 상체를 쭉 빼고 반가워했을 정도다.
그도 그럴 것이 소호가 보기엔 지금 무림맹의 위치는 은자촌의 지형과 상당히 비슷했다.
높은 산이 두 개나 겹쳐 있었다.
하얀 구름을 치마처럼 두르고 있는 산이 서로 겹쳐 있고, 그 사이에 언덕이 하나 봉긋하게 솟아 있다.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은 언덕이다.
토끼풀이 잔뜩 나 있는 바로 그 언덕 위에 호젓한 정자가 한 채 지어져 있었다.
잘 말린 오동나무로 지어진 정자는 아늑해 보였다.
한꺼번에 열 명도 다 앉지 못할 만큼 크기가 작지만, 바로 옆에 심어져 있는 벚나무와 인근의 텃밭과 함께 보면 그보다 더 잘 어울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창밖으로 몸 내밀지 말고 들어와요. 소호 형, 무림맹주와 첫 만남이지 않습니까.”
“응? 좋은 것에 감탄하면 안 되는 거야?”
“되죠. 그래도 이제 약관도 넘었는데 무게를 잡으세요. 천무련의 련주가 될 사람이잖아요?”
“으음.”
“어째 최근 들어 점점 더 어릴 때로 돌아간 것 같네요. 도철과의 싸움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요?”
섭주해가 심유한 눈빛으로 소호를 응시한다.
소호의 허리춤.
무산학관에서부터 늘 차고 있던 철제 요대 안에 집혼기가 있다는 사실을 섭주해는 잘 알고 있었다.
“아냐, 아냐.”
소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면서 탐탁지 않다는 듯 중얼거렸다.
“난 권위 같은 건 좀 싫은데……. 굳이 무게를 잡을 필요도…….”
“소호 형…….”
섭주해의 입에서 다시 한 번 한숨이 흘러나왔다.
“……천무련을 대표해서 무림맹주를 만나러 온 사람이 무슨 소리예요.”
소호는 말을 듣는 낌새가 아니었다. 섭주해는 고개를 저은 뒤, 대화의 방향을 조금 바꾸었다.
“무림맹주는 무당파의 속가 제자 출신으로 무림맹주의 자리에까지 오른 대단한 인물이에요. 우리와도 관계가 있어요. 우리 마을에서 몇 번 봤던 누님이 있죠? 구양화라는 이름의.”
“어? 검선 할아버지 손녀?”
“지금 우리가 만나러 가는 무림맹주가 그 누님의 남편이에요.”
“……!”
소호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촉망받는 후기지수에 불과했던 백연이라는 무인이, 갑자기 무림 강호의 실세로 떠오른 건 구양화 누님과의 혼인 덕분이었죠. 덕분에 천하제일 세가라고 불리는 구양세가를 등에 업고, 오대세가와 구파…… 아니, 이제는 팔파일방을 잇는 유일한 인재라고 평가 받아서 무림맹주의 자리에 올랐지만……. 네, 소호 형은 관심이 없죠?”
섭주해의 얼굴에 그늘이 진다.
소호는 언덕 위의 정자를 바라보며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예쁜 누나……. 맨날 나를 괴롭혔지.”
“괴롭혔다고요? 그랬어요?”
“주해는 자주 아프니까 약하다고 안 건드리고, 미미는 귀엽다면서 맨날 묵필로 난 치는 법이나 가르치고. 그런데 나는 머리를 쥐어박으면서 괴롭혔다니까?”
“후후훗, 그랬어요?”
“그랬어. 그런데 이렇게 또 인연이 되다니. 그 누나가 무림맹주 부인이란 말이지?”
소호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런데 우리 마을 대단하네. 대체 연결 안 된 곳이 어디야?”
“글쎄요.”
섭주해는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딜까요?”